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에필로그
시트라가 죽자 다른 신들은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올려다보던 에드는 고개를 숙여 왕도를 바라보았다.
검은 안개는 하늘을 찢는 데 모두 사용되었다고 해도 왕도는 지금 온통 마물과 악마가 판을 치고 있었다. 그 수가 한둘이 아니다.
아니, 수백 수천을 넘어선다.
왕도의 모든 시민들이 죽어 구울이 된 것은 아니지만 구울의 수만 어림잡아도 만 단위가 넘어갔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대신전의 빛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아스트론이 죽으면서 아스트론이 내려줄 신성력이 없으니 신성 보호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에드는 그런 왕도를 한눈에 담았다.
이만큼이나 왕도가 망가졌다면 국왕이라도 천도를 생각해야 할 문제. 이 왕도를 정화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아스트론이 죽었으니 아스트론 교단은 더는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할 테니 타 교단에서 힘을 빌려와야 했으니까.
그때 왕궁에서부터 하늘로 푸른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그 빛의 기둥은 주위에 있던 구울들을 모조리 성화로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런 빛의 기둥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에드는 그걸 보면서 그 빛의 기둥이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스트론의 성혈이 쏟아졌던 곳.
그 빛의 기둥이 쏟아진 왕궁을 중심으로 정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구울의 군대가 성화가 되어 잿더미로 변했고, 그 힘이 더해진 빛의 기둥은 더욱 넓게 영역을 넓혔다. 그렇게 자체적으로 힘을 키운 빛의 기둥이 결국 왕도 전역을 뒤덮었다.
아스트론은 없지만, 아스트론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왕도 내에 남아있던 마물과 악마들이 황급히 도망쳤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아스트론의 빛이 영역을 넓히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시작은 느릿했으나 끝에 가서는 날아서도 그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진 대정화의 빛이 마물과 악마는 물론 오염된 대지까지 모조리 정화해주었다.
에드의 어깨 뒤편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야.
에드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목소리를 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기억했다.
아스트론의 목소리.
에드는 그 목소리가 흩어져 하늘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에드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상과 하늘.
그 중간에 자신이 서 있었다.
신을 죽였음에도 신벌을 받지 않았고, 대악마를 죽였음에도 축복을 받지 못한 인간.
에드는 자신을 도와주는 고대 정령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아린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에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드는 그런 아린의 앞에 내려와서는 살며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스트론이 죽었을 때 그녀가 잘못될까 얼마나 걱정했던가?
그녀가 무사하니 그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디에고는 브란트를 부축한 채 대신전으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브란트는 대신전에서 달려오는 엠마를 보고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빠! 아빠!”
눈물을 쏟는 엠마의 머리를 쓰다 듬어주며 브란트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가졌던 그 강대한 힘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굴레를 온전히 벗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브란트는 엠마를 품에 안은 채 디에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디에고도 그런 브란트에게 다가가 품에 폭하고 안겼다.
브란트는 그 둘을 껴안은 채 아린을 부축한 채 오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페스톨레스가 몸을 차지했지만, 그가 보던 것은 브란트도 보았었다. 그랬기에 에드가 어떤 결정을 내렸고, 자신에게 자유를 준 것인지 잘 알았다.
“고맙다.”
“그런 말씀 마세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에드는 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이 만렙을 찍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브란트를 만날 때는 이미 만렙을 찍은 후였다.
그러니 굳이 페스톨레스를 죽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영혼이 빠져나갈 때라도 죽이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리라.
그건 오직 에드만 알고 있는 일이리라.
에드는 그곳에 모인 이들을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악마와 연관되어 악마들을 죽이고, 그 끝에 이렇게 만나게 된 이들이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이끈 운명의 길이 이렇게 교차했고,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유례 없는 역사의 한 줄기에 자신도 함께하고 있음이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미소를 짓던 에드는 순간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휘청이는 그를 아린이 붙잡으며 소리쳤다.
“에드!”
주변에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이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천천히 눈을 뜬 석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했다.
석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자신을 악마의 시대 2에 던졌던 여인.
“시시하진 않았죠?”
석호는 빙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 잔의 샴페인을 여인을 향해 뿌렸다.
촥.
여인은 얼굴에 샴페인이 묻자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호는 이제 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이런 것을 맞아줄 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도 그걸 맞아줬다.
“이거로 분이 조금 풀리셨나요?”
“어떨 것 같아?”
석호가 이를 드러내며 하는 말에 여인은 눈웃음을 짓고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그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석호는 샴페인 잔을 옆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하실래요?”
“뭘 어떻게 해? 돌아가야지.”
현실이 편리하고 좋다고 하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과 가족처럼 아끼는 전우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돌아가야만 했다.
석호의 시선이 여인을 향했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저 목을 따 버릴까에 대해서 온갖 방법을 구상하고 있을 때 여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것만으로 석호의 간격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확실히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만렙이 되었는데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럼 잘 부탁해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눈을 뜬 에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에드? 일어난 거예요?”
에드가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아린이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에드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안자 그녀도 마주 에드를 안았다.
“한 달이나 못 깨어나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에드는 그 말에 이를 뿌득 갈았다.
이 여자가 진짜 죽으려고.
그러나 화를 내기보다는 아린을 달래주는 것이 먼저였다.
에드는 그런 아린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아뇨.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어쩌면 아린은 에드가 어디로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건 아닐까?
에드는 아린을 달래주고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여긴 어디예요?”
“왕도의 대저택이요. 빈집이 많아져서 하나 받았어요. 국왕 전하가 내리셨어요.”
에드는 그 말에 대저택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마당이 딸린 대저택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에드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그럼 성기사는 그만 둔 거예요?”
아스트론이 죽었으니 이제 아스트론 교단도 사라지게 될 터. 그녀가 더는 성기사를 할 수는 없으리라.
에드의 물음에 아린이 손가락을 하나 들여보았다.
“그게···.”
아린의 손끝에 촛불만 한 크기의 신성력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의 빛을 닮은 신성력이.
“어?”
“아스트론께서 부활하신 것 같아요.”
에드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거창하게 죽고, 기적까지 일으키더니 다시 살아났단 말인가?
에드는 아린의 어깨를 감싼 채 말했다.
“그래도 그만둬요.”
“에드도 악마 사냥꾼 그만둘 건가요?”
에드는 그 물음에 씨익 웃었다.
“당분간은요.”
패치가 돼서 만렙이 풀리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굳이 악마를 찾아 잡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때 창문을 통해서 뭔가가 날아와 에드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컥!”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에드는 자신의 품에 머리를 비비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루스.
푸른빛을 뿜어내는 드래곤이 에드의 품에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만렙이 됐는데도 이렇게 충격을 전해주는 것을 보면 이 녀석 너무 빨리 강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안 돼! 이리와!”
아린이 빼앗아간 아루스가 바동거리며 에드에게 돌아오려고 했다.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이쪽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 이렇게 밝게 웃은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에드의 웃음에 아린은 미소 지었고, 아루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와 에드의 품에 안겼다.
에드는 아루스와 함께 아린을 꼭 끌어안았다.
돌아오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