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왕도로
카루아리스는 인사도 없이 떠났다.
이걸 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긴 드래곤이니 인간의 정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는 노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노리스는 그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대체 무슨 가르침을 받았기에 이렇게 초췌해졌나 싶지만, 확실히 뭔가 달라져 보이기는 했다. 눈빛 자체가 달라졌다.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게 된 것.
신체 능력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뭔가 사람이 깊어졌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에드는 등에 업힌 아루스가 아동바동 올라오려는 것에 한숨이 푹 나왔다. 이 녀석 크기는 어른 상체만한 녀석이 무게가 굉장해서 이렇게 치댈 때는 굉장히 버겁다.
에드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일반인은 이렇게 치대면 허리가 부러질 정도라는 얘기니까.
어쩐지 들이받을 때 헉 소리가 절로 나오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녀석 크기는 요만한 녀석이 무게는 거의 코끼리 수준이다.
에드는 아루스를 앞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말했다.
“나침반에 표시가 됩니까?”
“되기는 하는데 다시 돌아가야 할 방향이에요.”
“돌아간다고요?”
“예. 방향만 보면 왕도 쪽이기는 해요.”
에드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대악마들이라고 해도 왕도에서 수작을 부릴 수는 없다.
왕도에는 대신전도 있고, 무엇보다 상주 병력 자체가 남다르다. 아무리 대악마라고 해도 감히 왕도에서는 수작을 부릴 수 없다. 특히나 펜드래건이 지키고 있던 왕도는.
“아!”
그제야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펜드래건이 왕도를 비웠다.
이걸 노린 걸까? 아니면 펜드래건이 있어도 왕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얘긴 건가?
“남은 대악마가 다섯.”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펜드래건이 왕도를 지키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무너트릴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왕도를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왕도만큼 사람이 많은 곳도 없다.
그곳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대악마들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그 많은 인간이 겪을 공포, 그들의 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상상 불가다.
정말로 하늘이라도 찢을 수 있으리라.
“형. 정말 왕도가 위험해요?”
디에고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디에고는 왕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엠마를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그 생각을 읽은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곳에는 대악마의 피를 가지고 있는 브란트가 있었다. 그 힘을 봉인하고 있다고 해도 대악마들이 그걸 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에드의 시선이 아린을 향했다.
“아린. 교단을 통해서 브란트에게 연락해야 해요. 일단 대신전에 가 있으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펜드래건 쪽으로도 연락이 닿으면 좋고요.”
“일단 연락해 볼게요. 펜드래건이 가는 방향으로도 신전마다 연락을 돌려놓으면 연락이 닿을 거예요.”
에드는 그 말을 듣고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디에고. 마리포사 덕분에 낮에도 이동할 수는 있어. 밤낮으로 날아간다면 며칠 안에 왕도로 돌아갈 수 있어. 할 수 있겠어?”
디에고의 마력 회복력이라면 버틸 수는 있다. 버틸 수만.
며칠 동안 닉과 퓨리를 조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적어도 이틀은 잠도 못 자고 날아가야 할 판이다.
“할 수 있어요. 하게 해주세요.”
사실 대악마 둘과 싸워보니 이정도 인원이면 대악마 둘이라도 때려잡을 수 있다. 펜드래건의 팀까지 더한다면 셋까지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벌써 왕도로 대악마가 와 있다면 서둘러야만 했다. 늦기 전에 가서 그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연락되는 대로 바로 이동하자.”
“알겠어요. 그럼 저도 잠깐 쉬고 있을게요.”
아론이 그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연락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수면 마법을 걸어드리죠. 잠깐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싹 풀릴 겁니다.”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디에고는 반이 악마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아론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당신의 절반은 인간이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에드는 아론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디에고에게도 신성 마법을 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디에고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탁드릴게요.”
아론의 수면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모두 수면 마법을 통해 잠을 청했다. 일행 모두가 잠이 들 동안 에드는 그 옆에서 장비를 수선했고, 아루스는 옆에서 뒹굴었다.
아무래도 일행 모두가 잠이 드는 것은 위험했다. 이곳이 아무리 대악마가 사라진 곳이고, 아스트론 교단의 사람들만 있다고 해도.
에드는 화살촉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이 하나하나가 성유물. 성유물을 쇄폭시로 터트리며 싸우는 만큼 대악마 전에서라면 펜드래건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에드가 화살촉을 이리저리 돌려볼 때 아루스가 다가오더니 입을 벌렸다.
“왜?”
얌!
아루스가 화살촉을 입에 넣었다. 너무 당황해서 반응도 못 했다.
콰드득. 콰득.
마치 과자를 먹듯이 오독오독 씹어 먹는 모습을 보니 화도 나지 않았다. 아루스가 화살촉 하나를 다 먹더니 눈을 반짝이는 것이 이놈 위험하다.
아스트론의 신성력에 관련된 것은 쇠도 씹어먹을 것 같았다.
“안 돼!”
에드가 아루스의 목에 팔을 휘감더니 말했다.
“이건 먹는 거 아냐. 알겠어?”
끼이잉.
울상을 짓지만, 안 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악마전에서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으니까. 대악마를 모두 죽이고 난다면야 줘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안 돼.”
확실히 엄하게 말하자 아루스도 더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 눈빛은 전혀 납득한 눈빛이 아니다.
“이래서 애들은 싫은데.”
어쩌다 보모가 된 건지.
에드가 한숨을 내쉴 때 아린이 다가왔다.
“연락은 최대한 취했어요. 펜드래건 님과 가까운 신전에서 연락을 취하기로 했어요.”
“다행이네요. 아론. 언제까지 자면 되는 겁니까?”
“지금 깨워도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깨우죠.”
아론의 손길을 따라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일행을 덮었다. 곧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덱스는 목을 좌우로 움직이더니 눈을 빛냈다.
“와! 이거 대박! 이렇게 가뿐할 수 있나?”
아론은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모두 준비하시죠.”
디에고도 이곳까지 오면서 쌓였던 피로가 풀린 건지 눈빛이 달라졌다.
“가죠.”
마리포사가 일으킨 안개 속에서 디에고가 닉과 퓨리를 소환했다. 에드가 아루스를 안고 닉에 올랐을 때 닉이 휘청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령인데도 무게를 감당 못 하는 건가?
퓨리가 먼저 날아오르자 닉도 무리해서 날아올랐다. 어째 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것을 보니 확실히 아루스의 무게가 무리였나 보다.
그때 아루스가 닉과 퓨리를 바라보다가 작은 날개를 파닥였다.
고작 손바닥만 한 날개로 뜰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무게가 아니기에 말리려고 하는데 아루스는 허공에 떠올랐다.
“허?”
끼이이!
아루스가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나는 모습에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네. 그럼 잘 따라와.”
아루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닉과 퓨리가 왕도를 향해서 날았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왕도로.
상급 악마의 목을 대검으로 날려버린 펜드래건이 씨익 웃음을 흘렸다.
“이걸로 세 마리째인가?”
상급 악마만 벌써 셋을 잡았다. 식후 간식거리 수준밖에 안 되지만, 이정도만 해도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건 펜드래건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세실리아도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대악마를 만나기 전에 몸풀기 상대로는 이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주변을 정화하던 마틴은 전장으로 달려온 수사가 전한 소식을 듣고는 표정을 굳힌 채 펜드래건을 불렀다.
“펜드래건. 문제가 생겼어.”
“문제?”
“왕도에 대악마가 나타날 거라고 연락이 왔어.”
“누구한테서?”
“아린에게서.”
펜드래건이 세실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펜드래건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이 미친 것들이 내가 자리를 비우니 왕도로 왔다는 건가?”
펜드래건이 말에 오르며 소리쳤다.
“서둘러. 왕도로 돌아간다.”
왕도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라면 가게에 늘어선 줄을 내려다보면서 한 여인이 지붕 난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때?”
검은 로브를 눌러 쓴 노인이 웃으며 답했다.
“클클클. 봉인해 놓는 바람에 힘이 많이 약해졌지만, 눌려 있었기에 더 쓸 만한 구석이 있어. 이것도 다 운명인 거겠지.”
“운명 타령은.”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다른 녀석들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곧.”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다 모이는 건 처음이네.”
“그만큼 이번이 기회라는 거지.”
대악마들의 회동. 그건 대악마의 빈자리 때문에 벌어진 대혼란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억눌렸던 것들이 깨어나는 탓도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서 지금까지 자신들을 내려다보던 그 버릇없는 놈들을 끌어내려 찢어발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에 집으로 찾아온 이들을 보고 브란트는 인상을 굳혔다. 악마의 피를 몸에 지닌 그에게 있어서 아스트론 교단의 인물들은 반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브란트가 엠마를 막은 채 문 앞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브란트의 반응에 수사들이 뒤로 물러나고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브란트님을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말입니까?”
“왕도의 대신전으로 모시라는 명입니다.”
“누가 내린 명령입니까?”
“베네딕토 대주교께서 내린 명입니다. 왕도에 대악마가 출현할 것이라는 아린 경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아린의 이름이 나오자 브란트도 긴장이 풀렸다.
“대악마가 왕도에 나타났다면 왕도를 벗어나겠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아린 경과 일행이 왕도로 급히 돌아오는 중이니 브란트 경의 안전을 대신전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브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엠마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수사들이 빠르게 움직여서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사이에 브란트는 엠마와 함께 간단히 짐을 챙겼다.
“아빠. 그럼 저희 없는 동안 빈민가 애들은 어떻게 하죠?”
브란트는 손을 내밀어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깐이면 지나갈 일일 거다. 그러니 일단은 무사히 몸을 피하는 것만 생각하자. 우리가 대악마에게 잡혀 인질이 된다면 그것만큼 큰 문제는 없으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대신전에서도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겠니?”
엠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브란트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고는 말했다.
“가자. 수사들이 기다리고 있겠다.”
브란트가 엠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을 때 문밖에는 한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이 마치 공처럼 위로 던졌다가 받는 물건은 조금 전에 그들을 찾아온 수사의 머리였다.
브란트가 엠마를 뒤로 물리며 인상을 굳혔다.
봉인되고 나서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았다고 하지만 찾아온 수사들을 모두 죽이도록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은밀하게 그들을 처리했다는 말이다.
“누구냐?”
여인은 씨익 웃으며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브란트는 인상을 굳혔다.
“그 정도 봉인으로는 내 부름에 저항하지 못할 걸?”
봉인이 풀리는 것을 느낀 브란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대신전으로 뛰어라. 엠마.”
엠마는 지금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그대로 대신전을 향해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이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코앞으로 붉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후웅!
여인은 훌쩍 뒤로 물러나서는 자신의 앞을 막은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봉인을 풀었더니 브란트는 그 힘을 이용해 오히려 자신을 막았다.
“재미있네. 그런데 그 힘이 다 풀려도 네가 그 힘을 다룰 수 있을까?”
여인이 손을 휘두르자 그림자가 날아들어 브란트의 팔목을 감싸고 있던 에슬란의 사슬을 박살 냈다.
브란트는 에슬란의 사슬이 박살 나자 눈이 붉게 물들었다.
“크아아악!”
브란트는 자신의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잘 억눌러 왔던 대악마 페스톨레스의 피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브란트의 육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런 브란트의 눈에 어느새 다가와 손을 내밀어 뺨을 어루만지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페스톨레스. 그만 깨어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브란트의 의식이 수면 저 아래로 가라앉고 대악마 페스톨레스의 의식이 그 위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