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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8화 (8/261)

8. 나라를 살리는 두 번째 방법(1)

문득, 과거의 역사에서 야리소연이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미쳤어?! 그러면 숲의 정령들이 우리한테 저주를….’

‘쳇. 알았어. 나중에 저주받아서 난리 나도 난 모르는 일이야!’

설마 진짜로 내가 정령들한테 저주를 받은 것일까? 내 마음대로 숲에 불을 질러서? 그런 미신 같은 일이 벌어질 리 없을 텐데.

“에이, 설마. 잘못 들었겠지…?”

소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도 사실 반쯤은 유령 비슷한 존재 아닌가. 화살을 맞아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왕도의 폐허를 닮은 저승에서 버젓이 움직이지 않느냐 이 말이다.

만일 내가 임무에 실패하면 저런 망령들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으으.”

억지로 잡스러운 상념을 억누르고 지푸라기 침대에 누웠다.

눈치 없는 유령들은, 내가 좀 자려고 해도 계속해서 ‘우어어’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나는 잠들면서, 아까 헤어지기 전 천사가 알려준 명령어를 속삭였다.

“도시 창.”

그러자 이 폐허가 되어버린 왕도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 도시 이름: 없음 ]

레벨: 1

지배자: 없음

문명 수준: 폐허

도시 특성: 없음

시설물: 궁전(Lv.1), 기념물(Lv.1).

종교: 도끼의 악마 가리비수(100%).

플레이버 텍스트:

‘왜 여기에 왔냐고요?’ 그냥 단순한 폐허입니다. 여기 들리는 사람은 취향이 매우 특이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 오면…. 꼭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아서요.’

※ 주민이 없습니다.

※ 시설 담당자가 없습니다.

+

초라한 설명문.

나는 새삼 깨달았다.

‘왕국은 역시 망했다….’

그리고 나라만 망하면 다행인데, 내 인생까지 쫄딱 망해버렸다.

◈          ◈          ◈

유령들과 함께 보낸 잠이 끝났다.

“푹 쉬었습니까, 간신이여?”

“아뇨. 잠자리가 진짜 최악이었는데요.”

“그렇습니까? 잘 되었군요. 그냥 예의상 물어본 겁니다.”

천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열심히 임무를 달성해야만 비로소 잠자리도 나아집니다. 노력하시길.”

“천사님. 이게 전부 제 잘못이고 제 책임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네. 나라를 망친 귀족에게는 권리도 무엇도 없습니다. 평범한 백성은 물론이고 노예보다 한참 못한 존재라 봐도 무방합니다.”

슬슬 진지하게 이 여인을 악마라고 불러야지 않을까?

“그럼 다음 임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천사가 휙 손짓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글자들이 차곡차곡 새겨졌다. 앞으로 내가 맡게 될 임무들이 차례대로 쭉 늘어진 것이었다.

+

<역사변이점>

[ 호랑이 부족의 습격 ]

- 완료! (★★★).

[ 눈물 젖은 피난길 ]

-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 평원의 나라, 산의 나라 ]

- 건국 30년 전. 난이도: D

[ 대장간을 지어라 ]

- 건국 0년. 난이도: D

[ 사랑과 전쟁 ]

- 건국 40년. 난이도: C

.

.

.

+

임무 창을 척 보고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너무 벅차다. 진짜.’

아무리 망국(亡國)을 바로 세우는 일이 어렵다지만 이리도 고생해야 하나? 여기까지 노력하면서 나라를 재건한들, 정말 그럴 가치가 있을 정도로 왕국이 훌륭했나?

‘간신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좀 그랬지?’

야만족들이 몰아닥치기 직전, 이미 귀족들은 도망치고 없었다. 평소부터 ‘저 사람 참, 나라의 충신이다’라고 여겼던 귀족조차.

아무렴 이게 정상적인 나라의 꼴이겠냐, 이 말씀이다!

“….”

천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 천에 가려져 표정은 안 보였지만, 왠지 몰라도 나를 한대 치고 싶어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간신이여. 혹시나 해서 말하겠습니다만 당신은 귀족입니다. 명문 귀족이지요. 왕국이 멸망한 데에는 당신 책임도 크고, 당신의 가문 잘못도 많습니다.”

“에잉.”

내가 손사래 쳤다.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책임이 크진 않죠. 말씀이 과하십니다요, 천사님. 솔직히 제가 뭐 야만족이랑 내통한 것도 아니고요.”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요직에 꽂아주지 않았습니까.”

“어, 잘 아십니다?”

생전에 내가 저지른 일들을 조사해본 걸까. 역시 저승을 관리하는 천사(혹은 악마)였다.

“하지만 그건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쉬쉬하면서 하던 일인걸요? 저 혼자만 따로 놀면 모양새가 희한해지잖아요. 별로 큰 잘못은 아니죠.”

“아아, 지도층이란 자들이 다 이러니까 나라가 그 모양으로….”

왠지 여기 계속 있으면 불리해질 거 같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천사를 향해서 내가 다급히 말했다.

“아, 아무튼 다음 임무로 얼른 넘어가죠! 과거에 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게 중요하겠습니까. 미래에 얼마나 공헌하느냐가 중요하죠. 암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심하게 구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라? 말이 조금 미묘하게 다른 거 같은데.

천사는 냉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번 임무는 ‘눈물 젖은 피난길‘입니다. 어제 당신이 변화시킨 과거에서 무려 750년 뒤에 벌어지는 사건이지요.”

샤락.

내 눈앞에 문자들이 떠올랐다.

+

<역사변이점>

[ 눈물 젖은 피난길 ]

일시: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제한시간: 3일

클리어 조건: 은월의 피를 사수하고, 부족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라.

보상 건축: 마을(Lv.1).

입주민: 미정

실패 시: 사망 및 멸망

+

“피난길이라니. 어떤 난리가 벌어져서 피난하는 겁니까?”

“간신이여. 그건 직접 가서 눈으로 보는 편이 빠릅니다.”

단, 하고 천사가 말했다.

“야리소연을 지키는 임무는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당신이 맡을 임무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도끼로 이마를 찍는 것처럼 무력을 행사해서는 쉽게 해결할 수 없겠지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십시오.”

그건 벌써 몇 번이나 천사가 건네준 조언이었다.

곧, 허공에서 글자들이 흩어지고 새로운 문자로 조립되었다.

[ 해당 역사변이점을 개찬하겠습니까? ]

나는 대답했다.

“예.”

[ 실패 시 당신은 사망하고 왕국은 멸망합니다. 그래도 진행하겠습니까? ]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그림자 같은 망령들이 폐허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렴 죽는 게 무서워도 가만히 있으면 저것들처럼 된다는데, 절대로 그러면 안 되지!

“예.”

그 순간이었다.

폐허의 풍경이 바뀌었다.

단숨에, 마치 시간이 역으로 되감기는 것처럼 주변의 유령들은 뒷걸음질을 쳤고, 멀리 펼쳐진 강물은 정반대로 흘렀다. 산야는 가을에서 여름, 봄, 겨울로 변했다.

[ 역사변이점 ‘눈물 젖은 피난길’을 개찬합니다. ]

그리고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          ◈          ◈

비.

내가 살아오면서 맞아본 그 어떤 빗줄기보다 굵은 비가 내렸다.

하늘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물안개가 짙었다.

물씬, 코끝에서 비 냄새가 풍겼다. 마치 물이 고여서 썩어버린 늪에 빠져버린 것처럼.

나는 비를 피하려다가 멈칫했다.

“어?”

내 사지가 꽁꽁 묶여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공터에 열 명 남짓한 사람이 다 포박되었다. 꼭 재판장에다 범죄자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당황하였다.

‘이,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천사님?’

그때였다. 앞에서 엄한 고함소리가 터졌다.

“네놈들! 너희의 죄를 너희가 알렷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야만족 추장처럼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멀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머리 추장 주변으로는 병사들도 도열해 있었다. 저 사람이 재판장이고 우리가 범죄자들인 걸까.

“너희 간악하고 사악한 혈족이 평소 신들께 기도 올리기를 게을리 하고, 사악한 악마에게 복종하여 저주하기를 일삼았나니! 그 오만방자함에 신들께서도 분노하여 이리 나흘째 비가 내리는 것 아니더냐! 과연 저주받은 월족(月族)답구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주받은 월족?’

[곰 부족의 후예들이 새롭게 받은 이름입니다.]

그제야 천사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야리소연의 자손들이 불리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하. 그런데 왜 저 대머리 자식은 우리가 저주를 받았다고 그럽니까?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그것은….]

천사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내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저희 부족이 뭘 잘못했다고 비가 내린다는 건가요!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에요!”

비에 홀딱 젖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반쯤 찢어진 옷을 입은 채 팔다리가 묶여 있었다. 뭔가에 무척 분노했는지 눈빛이 불타올랐다.

“비는 원래 내릴 때 내리는 것이지,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서 내리는 게 아니에요! 작년에도 비가 내렸고, 재작년에도 비가 내렸으며, 그전에도 계속해서 때마다 내린 비를 가지고, 왜 억울하게 저희 부족을 때려잡으려 하나요!”

그리고 여인의 눈동자는 은색이었다.

‘어. 천사님, 혹시 이 사람이?’

[예. 이번 시대의 은월입니다.]

어허.

나는 다시 천천히 여자를 살펴보았다. 야리소연의 후손일 텐데도 외모가 참 많이 달랐다.

시대가 변한 티가 난다고 할까? 여전히 복장은 야만스러웠으나, 최소한 야리소연처럼 발가벗은 몸에 진흙을 덕지덕지 바르지는 않았다.

‘흠. 세월이 750년쯤 흐르면 야만인들도 좀 나아지긴 나아지는군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외모를 제외하고 야리소연의 불같은 성깔은 고스란히 유전된 듯했다.

온몸이 포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고개를 삐딱 치켜세워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이건 모함이에요! 저희 부족은 성실하게 신들께 기도를 올려요. 악마들에게 복종을 맹세한 적도 없어요. 저희가 악마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무리 비가 오래 내려서 불안하다고 해도 이렇게 다짜고짜 저희를 잡아도 되는 건가요!”

“저, 저, 저 시건방진 것이…?!”

대머리 추장의 면상이 붉으락푸르락 구겨졌다.

“갈 곳도 없는 잡것들을 받아준 게 우리이거늘, 배은망덕한 놈들! 그래서 기어이 네놈들이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겠다 이거냐!”

“흥, 잘못을 해야 뉘우치든 말든 하지요. 저희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제가 아니라 다른 동료들한테 물어도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그러자 꽁꽁 묶인 월족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맞아!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우리만큼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그러라지!”

“우리는 억울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신껏 입장을 밝혔다.

차례는 금세 돌았다.

대머리 추장이 마지막으로 내 쪽을 노려봤다.

“네놈도 똑같이 생각하느냐?”

“….”

음.

나는 가만히 마음속에서 말하였다.

‘천사님. 이거, 척 보니까 저희가 약한 입장이죠?’

[그렇습니다. 알다시피 월족은 고향을 잃었습니다. 새로운 터전을 찾으려고 떠돌아다닌 결과, 이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당연히 예전부터 살아온 원주민들은 따로 있으며….]

‘그 원주민들한테 지금 저희가 구박을 받는 거군요.’

[예.]

대충 알겠다. 원주민은 난민인 우리를 아니꼽게 보고, 난민은 왜 우리한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툭하면 구박하느냐고 따지는 거다.

‘난민인 저희한테는 별로 힘이 없겠습니다요?’

[물론입니다. 사실상 얹혀사는 신세이니까요.]

‘그런데도 자존심 때문에 싸우는 겁니까?’

[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법은 무진장 쉽네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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