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보호자
드래곤.
격은 낮을지 몰라도 그 전투력은 신이나 대악마에 비견된다는 그 강대한 육체는 덩치에 어울리게 가공할 위협을 품고 있었다.
대악마도 때려잡을 수 있지만, 그건 상성의 힘이 크다. 그래서 드래곤과 감히 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쌍룡사의 개파조사라면 싸우게 되면 노리스도 드래곤의 편에 설 것이 뻔했다.
그래서 드래곤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눈동자 크기만 해도 에드만했다. 무지막지한 크기.
눈이 그렇게 크기에 그 안에 담긴 광기가 또렷하게 보였다. 하긴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수천 년을 산다는 드래곤이니 그 정신이 제정신이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다.
에드는 마치 전신 거울에 비쳐 보듯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드래곤 대체 어디 있었기에 이렇게 빨리 나타난 거지?
에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천둥이 치듯 큰 목소리가 들렸다.
[일족의 새로운 아이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에드는 대답 대신 품에 안고 있던 아루스의 옆구리에 손을 넣고 앞으로 내밀었다. 사실 자신도 아루스의 보호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에드가 내민 아루스의 푸른 하늘을 닮은 비늘을 따라 커다란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고개가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루아리스의 전신에서 들끓는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카루아리스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자 모두 그 시선을 따라갔다. 그렇게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린 카루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미친 거냐! 아스트론! 네 종들을 모조리 찢어 죽여줄까?]
카루아리스의 포효에 일어난 충격파에 주변의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지고 사람들이 바람에 휘말린 낙엽들처럼 튕겨 나갔다. 그런데 이 드래곤이 쳐 돌았나?
선 넘으려고 하네?
에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린과 아론이 없다면 아스트론 교단에 별 관심도 없지만, 내 사람이 그곳에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저기요?”
에드의 부름에 카루아리스의 고개가 내려왔다. 드래곤이라는 종이 인간과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날 부른 건가?]
굳이 감히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가 정확히 느껴졌다.
에드는 아루스를 품에 안고 귀를 손으로 덮고는 말했다.
“이 아이는 대악마에게 엄마를 잃었고, 그 원념이 가득한 피를 뒤집어쓴 채로 대악마의 마력에 의해 마룡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드래곤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에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룡이 될 뻔한 아이를 아스트론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 마수에서 구했습니다.”
카루아리스는 에드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도 표정을 읽을 수 있구나, 라고 여길 때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왔다.
[그래서?]
“아루스의 엄마가 죽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인제 와서 화내는 것도 우스운 거 아닙니까?”
에드의 대거리에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덱스와 디에고는 엄지를 추켜세웠지만, 다른 이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카루아리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드래곤이 다른 자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그 상대가 대악마라고 해도 드래곤의 잘못이다. 고작 대악마 따위에게 죽을 정도라면 드래곤으로서 창피한 일이지.]
에드가 그 말에 질려서 아무런 말도 못할 때 카루아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알에다 수작을 부린 것은 대악마를 잡아 찢어 죽일 일이지. 그걸 도와준 것만 했다면 이리 분노할 일도 없고.]
카루아리스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감히 드래곤을 신수로 삼아? 이건 일족에 대한 도전이다!]
에드는 카루아리스가 이렇게 분노한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인간이었다면 왕족에게 노예 낙인을 찍은 거라고나 할까?
당연히 왕족이라면 분노할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아스트론에게 화를 내십시오. 왜 죄 없는 아스트론의 종에게 화풀이하려고 하는 겁니까?”
카루아리스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에드를 바라보았다. 카루아리스의 입이 벌어지자 그의 입에서 불길이 화륵거렸다.
[가만. 인제 보니 신수로 삼아놓고 보호자로는 너를 지정했구나. 약은 년 같으니.]
에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트론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떠났으니까.
그런 에드를 바라보던 카루아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에드는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카루아리스는 에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륵!
순간 브레스를 내뿜는 줄 알았다. 길게 뻗어나온 불길이 무너진 집을 불태웠으니까.
마을 사람들을 소거시켰기에 다행이지 큰일 날뻔했다.
카루아리스의 전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어찌나 높게 치솟는지 카루아리스의 거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카루아리스를 집어삼킨 불길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붉은 눈썹에 대머리 승려가 서 있었다. 번쩍이는 황금색 법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는 휘황찬란한 석장까지 들고 있었다.
“조사님!”
노리스가 감격해 하는 것과 다르게 에드는 인간의 형상을 한 승려를 바라보았다.
책이나 영화에서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하면 미남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건 신장만 2미터 50에 근육이 얼마나 두꺼운지 야만전사가 여리여리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근육질의 사내였다.
인간이 극한으로 단련하면 저리 될까?
아니다. 시작점부터가 다르다. 저만한 신장에 터질듯한 근육.
인간형으로 변했지만, 위험도는 더 올라간 느낌이다.
“홍련왕이라 불리는 카루아리스다.”
카루아리스가 손을 내미기에 에드는 아루스를 옆구리에 끼고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았다. 카루아리스는 다른 수작은 부리지 않았고, 손을 거두고는 팔짱을 꼈다.
카루아리스는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널 보호자로 둔 걸 보니 내가 올 걸 알았군.”
그렇게 투덜거린 카루아리스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노리스에게 손짓했다.
“일어나라. 호법승.”
노리스가 일어나자 카루아리스가 그를 품평했다.
“제대로 단련했군. 역대 너만한 호법승은 손에 꼽힐 정도니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루아리스는 노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에드 앞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에드의 품에 안긴 아루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드래곤은 태어날 때부터 드래곤이다. 홀로 오롯한 존재지.”
하긴 태어날 때부터 상급 악마에 비견되는 드래곤이다.
“알일 때는 지켜주지만 태어나서 첫 포효를 터트린 후에는 가까운 드래곤이 가서 축하와 함께 선물을 내주는 것이 첫 교류이자 마지막 교류다.”
아루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버둥 치기에 에드가 내려주니 카루아리스에게 다가갔다. 카루아리스는 달려온 아루스를 품에 안아주었다.
아루스는 콧구멍을 벌름벌름 거리다가 카루아리스의 손바닥을 핥았다. 카루아리스는 그 모습에 픽 웃고는 붉은 가사 안에 손을 넣더니 붉은 보석이 반짝이는 목걸이를 꺼냈다.
아루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카루아리스가 그걸 아루스의 목에 걸어주었다. 줄이 줄어들어 아루스의 목에 맞게 줄어들었다.
끼잉!
꼬리까지 강아지처럼 흔드는 아루스를 바라보던 카루아리스가 에드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앉았음에도 에드와 눈높이가 비슷했던 카루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보호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드래곤은 오롯한 존재. 사실 보호자라는 존재는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 의해서 마룡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마룡이 되기로 원했다면 그 또한 인정해 주는 것이 우리 일족이니까.”
무서운 놈들이다.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이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카루아리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보호자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만약 드래곤이 성체가 되기 전에 죽는다면 그 복수를 대행해 줘야 하기 때문이지.”
“복수를 해주는 거란 말입니까?”
“그래. 그런만큼 보호자는 부모보다 더 유대감이 깊은 존재다. 대부분은 그 어미가 그 역할을 맡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지.”
에드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자네는 그 역할을 맡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에드는 그 말에 아루스를 바라보았다. 목걸이를 받더니 얼른 돌아와 에드의 발밑에서 몸을 돌돌 말고 잠이 들려하고 있었다. 하긴 깨어나자마자 바빴으니까.
에드는 천천히 몸을 숙여서 아루스의 비늘을 쓸어내렸다. 에드의 화살에도 쉽게 뚫리지 않을 것 같은 비늘임에도 불구하고 따듯했다.
신비로운 경험을 시켜 준 녀석. 에드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 아이를 죽인다면 그 녀석은 제가 반드시 죽이도록 하죠.”
카루아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를 드리운 카루아리스는 씨익 웃어 보였다.
“좋다. 네가 아루스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내가 인정하겠다.”
에드는 아루스를 쓰다듬다가 물었다.
“그런데 다른 드래곤은 오지 않는 겁니까?”
아루스가 첫 포효를 터트렸고, 드래곤들이 와서 선물을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카루아리스가 씨익 웃더니 답했다.
“깨어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군.”
간단히 답한 카루아리스가 붉은 가사 안으로 손을 넣더니 곧 붉은 가죽 재킷과 바지를 꺼냈다.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의 옷이었다.
카루아리스가 그걸 건네며 말했다.
“아루스의 보호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드래곤에 대한 것은 악마의 시대 1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라 드래곤의 선물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선물은 마다하는 것이 아니다.
에드가 그것을 받아들자 카루아리스가 노리스에게 손짓하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누구도 감히 그의 앞을 막지 못했고, 노리스는 영문도 모른 채 카루아리스를 따라갔다.
그렇게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던 에드의 곁으로 아린이 다가왔다.
그녀는 에드의 곁에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겁도 없이 전설의 드래곤에게 그리 말하면 어떻게 해요?”
“할 말은 해야죠.”
아린도 카루아리스를 보고는 겁에 질렸다. 신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그만큼이나 강해 보였다. 대악마를 만나면 오히려 투쟁심이 들끓어 올라서 두려워 본 적은 없었지만, 카루아리스는 두려웠다.
에드가 쓰다듬고 있던 아루스가 고개를 들더니 아린을 바라보고는 그녀에게 굴러가서 폭 안겼다. 아린은 아스트론의 화신이라고 여겨질 만큼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본능적으로 끌리나 보다.
하긴 신성력을 품은 양만 따진다면 아루스도 아린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신성력을 품고 있기는 했다.
마리포사는 에드의 머리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드래곤의 보호자를 인정하다니. 너도 정말 미친놈이다.]
에드는 픽 웃음을 흘리고 손에 들고 있던 붉은 가죽 옷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선물이라니 기대가 됐다.
에드는 덱스가 휘두른 검에 맞고도 흠집만 난 자신의 가죽옷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가죽옷이라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성능은 상상 이상이었다.
성유물이었던 덱스의 검은 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그런 검에 베이고도 흠집만 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도다.
게다가 흠집이 금세 아물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대체 이 옷은 뭐지?”
에드의 중얼거림에 대한 답은 노리스가 해주었다. 하룻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핼쑥해진 그가 그 옷에 관해 설명해줬다.
“조사께서 쌍룡사를 열기 전에 입으셨던 물건으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비늘과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고 하더군요.”
에드는 갑자기 이 옷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