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1대1
서른두 마리의 제리가 왕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사령이여서 벽도 지나갈 수 있었고, 구울이나 악마들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급 악마들은 파악도 하지 못했고, 중급 악마 정도는 눈치를 채도 빠르게 지나쳐서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상급 악마는 그걸 파악하고 쫓아와서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움직임의 차이가 커서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상급 악마까지 피하면서 왕궁을 치달렸던 제리의 분신이었지만, 대악마에게 걸려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분신의 죽음은 큰 타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악마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그쪽으로 더 보내서 확인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확인한 결과 브란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왕궁의 대전. 그곳에 시체들이 쌓여 있었고, 그 시체들의 피로 만든 거대한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브란트는 그 중앙에서 가공할 마력을 흡수 중이었다.
죽은 이들의 피에 깃든 원념까지 흡수하면서 브란트는 붉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분신을 통해서 마주했지만, 그건 더는 브란트가 아니었다.
브란트의 육신을 지닌 대악마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디에고는 왕궁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뜬 디에고가 에드를 돌아보았다.
“형. 국왕 전하와 공주님들의 위치를 파악했어요.”
“다행이네. 브란트는?”
“아저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디에고가 힘겹게 얘기했다.
“이미 아저씨가 아니에요. 그 붉은 눈은 몸 안에 깃든 놈이 깨어난 것 같아요.”
에드는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대악마의 피를 지닌 브란트의 몸에서 그 대악마가 깨어났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다섯이 남은 줄 알았더니 대악마가 하나 더 늘었다.
“브란트가 대악마가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만으로는 그를 되돌릴 수 없어. 그렇다면 우선은 국왕과 공주들을 구하자.”
“그들은 지금 지하에 숨어 있어요. 아무래도 비밀 통로인 것 같은데 그 입구는 찾지 못했어요.”
“상관없어. 그 위치만 정확하면 그 위에서 부수고 들어가도 되니까. 그곳까지 잠입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거지.”
“그건 가능할 것 같아요. 대악마들에게서 떨어져 있어서 상공에서 떨어져 내리면 될 것 같아요.”
확실히 대악마들은 비행형 악마나 마물은 데리고 있지 않았다. 왕궁 상공에서 그곳으로 떨어져 내린다면 구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다만 그렇게 구할 수 있는 인원은 여섯이 한계다. 사령의 안장이 얼마 없으니까.
“가보자. 일단 그들을 구하고 다시 왕궁으로 오자. 대악마와의 결착은 그때 내도록 하자.”
“알겠어요.”
디에고가 닉과 퓨리를 소환하자 그에 올라탄 에드는 노리스와 함께 오른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디에고가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렇게 왕궁 상공으로 날아올라 간 닉과 퓨리 위에서 살펴보니 지금 왕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끌고 왔는지 마물들도 보통 마물이 아닌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하긴 대악마가 숨어 지내지 않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이 하나로 힘을 모은 지금. 마물과 악마들 모두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굴고 있었다.
하긴 저 악마의 소굴은 보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짙은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 상공을 날아서 도달한 곳은 장미 정원이었다.
“저 정원의 지하를 가로지리는 비밀 통로 안에 있어요.”
“인원은?”
“얼마되지 않아요. 그곳까지 물러나는 동안 많이 당한 것 같아요.”
하긴 국왕이 몸을 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겠나?
에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장미 정원에는 마물이 거의 없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리고 빠져나가지 않고, 그곳에 국왕과 공주가 모여 있다고 한다면 못 빠져나간 이유도 있을 터였다.
“노리스. 저거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부수고 내려갈 수 있을까요?”
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가능합니다.”
“그럼 한 번 가보죠.”
기척 자체는 마물이나 악마에게 걸리지 않는다. 검은 안개가 잔뜩 낀 덕분에 저들의 시야도 확보가 어려우니까.
닉과 퓨리가 급강하하던 중에 역소환 되었고, 셋은 기척도 없이 정원 중앙에 내려앉았다. 에드와 디에고는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장비가 있었고. 노리스는 원래 기척 따위 흘리지 않는 이였다.
노리스는 장미 정원의 가시넝쿨 속에 몸을 숨긴 채 바닥에 손을 짚었다. 전에는 진각으로 바닥을 부쉈는데 이번에는 다른 것 같았다.
두웅.
큰 울림이 아니었다. 전과 다르게 가벼운 울림 정도.
그런데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닥을 통해서 내려선 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옷은 찢어지고 더러워진 채 그곳에 모여 있는 이들.
무기를 꺼내 든 것은 왕궁의 친위대장 올리버와 국왕의 수호기사 로건. 그리고 달리아 왕국 사절단의 외교 사절을 맡았던 크루즈였다.
그들의 뒤쪽으로는 레이든 국왕과 에밀리아, 에스터가 있었다.
고작 여섯 명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험난한 고비를 넘겨서 이곳까지 물러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에드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에드는 그런 그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다행히 무사하셨군요.”
레이든 국왕은 잠시 구멍이 뚫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대체 우리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안 건가?”
에드는 디에고의 등을 두드려주며 답했다.
“디에고가 수고해 줬습니다.”
“허허. 자네들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리도 대단한 줄은 몰랐군.”
사실 에드는 이곳 천장을 부수면서 생각보다 깊다는 것에 놀랐다. 깊이가 대략 7미터가 넘어 보이는 곳을 작은 울림만 나게 하면서 뚫어낸 것을 보면 노리스가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쌍룡사의 무공을 배운 노리스가 단시간에 강해진 것은 아무래도 홍련왕 카루아리스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다가 말했다.
“왕궁을 탈출하겠습니다.”
대악마들의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곳에 멈춰 있던 이유가 있습니까?”
“비밀 통로 안으로도 추격이 계속되었네. 그래서 통로를 무너트리고 왔지.”
통로를 막기 위해 무너트리면서 왔다면 이곳에 갇혔던 것. 어쩐지 이들의 표정에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혹시 따로 챙기셔야 할 것이 있습니까?”
“없네.”
“그럼 바로 빠져나가도록 하죠.”
닉과 퓨리를 소환해서 올라가는 것은 무리니 일단 장미 정원까지는 올라가야만 했다.
노리스가 레이든 국왕과 친위대장 올리버를 옆구리에 끼고 로건을 등에 업은 채로 솟구쳤다. 저 거구들을 데리고 사뿐히 벽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모습은 과연 주인공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는 에밀리아와 에스터를 옆구리에 끼고 크루즈를 등에 업고 솟구쳤다. 노리스가 했던 것처럼 벽을 밟고 솟구친 에드는 삽시간에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톰을 타고 벽을 박차고 나온 디에고가 닉과 퓨리를 소환했다.
더 많은 인원이 남아있었다면 아마도 이곳을 벗어날 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터였지만, 남아있는 인원이 고작 여섯이라 닉과 퓨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를 태우고 나자 닉과 퓨리가 힘찬 날갯짓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공으로 떠오른 닉과 퓨리가 대신전을 향해 출발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왕궁의 대전에서 솟구친 단 하나의 존재. 가공할 격을 뿌리면서 날아오는 자는 닉과 퓨리가 따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존재를 보고 에드는 한숨과 함께 닉에서 솟구치며 말했다.
“일단 대신전으로 피해.”
“형!”
“안 잡아. 싸우다 몸을 뺄 거야.”
디에고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고는 그대로 닉과 퓨리의 조종에 집중했다. 에드가 대악마를 잡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몸을 빼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빨리 갔다 와야 에드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디에고가 닉과 퓨리와 함께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에드는 칠채 비도를 허공에 던졌다. 언제든 회수가 가능한 칠채비도를 이기어시로 조종하면서 그 위에 타는 것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에드가 그렇게 허공에 떠 있자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존재는 그대로 에드를 지나치려 했다. 에드는 그렇게 상대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에드가 날린 화살이 지나가려던 대악마를 향해 날아갔다. 아무리 이동이 빠르다고 해도 날아가는 화살을 따돌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귀찮다는 듯 날개를 휘둘러 화살을 쳐내려고 하기에 화살의 방향을 틀어 날개에 꽂은 후에 쇄폭시로 터트렸다.
콰콰쾅!
세 발의 화살이 날개 하나를 찢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돌아선 자의 붉은 안광이 섬뜩하게 에드를 쏘아보았다.
“네놈. 악마 사냥꾼이구나.”
“벌써 알려진 건가?”
“크흐흐. 그럼 아주 잘 알려져 있었지. 네 덕분에 이 대혼란이 벌어진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악마들의 죽음에는 대부분 에드가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래를 내다본 예언자들은 대혼란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대혼란은 하늘이 찢길 거라는 예언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고, 대악마들의 승리로 귀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변수가 된 에드였기에 그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도 콧방귀만 끼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난 줄 알았으면 여기가 네 무덤이라는 것도 알겠네.”
대악마와 일대일 대결.
디에고에게는 몸을 빼낼 거라고 했지만, 대악마의 수를 줄일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새로 얻은 장비의 위력도 확인해 볼 겸 붙어 보기로 했다.
못 이길 것 같으면 그때 몸을 빼내면 될 일이니까.
에드는 디에고와 반대 방향으로 칠채비도를 이동시키면서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줄지어 날아드는 화살을 모조리 피해낸 대악마가 빠르게 거리를 좁혀와서는 발톱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만난 것들과는 그 속도감이 다른 존재였다. 게다가 본체로 변한 것도 아니고, 인간형인 상태로 날개와 꼬리, 손톱만을 길게 자라게 만든 상태.
하지만 대악마답게 빨랐다. 칠채비도를 이기어시를 이용해 허공을 달리면서 상대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빠른 자였다.
그렇게 거리를 좁힌 대악마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다른 대악마에 비해 공격력은 부족해도 속도만은 압도했던 자신은 대악마 조차 죽였다는 에드보다 빨랐다.
인간을 상대하는 데는 굳이 압도적인 강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빠르고, 그 목줄을 끊을 정도의 날카로움만 있으면 된다.
대악마의 손톱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 에드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대악마의 비행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기에 피하기 어려웠을 뿐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민첩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싸우게 된다면 못 피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젖혀서 날아든 공격을 피한 에드는 발밑의 칠채비도를 차 날렸다. 대악마는 과연 그 공격을 피해냈다. 에드도 그 칠채비도가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차내면서 반동으로 밑으로 떨어져 내리던 에드를 향해서 쫓아오던 대악마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래서 투명화의 권능이 걸린 칠채비도에 머리가 꿰뚫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뒤늦게 피한 탓에 날개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두 개의 날개를 모두 잃은 대악마도 바닥에 내려섰다. 마주 선 자리에서 에드는 활의 시위를 당기며 소리쳤다.
“아스트론이여! 당신께 영광을!”
창피함은 에드의 몫이나 그 대가는 달콤했다. 다섯 발의 신성 화살이 시위에 걸리는 순간 대악마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둘의 사이의 거리가 삽시간에 사라졌고, 에드는 시위를 놓았다.
다섯 발의 화살이 날아드는 순간 대악마의 눈이 붉게 빛나며 사라졌다. 대악마를 지나친 빛의 화살이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대악마가 코앞에 나타나더니 씨익 웃었다.
“죽어.”
간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에드가 피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뜻.
에드는 심장이 콱 옥죄어지는 것 같았다.
설마 언령 공격인가?
듣는 것만으로 죽을 수도 있는?
에드는 날려 보낸 화살을 되돌려 대악마를 노렸다. 죽어도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그때 에드가 입고 있는 붉은 가죽옷이 빛을 발했다.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순간 심장을 옥죄던 힘이 사라졌다.
“무슨?”
대악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와 목, 심장과 배에 다섯 발의 신성 화살이 박혔으니까. 에드는 대답 대신 그대로 쇄폭시를 사용했다.
콰앙!
핵이 어디 있는지 몰라도 본체를 드러내기 전에 쇄폭시를 터트린 덕분일까?
경험치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