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왕궁 침투
저 멀리 왕도가 보였을 때 에드는 인상을 딱닥하게 굳혔다.
“제길.”
왕도에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거대한 왕도 전체가 검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마리포사가 그걸 보고는 중얼거렸다.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저대로 두면 왕도가 사라질 거야.]
“사라져?”
저 거대한 왕도가?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다. 대악마가 신들을 뛰어넘었던 적이. 그때에는 도시 하나를 가라앉혔지.]
“지진이라도 낸 건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지하로 가라앉히는 것은 어지간한 지진으로는 어림도 없다. 근처에 화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 불가능을 현실로 만드는 자들이 이곳에는 넘쳐났다.
대악마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대악마가 다섯.
게다가 대악마들의 계파까지 생각한다면 지금 왕도에 몰려왔을 아마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십은 될 터.
그들이 벌일 수 있는 이적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닉과 퓨리를 조종하던 디에고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원혼들이 벌써 저렇게 많다니.”
나침반으로 파악하고 바로 연락을 취했을 때만 해도 대악마들이 활동하지 않았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이렇게 눈에 띄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허공을 날아서 그대로 돌파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퉁!
검은 안개라고 생각했던 것이 일종의 경계인지 그 안으로 진입이 어려웠다.
에드가 인상을 굳히고 있을 때 이제는 비행에 익숙해져 머리 위에서 돌던 아루스가 날아와서 검은 안개에 부딪쳤다.
투확!
신성 드래곤인 아루스가 부딪치자 검은 안개가 옆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루스가 다시 떠올라서는 가만히 검은 안개를 바라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루스의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입을 벌리자 그 입 앞으로 푸른 빛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은 걸릴 거라 여겼던 시간을 디에고는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내면서 30시간 만에 주파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지금 아루스가 만들어낸 구슬은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푸르렀다.
캬앙!
어딘가 귀여운 소리와 함께 구슬이 검은 안개를 향해 날아갔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 날아가는 모습은 뭔가 힘이 없어 보였다.
왕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검은 안개를 생각하면 그 구슬은 너무나 조악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투콰콰콰콰!
검은 안개가 찢기고, 흩어진다. 직경 30미터짜리 거대한 터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디에고!”
디에고는 그 부름에 닉과 퓨리를 조종해 그 터널을 향해 날아 들어갔다. 에드는 브레스 한 번에 지쳤는지 푸쉬쉬 바람이 빠진 풍선 같은 아루스를 품에 안았다.
검은 안개를 뚫고 들어가는 닉에 올라타지 않고 에드는 칠채비도를 날려 그 위에 올라탔다.
지친 디에고가 이 터널을 통과하는데 아루스를 태운 닉을 조종하는 건 무리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라면 칠채비도를 탄 채로 허공을 달리는 것이 더 빠르다. 그렇게 검은 안개의 터널을 통과한 에드는 고요한 왕도를 내려다보았다.
에드는 칠채비도를 교환하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대신전으로 가자!”
대신전은 아무리 대악마들이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다. 이 검은 안개 덕분에 신의 힘이 닿지 않는다고 해도 먼저 노리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다.
에드의 뒤로 디에고가 조종하는 닉과 퓨리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에드는 칠채비도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신전 위로 날아가다가 신전을 공격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족히 수백 명이 넘어가는 이들이 눈이 뒤집힌 채 신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울이 된 것 같았다.
수백 명의 구울은 대신전을 감싸고 있는 푸른 보호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대신전 안쪽에서 뿜어져 나와 신전을 감싸는 거대한 결계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걸 구울들이 부수려고 하고 있었다.
구울들의 공격은 자살 특공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조금씩 착실하게 대신전의 결계를 부수고 있었다.
그때 닉을 밟고 뛰어오른 아린이 구울들의 한 복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푸른 신성력이 그녀의 등 뒤로 날개처럼 펼쳐졌고, 그 빛을 품은 채로 떨어진 그녀가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푸른 신성력의 파장이 원형으로 퍼졌다.
쿠웅!
그것은 뭔가 특별한 기술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신성력을 뿜어내는 기술.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근방의 구울들이 성화에 불타오르며 괴로워했고, 몸부림 치던 구울이 다른 구울에게 성화를 옮겨 붙였다. 수백에 달하던 이들이 오직 그 한 번의 충격파에 쓸려나가는 중이었다.
에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대인전이라면 에드가 아린보다 더 강하겠지만, 이런 잔챙이들을 휩쓰는 데는 아린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의 등 뒤로는 휘황찬란한 성화의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에 근처에 있던 악마들이 도망가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는 그걸 느끼고 곧장 화살을 날렸다.
퍼퍼퍽!
중급 악마 셋의 머리를 뚫은 화살이 다시 돌아왔다. 화살을 받아든 에드는 신전 앞에 닉과 퓨리를 내린 채 역소환한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이만한 신성 결계를 디에고가 지나갈 수 있을까?
에드의 걱정을 읽은 것인지 아론이 다가와 디에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들어갈 수 있어요. 당신이라면.”
디에고는 그 말에 자신의 앞에 놓인 반투명한 푸른 신성력의 보호막을 바라보았다. 반인반마. 악마의 피를 반이나 받은 디에고에게 신성력은 언제나 거부감을 느끼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가도 될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신전 안쪽에서 수사들을 제치고 달려나오는 이가 있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달려오는 엠마를 본 순간 디에고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이 보호막이 자신을 막을 거라는 생각도 잊은 채 엠마를 향해 달려갔다.
디에고가 보호막을 그대로 가로질러 달려가 엠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론이 미소를 지었다.
“디에고는 이미 그 원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스트론의 신성력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아론은 디에고에게 수면 주문을 걸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디에고가 더는 신성력에 저항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품고 있는 악마의 피는 상급 악마의 피지만, 그 피를 용서받았다. 덕분에 더는 신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디에고가 엠마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일행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는 엠마가 달려온 곳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브란트는?”
그 질문에 디에고의 품에 안겨있던 엠마가 흐느꼈다.
“아빠가, 아빠가 잡혀갔어요.”
에드는 그 대답에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오직 검은 안개가 신성 보호막 밖을 감싸고 있었다. 컴컴한 하늘을 보면서 에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봉인했다고 해도 대악마의 피다.
그런 그를 일행에서 떨어트려 놓은 것은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지만, 그 결정 덕분에 브란트는 잡혀 갔다. 그리고 엠마는 이곳에서 울고 있었다.
디에고가 그런 엠마를 어쩌지 못하고 바라볼 때 에드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둘을 살며시 안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아저씨.”
에드는 눈물범벅인 엠마의 머리를 만져주며 답했다.
“최선을 다해볼게.”
에드도 확답해줄 수는 없었다. 대악마의 피를 가진 브란트를 무사히 구출해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이곳에 대악마 다섯과 상급 악마와 중급 악마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일행 또한 만만치 않은 전력이다. 에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입고 있는 붉은 색 가죽옷도 홍련왕 카루아리스가 입던 옷이다. 이게 대악마의 공격을 막아만 줄 수 있다면 대악마는 혼자서도 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일행을 둘로 나눈다면 두 마리의 대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
일행만으로도 세 마리의 대악마를 상대할 수도 있으리라.
대신전 안쪽에서 나온 것은 베네딕토 대주교였다. 헬쑥한 표정을 보니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긴 대신전의 신성 보호막을 펼치려 했다면 그걸 주관하는 이가 필요했을 터.
그래도 이 안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보다.
베네딕토가 다가오다가 비틀거리자 아린과 아론이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둘이서 그를 부축하자 베네딕토가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왔구나.”
“늦어서 죄송해요.”
베네딕토는 아린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네 연락을 받고 급하게 준비했기에 그나마 피해를 이 정도로 줄일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빨라도 내일이나 되어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리 빨리 온 거냐?”
마리포사의 도움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음을 알렸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디에고가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디에고가 힘써 준 덕분이에요.”
베네딕토는 엠마의 어깨를 안아주고 있는 디에고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았구나.”
디에고는 앞에 선 이가 대신전을 책임지는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주교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공을 치하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해야 했을 일입니다.”
베네딕토는 미소를 지은 채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악마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파악은 할 수 없었네. 수사들을 보내는 족족 다 죽여버리고 있으니.”
“어디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됩니까?”
“왕궁에 있는 것으로 보이네.”
왕궁이라는 말에 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왕궁에는 국왕이 있는 것도 있지만, 에밀리아와 에스터 공주도 있다.
전쟁을 끝내러 온 에스터 공주가 트라비아 왕국에서 죽는다?
그럼 전쟁이 다시 일어날 거고 그 악업은 대악마들의 좋은 자양분이 될 거다.
그 꼴을 봐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이들이 높은 경험치를 주는 것처럼 대악마들에게도 높은 악업을 쌓아줄 테니까.
그러니 그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
에드의 시선이 일행을 향했다. 공주들을 구해야 한다면 침투가 필요했다.
전면전이 아니라 그들을 구해서 빠져나올 인원이 필요했다. 전면전은 디에고도 회복하고 모두가 함께할 일이다. 그리고 펜드래건의 도착도 기다려야 했다.
“모두 이곳에서 대신전을 지켜줘요. 저와 노리스가 왕궁에 가보겠습니다. 대악마가 그곳에 있다면 브란트와 공주들이 있을 테니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쉽지 않을 걸세. 그 근처에는 구울의 군대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악마들이 진을 치고 있네. 아마 다가가는 것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을 걸세. 그곳을 뚫고 들어가 둘을 구해온다? 아무리 자네의 실력이 뛰어나도 무리일세.”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무리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해내야만 하는 일이죠.”
에드의 말을 들은 디에고는 엠마를 돌아보았다. 브란트의 이름이 나오고부터 굳어있는 그녀를 보고 디에고도 결심을 굳혔다.
“저도 가요.”
“넌 좀 쉬어라. 지금도 충분히 한계야.”
디에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령술로 보조할게요. 전투는 무리지만, 찾는 거라면 제리가 있는 제가 도움될 거예요.”
에드도 그걸 몰라서 디에고를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디에고가 얼마나 무리했는지 알기에 했던 말이다.
하지만 디에고의 눈빛을 보니 두고 가면 혼자서라도 갈 기세다.
“좋아. 그럼 부탁한다.”
디에고는 허락이 떨어지자 엠마를 돌아보았다.
“내가. 내가 꼭 구해올게.”
“미안해. 하지만 부탁할게.”
트라비아 왕궁.
처음 오는 곳도 아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왕궁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병사들 대신 그곳에는 수를 헤아리기 힘든 구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악마를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안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에드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들키지 않고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금의 에드로서도 무리였다.
에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디에고를 향했다.
“부탁할게. 디에고.”
디에고는 그 말에 제리를 소환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새로운 기술을 익혔어요. 도움이 될 거예요.”
디에고가 마력을 일으키자 제리의 몸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 그렇게 서른두 마리까지 수를 불린 디에고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시작하죠.”
서른두 마리의 제리가 동시에 왕궁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