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라가 망했다.
인생이 망했다.
내 인생만 망하면 다행인데 나라까지 쫄딱 망했다.
“젠장, 빌어먹을, 개 같은, 우라질….”
내가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전부 읊조렸다.
자그마치 20만.
저 눈앞에서 야만족들이 말 그대로 개떼처럼 달려왔다.
‘예전부터 불안불안하더라!’
나라에 망조가 들어버린 게 벌써 반세기.
그동안 야만족들은 산맥 너머에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본성이 들개와 다를 바가 없다고 우리는 쉽게 비웃을 수 있었다.
비웃음으로 허송세월한 대가가 지금 눈앞에 다가오는 20만 대군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덜 비웃을 걸!’
그럼 항복할 때 약간이라도 특혜를 받았을지 모르는데.
여태까지 워낙 대놓고 씹어댄 터라 항복하기도 어려웠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저 야만족 중에 내 혀를 뽑아 버리길 원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남은 방법은 딱 하나.
“전하, 이거 진짜 답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항복해야 합니다!”
바로 국왕이 항복할 때 꼽사리를 껴서 같이 항복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그렇지만 우리 여왕 전하께서는 쓸데없이 지조가 곧으셨다. 전하께서는 칼잡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이제 와서 투항하라니? 진심인가?”
“진심이고말고요.”
“허. 저것들은 들개와 다를 바 없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경들이 조언하지 않았던가? 개새끼가 짖는다 하여 어찌 사람이 끼니를 거르겠느냐며 떠벌리지 않았는가.”
그랬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것들이 들개가 아니라 엄청나게 똑똑한 사냥개였다는 거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국가라는 것이, 뭉치고 흩어지기를 거듭할수록 약해져야 정상이건만, 도리어 야만족들은 뭉치고 흩어지며 더욱 강해졌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나?
“경들은 장담하였다.”
여왕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저들에게 의리가 없으니 이간질로 쉬이 분열할 것이라. 그러니 전쟁이 벌어질 일조차 없다고.”
정작 분열을 시켰더니 제일 독한 것들끼리 살아남아 뭉쳤다.
“경들은 또한 말하였다. 저들에게 도덕이 없으니 재물로 쉬이 매수할 것이라. 그러니 전쟁이 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게 없다고.”
막상 까보니 야만족 무리한테 군자금을 건네어 준 꼴이었다.
“경들은 또한 말하였다. 설령 전쟁이 벌어져도 저들에게 공성할 무기가 없으니, 산성과 장성을 요충으로 삼아 방비하면 쉬이 격퇴할 것이라.”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니까, 적들은 산성을 간단히 우회해버렸다.
그리고 장성을 지키는 수문장은….
‘배신자 새끼! 사지를 잘라서 목매달아도 시원찮은 매국노 새끼!’
어이없게도 적군한테 붙었다.
한마디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것이었다.
나와 똑같은 감상을 느끼신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꼬.”
전하께서 중얼거리셨다.
“선조들께서 어렵게 이룩하시고, 또 어렵게 가꾸신 사직이거늘. 하필이면 과인의 대에 이르러 끊기는가…. 경들을 탓할 것도 없느니라. 아니, 이제는 경들이라 말할 수도 없겠구나.”
일국의 군주가 입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허탈한 목소리였다.
“마지막까지 과인과 더불어 남아준 신하는 그대밖에 없다. 그 점만큼은 고맙다고 여겨야겠다.”
“….”
어, 뭔가 좋게 말씀해주셨지만.
솔직히 좀 찔렸다. 내가 뭐 충성심이 대단하여서 마지막 저항군에 잔류한 게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도망을 치려고 했는데, 재물을 조금 더 챙겨서 떠나려다 그만 도망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즉, 나는 간신이었다.
‘조금만 더 욕심을 적게 부릴 것을.’
깊이 한탄했다.
내 탄식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모르겠지만, 여왕 전하께서는 도리어 감탄하셨다.
“경은 대국의 능신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망국의 충신은 되겠도다. 과인이 그대의 충심이 이토록 간절한 줄 지금까지 미처 몰랐다.”
“아니. 전하. 섭섭하옵니다. 소인만한 충신이 어디 있다고 그리 말씀하시는지요?”
“미안하구나. 그저 가문을 잘 타고나서 인맥으로 출세한 간신이요, 권신의 말단이라 여겼니라.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돈밖에 모르는 소인배라 생각했다.”
“….”
아니, 이 전하가.
아무리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아예 대놓고 막말을 하시네. 전대 국왕의 사생아 출신답게 경우가 참 없었다.
나 같은 귀족이 할 말은 아니지만, 왕국이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눈앞의 전하한테도 잘못이 많았다.
“정말로 투항하실 의사가 전혀 없사옵니까?”
“없다.”
전하께서는 단호하셨다.
“세상에 영원할 사직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처음부터 야만하지 않았던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야만족이라 부르는 저들도 우리와 핏줄이 같다. 시조께서도 산맥 너머에서 건너 오셨다고 전해지지 않던가?”
“….”
“그러니 오늘 우리가 망하고 저들이 융성하는 것은, 우리가 고귀하며 저들이 야만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약하고 저들이 강해서다. 우리가 모자라고 저들이 풍족해서다. 천명(天命)이 바뀐 것이다.”
맙소사!
군주라는 분께서 이렇게 철없는 말이나 입에 달고 사시니 나라가 망하지.
저,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말까지 다른 잡것들이 어떻게 우리와 핏줄이 같은가. 저것들은 우리랑 아예 달랐다! 먹는 것에서 시작해서 입는 것까지 죄다 구질구질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저들이 일어나서 생각하는 게 ‘남의 재물을 어떻게 노략질할까?’이고, 자면서 생각하는 게 ‘남의 가족을 어떻게 탐할까?’인데, 아무리 누란의 위기에 닥쳤다고 한들 우리가 저들과 똑같겠습니까요.”
“과연.”
전하께서 이죽거리셨다.
“경의 말이 옳다. 우리는 아주 고귀한 족속이로다. 아주 고귀한 족속이어서 누란의 위기가 닥치자 귀족들이 다 도망침이라. 과인이 그것을 몰라보고 실언을 하였구나.”
“….”
여기엔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당장 나만 해도 도망칠 수만 있으면 제발 도망치고 싶은걸.
“인정하게, 경. 우리가 못해서 진 것이다.”
아니다.
“우리가 못해서 멸망에 이른 것이다.”
그건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멍청한 게 아니라 단지 방심했다. 우리가 모자란 게 아니라 저들이 악독하고 사악했다. 우리는 상식이 있는데 저들이 몰상식했다.
우리한테 다소 탐욕스러운 면은 있었다. 인정한다.
하지만 나름 이 나라 잘 되라고 노력하느라 그랬던 것 아니던가?
우리가 여왕 전하께 충성을 좀 덜 바치긴 했어도, 그건 전하께서 워낙에 부족하신 분이어서 그렇지, 우리가 불민하고 불성실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온다.”
시선을 돌렸다.
“많구나.”
전하의 말마따나 적군은 너무나 많았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야만족들을 보자 실감이 났다.
정말로 이 나라가 망하겠구나.
“성벽이라도 있었더라면….”
“시조께서는 일부러 왕도에 성벽을 짓지 아니하셨다. 적군이 수도까지 쳐들어올 지경이라면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유지 때문이셨지.”
꽤 유명한 일화였다.
수도가 침공을 받을 정도라면 이미 그 나라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신하가 황당해서 여쭈었다.
‘갑자기 적에게 기습을 당하여 왕도에서 수비할 수밖에 없다면 어찌하오리까?’ 하고.
그러자 시조가 아리송하게 대답하였다.
- 걱정 말게. 그때는 이 나라 제일의 충신이 나와서 도와줄 것이오. 신께서 그리 정하셨다오.
‘하.’
충신은 무슨 충신.
귀족이란 귀족들은 죄다 도망쳤다.
그나마 충성스러운 몇몇 장군은 지금 전국 각지에 발이 묶여서 움직이지 못했다.
기껏해야 수백 명의 근위대가 이곳에 있을 뿐.
단순히 중과부적이었다.
“경이라도 항복하게나.”
“아니, 전하. 아까부터 계속 섭섭한 말씀만 하십니다? 소신이 충신이라 자칭하기에는 적이 부끄럽긴 하온데,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발을 뺄 인간은 아닙니다. 이래봬도 개국한 시절부터 쭉 내려온 명문의 말예 아니옵니까.”
어차피 투항해도 저 야만족들이 살려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전하께서 웃으셨다.
“과인이 섭섭하다면 경은 이상하구나.”
“예?”
“충신이 달리 충신이겠는가? 죽을 때 같이 죽는 자가 충신이다.”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 말씀에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문득, 전하께서 비웃거나 이죽거리는 게 아니라 순전히 웃으시는 모습을 이때 처음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웃을 줄 아는 분이었나?’
사생아 출신으로 태어나 문자도 제대로 적을 줄 몰랐던 군주.
핏줄을 뒤지고 또 뒤져서, 시골에 살던 여아를 억지로 데려다 놓고 즉위시켰다.
당연히 궁중 예법에도 무지했다.
우리 귀족들이 내심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천민’이라 여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군주한테 충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이것도 선조께서 남기신 유훈일세. 역사를 게을리 공부했군, 경.”
“….”
“자아. 어디 천명이 바뀌는 순간을 맞이해볼까.”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다.
사실, 전쟁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전투’보다는 ‘발악’에 가까웠다.
“왕국을 위해서!”
“여왕 전하를 지켜라!”
수백 명의 근위병은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20만 명의 야만족들에게 압사당했다.
여왕 전하께서도 피를 흘리며 탄식하셨다.
“이곳이 우리 왕국의 공동묘지가 되겠구나.”
공동묘지.
오백 년 가까이 이어졌던 왕국의 영화가 여기까지라니.
그때 저 멀리서, 적군이 활을 겨누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전하!”
나는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짓을 했다.
서둘러 전하께 달려들어서 옥체를 감싼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천한 출신의 군주가 순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동정심이 든 것인가. 근위병들이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는 모습을 보고, 이전에는 없던 충심이 생긴 것인가. 사방에서 피가 낭자하자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서 충동적으로 달려든 것인가.
어느 쪽이 답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퍽!
“…!”
어차피 여기서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내 품에 안긴 전하께서 눈을 크게 뜨셨다. 전하의 눈동자는 은색이었다. 은월(銀月)의 눈동자. 시조의 핏줄이 고스란히 이어졌음을 드러내는 색이었다.
전하께서는 아주 잠깐 놀라셨으나, 곧이어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경. 과인도 금방 따라가겠네. 저승에서 만나세나.”
저승이라.
그런 게 정말로 있을까.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이승에 있는 것은 확실하니, 그 확실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설령 저승이 있다고 해도, 전하와 내가 만나게 될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겠지.
전하께서는 오백 년의 사직을 끊기게 한 죄가 무거울 테고, 나야 뭐… 나니까 말이다.
푹! 퍼퍽!
화살이 연달아 온몸에 박혔다.
그걸로 내 의식은 아득히 멀어졌다.
최후의 순간에 전하께서 뭐라 말씀하셨으나 안타깝게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생각했다.
‘그래도 지옥에서 살기는 싫다.’
마지막까지, 참 나다운 소망이었다.
◈ ◈ ◈
“…일어나십시오.”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저승에 떨어진 것인가?
그렇지만 악마의 속삭임이라기에는 조금 깔끔했다. 굳이 단점을 꼽으라면 약간 기계적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말이 들리고 말았다.
“일어나세요. 왕국의 충신이여.”
충신이라고?
누가?
설마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