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5화 (5/261)

5. 가리비수와 야리소연 (1)

그렇게 머리를 긁던 야리소연이 팔짱을 끼었다.

“뭐, 살아남으려면 살아남을 수 있지. 세상에 그냥 앉아서 죽으라는 법은 없고. 어디 적당한 동굴 찾아 들어가서, 성스러운 산웅(山熊)님께 기도를 바치면서, 이리저리 사냥하며 사는 것. 그거야 할 수 있지. 그러긴 한데….”

“그런데?”

“아이들이 태어나면 힘들어.”

야리소연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야만족답지 않게 진지한 눈빛이었다.

“나 임신하면 네가 사냥을 나갈 거잖아. 너 혼자 돌아다니다가 다치면? 죽으면?”

“….”

“나는 임신해서 꼼짝도 할 수 없고, 아이들은 울어대고. 결국 나도 아이도 다 굶어 죽을걸. 가리비수. 너와 내가 아무리 씩씩한 전사라 해도 우리 둘이서 살아남기는 어려워.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돼.”

놀랍게도 야리소연은 가장 중요한 대목을 짚었다.

자손들.

그렇다. 내가 야리소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야리소연 한 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자손들을 위해서였다. 언젠가 왕조를 이루고 왕국을 건설할 핏줄을 위해서였다.

‘일개 오랑캐가 제법 정확하게 진단을….’

[사람은 어디서나 아이를 낳아 기르지요.]

천사가 조용히 말했다. 마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듯한 어조로.

[자모신께서 이르시기를, 나 그대를 바라보나니. 어미가 되어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라. 부모는 아이를 걱정하고 그리 걱정하면서 현실을 직시합니다. 여기에는 왕국민과 야만인이 따로 없습니다.]

그건 아직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다만, 얼마든지 인정할 부분도 있었다.

야리소연이 자손을 낳아야 한다는 것. 자손들이 안전하게 번성하려면 우리 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함께 살아갈 동료들, 즉 마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

“좋다. 이렇게 하마.”

나는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마을을 구하러 갈 수는 없다.”

“하? 그럼 어쩌려고. 사람들 다 죽을 때까지 지켜볼 거야?”

“생각 짧은 오랑캐 같으니. 나는 지금 당장 구하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원래 이럴 때일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이야.”

야리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가? 어디를?”

내가 씩 웃었다.

“빈집은 털어줘야 제 맛이지.”

◈          ◈          ◈

틱, 틱.

타오르는 불길을 내려다보며 야리소연이 중얼거렸다.

“나 정말 이래도 되려나 몰라….”

“상관없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랑이 부족의 마을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대로 돌려줄 뿐이야.”

내 예상대로 마을에는 파수꾼이 변변찮았다. 이웃 동네를 기습하느라 전사들이 싹 다 빠진 것이었다. 몇몇 노인이 남아 있었지만, 혈기왕성한 우리 두 명을 막아 세우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호랑이 부족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식량들, 힘들게 지어놓은 움막들, 그것들이 모조리 불탔다. 아마 이번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려면 꼬박 반년이 걸리겠지.

[…왕국에서 야만족들을 다루는 기본 전략이군요.]

‘어. 천사님도 잘 알고 계시네요?’

소위 빈집털이라 부르는 전략이었다.

야만족들은 공격할 때는 무시무시하나 방어할 때는 의외로 허술했다. 야만족이 침공해오면 본대는 산성이나 장성 따위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별동대를 써서 야만족들의 본진을 휘젓는다.

‘왕국이 멸망할 때는 장성이 순식간에 뚫려버려서 쓸모가 없어졌지만요.’

[아니요. 그보다는 왕국을 멸망시킨 야만족은 유목민이기에 그렇습니다.]

‘네?’

[…아니, 됐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논하지요.]

내가 천사와 의미 모를 잡담을 나누는 동안, 옆에서 야리소연은 이상한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뭐가 그리 두려운지 자꾸 하늘을 향해 싹싹 비는 것이었다.

“으으. 불의 신이시여, 제 짓거리를 용서해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얘네가 먼저 약속을 깨트렸나이다. 저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이 오랑캐가 돌았나.”

이상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주제에 왜 불은 저렇게 벌벌 떤담.

그러자 야리소연이 길길이 날뛰었다.

“넌 무섭지도 않아, 가리비수? 사람이 불에 타 죽으면 영혼까지 없어진다고! 불의 신께서는 모든 것을 태워버려! 영혼조차!”

“이단이로군. 세상에 불의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야리소연은 더더욱 공포에 질렸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아예 땅에 엎어져서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아니겠는가.

“죄, 죄송하나이다! 불의 신이시여! 죄송하나이다! 방금 그건 가리비수 혼자 말한 거예요! 다음에 사냥감을 잡으면 반드시 제단에 바치겠사오니, 용서해주세요! 부디 용서하소서!”

“쯔쯧. 하여간 미개한 이단들이 벌이는 꼬락서니란. 참으로 가소롭구나.”

문득 머릿속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의 여신도 이단입니다. 간신이여.]

“….”

[미개한 이단들이 벌이는 행태란 참으로 가소롭군요.]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제길. 천사가 직접 종교로 논쟁하다니 이건 반칙이었다!

“…어이, 오랑캐. 일어서라.”

내가 엎드린 야리소연의 엉덩이를 툭툭 찼다. 천사한테 뺨 맞고 괜히 야만족한테 화를 푸는 것이지만 무슨 상관일까.

야만족에게는 뭘 해도 괜찮았다. 우리 왕국민이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았다.

[그 왕국을 저 여자가 세우게 됩니다만, 간신이여.]

‘아무튼 지금은 오랑캐잖아요. 그러니 괜찮습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능력만큼은 놀랍기 그지없군요.]

천사와 그러고 있자니 일어선 야리소연이 눈을 부라렸다.

“야. 내 이름은 오랑캐가 아니라 야리소연이거든?”

“어쨌든 가자. 자기들 마을에 불난 걸 알면 호랑이 놈들도 헐레벌떡 돌아올 거다.”

불길에선 자욱한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연기구름은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마침내 드높은 나무들보다 훨씬 더 높이 피어올랐다.

지금쯤이면 호랑이 부족민들도 사태를 파악했으리라.

“어어, 그래서?”

하지만 야리소연은 멀뚱멀뚱 날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혀를 찼다.

“우둔한 것. 생각을 해라, 생각을. 적들이 이쪽 마을에 전사를 돌려보낼 것이니 반대로 너희 마을, 곰 부족의 마을은 어떻게 되겠냐.”

“아.”

야리소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네. 우리 마을을 공격하는 개자식들 숫자가 줄었겠구나!”

“바로 그게 빈집털이의 묘미지.”

아주 단순한 노림수.

그렇지만 잘만 먹히면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다.

‘임무 창.’

+

<역사변이점>

[ 호랑이 부족의 습격 ]

일시: 건국 1,500년 전

난이도: F

제한시간: 2시간

(잔여시간: 1시간 2분).

+

이제 제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숲을 건너 이곳 마을까지 도착하는 데 시간을 제법 쓰고 말았다.

나는 손도끼를 잔뜩 챙기며 말했다.

“자아, 가자. 적이 약해진 순간을 노려서 마을을 구하는 거다.”

“좋았어!”

야리소연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무척이나 선심을 쓰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가리비수. 너 무진장 멍청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똑똑하네. 이번에 마을만 구하고 나면 특별히 나랑 짝짓기해도 좋아.”

무조건 사양하겠다.

◈          ◈          ◈

빈집털이 작전은 깔끔하게 먹혔다.

“부, 불의 신께서 진노하셨다!”

호랑이 부족민들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자기네 본진에 연기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보고 기겁했으리라.

우리는 수풀에 숨어서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스락. 부족민들이 다 지나친 다음에야 우리는 덤불에서 걸어 나왔다.

“이걸로 전부 빠진 건가?”

“아니.”

야리소연이 어깨에 붙은 이파리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전부는 아니고. 아마 대여섯 명쯤은 우리 마을에 남았지 싶어.”

“흐음.”

내가 턱을 끄덕였다.

“네가 두 명. 내가 네 명을 처리하면 딱 맞는군.”

“흥, 건방지긴. 이번엔 내가 네 명을 처리할 테니까 두고 보셔.”

잠시 뒤, 우리는 곰 부족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입구 주변에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전투 도중에 죽어버린 것인가.’

시체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으로 보건대 대부분 곰 부족 전사들이었다.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은 고작해야 한두 명만 죽었다.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는지 일목요연했다.

옆에서 야리소연이 중얼거렸다.

“아버지….”

빠득.

야리소연은 이빨을 갈았다.

마을 입구에 널린 시체 중에서 한 명의 얼굴을 그녀는 만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야리소연의 아비 역시 기습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저놈들이 먼저 약속하자고 말했어. 사냥터를 나누어서, 어느 마을도 다른 한쪽을 침범하거나 방해하지 말자고. 신성한 나무 앞에서 같이 맹세를 나누었는데, 저놈들이 먼저 그러자고 해서 약속했는데…!”

“조용. 목소리가 들리겠다.”

야리소연이 침묵했다. 그러나 눈빛에서 살기가 타올랐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분노가 입 구멍 대신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잘근잘근 이빨로 씹어서 저주를 내뱉었다.

“다 죽여 버리겠어. 절대로 안 잊어. 절대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을 입구를 지나쳐 엉금엉금 기어갔을 뿐.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들은 파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들 포로로 잡은 여자들한테 정신이 팔린 것이었다. 저 멀리서 호랑이 부족민들은 마을 여자들을 희롱하며 낄낄거렸다.

“크흐. 진즉에 이래야 했는데 왜 여태껏 바보처럼 참았는지 몰라.”

“그런데 마을에 불이 난 것 같은데 어쩌지?”

“뭘 어째? 이제부터 여기서 살면 그만이지. 어차피 여기는 이제 우리 마을이야, 우리 마을. 안 그래? 곰탱이 아가씨들.”

“흑, 흐윽….”

여자들이 눈물을 참으며 머리를 수그렸다. 남자들은 더 크게 웃으면서 여자들로 장난을 쳤다.

파렴치한 광경에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씁. 누가 오랑캐들 아니랄까 봐.’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만 노예로 사로잡으려는 생각이겠지요. 여자 중에서도 강한 자는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천사가 담담히 말했다.

[간신이여. 만일 당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야리소연도 똑같은 운명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노예 살이를 하게 되지요.]

‘기억합니다. 왕국의 건국도 수백 년 미루어진다면서요.’

[예.]

대화의 주인공인 야리소연은 옆에서 말없이 살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더더욱 거세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운명이 상당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다려라.”

당장이라도 뛰어갈 것 같은 야리소연을 내가 막았다. 행여나 그녀가 잘못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이쪽에서 신호를 보낼 테니 그때 단숨에 달려들자. 알겠나? 내 명령을 기다려.”

“…응.”

천천히 야리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어렵사리 감정을 다잡은 것 같았다.

‘좋아.’

나는 손도끼를 꽉 쥐었다.

목표는 한창 마을 여자를 희롱하고 있는 어느 호랑이 부족민. 먹음직스럽게 뒤통수를 내놓은 채 껄껄 웃고 있었다.

곧 자신의 웃음이 영영 끊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리라.

“하나, 둘….”

그리고 신호를 보내는 것과 정확히 동시에 손도끼를 날렸다.

“셋.”

파악! 뒤통수가 거하게 박살나면서 호랑이 부족민은 쓰러졌다.

다른 부족민들이 당황하면서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우리는 그들에게 뛰어들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특히 동료들의 시체를 목격한 야리소연이 과격했다.

그녀가 창을 크게 휘둘렀다.

“천벌이다, 개새끼들아아아!”

“어, 어.”

호랑이 부족민이 얼떨결에 맨손을 펼쳤다. 마치 손을 펼치면 공격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물론 덧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촤악! 부족민의 목에 창이 박혔다. 즉사였다.

야리소연은 가볍게 창을 거두며 포효했다.

“대전사 야리만소의 딸, 야리소연이다! 다 덤벼!”

나도 그 곁에서 도끼를 들어 올리며 덩달아 포효했다. 정확히는 저절로 포효가 나왔다.

“우오오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눈발에 핏기가 생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