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헬레나
헬레나.
3영웅의 하나인 화염계 신비술사인 그녀가 16년의 칩거를 깨고 나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또 다른 대악마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딸인 메르헨이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을 보아서 좋은 상황은 아닐 터.
여유가 있었다면 분명 메르헨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말을 남겼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그 흔적을 쫓고 있다면 아직 그녀가 살아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노리스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과 헬레나의 흔적이 같은 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일행은 닉과 퓨리를 얻어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지금 이들이 데리고 있는 말들도 준마였지만, 네 마리 말이 일행 전부를 태울 수는 없다 보니 닉과 퓨리에 대충 끼어 앉아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에드는 아린의 앞에 앉아있는 메르헨에게 물었다.
“헬레나가 남긴 흔적은 어떤 거야?”
“마력으로 남긴 표식이 있어요. 다음 목적지를 알려주는.”
“그런데 그곳으로 가면 악마가 있다고?”
메르헨은 그 물음에 인상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엄마가 어쩌지 못할 놈이 계속 뒤를 쫓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엄마의 뒤를 쫓는 놈은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악마들을 풀어놓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네가 뒤를 쫓고 있다는 걸 안다는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렇게 악마들을 남겨뒀을 리는 없잖아요.”
헬레나의 뒤를 쫓는 악마가 뒤를 쫓는 메르헨 일행을 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들이 무사한 것을 보면 적당한 수준의 악마들이 왔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이 정도면 거의 설계 수준이다.
메르헨과 그 일행을 키워주기 위해서 악마를 던져주는 것 같다.
의심이 가지만 일단 상급 악마를 만나기 시작했다면 더는 그런 설계가 통하지 않는다. 상급 악마는 대악마도 그냥 막 버리지 못하는 패니까.
에드는 굳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심안으로 주위를 경계하는데 집중했다.
그런 에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르헨이 아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예요? 소문은 들었는데, 믿기 힘든 소문들 뿐이라서.”
아린은 메르헨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답했다.
“어떤 소문?”
“마젤타 왕국에서 지옥의 문을 닫았다는 소문부터 대악마를 죽였다는 소문까지 들리는 소문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요.”
아린은 순순히 답해주었다.
“우선 지옥의 문을 닫은 것도 맞고, 대악마도 죽였어. 세 마리의 대악마를 죽였으니까.”
메르헨의 눈이 한참 커지는 것을 보고 아린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일행들 덕분이지. 에드가 가장 크게 힘썼고.”
메르헨이 에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메르헨이 감탄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번에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에드는 메르헨의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메르헨은 신비술은 어떤지 몰라도 경계심이라고는 없는 이였다. 소매치기를 당해서 굶어 죽을 뻔한 것을 구해줬으니까.
그리고 그때 싸웠어도 에드는 지지 않았을 터였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극명했다.
작정하고 싸운다면 3초 안에 제압할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들을 끌고 가는 중이었다. 일행이 함께 이동 중이니 이들이 위험할 일은 별로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냥 뒤에 세워두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들도 성장해야 대혼란에 저항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때 퓨리가 옆으로 따라붙었고 그곳에 타고 있던 노리스가 나침반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석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닉과 퓨리가 바닥으로 내려섰고, 일행들이 모두 내리자 닉과 퓨리가 역소환되었다.
에드가 다가가니 노리스가 나침반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 멀지 않으니 여기서부터 걸어갑시다.”
날아서 덮치는 것도 좋겠지만, 메르헨이 그들을 요격하려 했던 것처럼 위험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었다.
최소 상급 악마 이상인 적이니까.
에드는 잠시 일행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행을 나눠서 접근하도록 하죠.”
노리스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은 지도로 확인해 보면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대략 이백 호가 넘는 크기의 마을이었는데 빙 둘려 있는 목책을 보면 양쪽으로 진입해도 될 것 같았다.
“어떻게 나눌 생각인데?”
덱스의 물음에 에드는 담담히 말했다.
“내가 메르헨 팀과 같이 움직일게.”
일행은 에드가 빠져도 충분히 강하다. 아린도, 론멜도, 덱스도, 노리스도, 하다못해 디에고마저도 강하다.
그러나 이쪽에서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디에고를 감당할 이가 메르헨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린이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는 그녀의 시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심안으로 보면 대충 어디에 적이 있을지 알 수 있으니까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움직이죠. 이정도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악마들이 알아챌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조심해요.”
에드는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따라와.”
칸을 필두로 카일이 뒤를 따르고 메르헨이 그 뒤에 섰다. 마지막으로는 리프가 가장 후미에서 단검을 뽑아 든 채 따르고 있었다.
“헬레나가 남긴 표식이 이곳으로 향했다는 거지?”
“맞아요.”
메르헨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손에 든 오브를 꼭 쥐었다.
메르헨도 에드가 예상한 것만큼은 이미 예상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부정하고 싶을 뿐.
헬레나가 자의든 타의든 악마들을 메르헨의 앞에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
에드는 화살을 뽑아 시위에 걸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혹시나 뒤처지면 어쩌나 했는데 용케 잘 따라붙고 있었다.
배불뚝이 칸은 생긴 것과 다르게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따라붙고 있었다. 에드는 마음 놓고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잠시 그리 이동하니 메르헨을 칸이 업고 카일과 리프가 뒤를 따르며 진형이 바뀌었다. 아마 저들도 고속으로 이동해야 할 때는 메르헨을 업고 이동하는 것이 익숙한 듯 했다.
하긴 칸의 등에 업힌 메르헨의 능력을 생각하면 저건 전차나 다름없으니 좋은 판단이었다.
아무리 에드가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심안으로 살폈을 때 아린 일행과 비슷하게 마을에 도착한 것을 보면 이 칸이라는 남자의 능력을 다시 봐야 겠다.
민첩함은 어떨지 몰라도 체력 하나는 굉장한 수준이었으니까.
에드는 마을의 목책 위로 올라온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마을에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에드의 심안은 마을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는데 이 큰 마을에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수상한 마을이다.
“여기도 악마가 있다는 건가요?”
상급 악마 이상을 쫓는 중이었으니 악마가 있다는 것은 맞다. 다만 그 악마가 에드에게서도 기척을 숨길 정도로 뛰어나다는 걸까?
하긴 상급 악마가 아니라 대악마라면 이게 당연한 거다.
“악마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기척을 숨기는 것에 능하거나 아니면 내게도 기척을 숨길 정도로 뛰어난 녀석일 가능성이 커.”
에드는 칸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목책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목책의 높이는 대략 5미터. 지금의 에드라면 도움닫기 없이도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지만 칸에게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소리없이는 힘들 겁니다.”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굳이 소리없이 넘어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럼 가능하죠.”
5미터의 목책을 넘을 수 있다고 하니 에드가 먼저 움직였다.
“그럼 먼저 올라가죠.”
에드가 땅을 박차고 단숨에 5미터나 되는 목책의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심안으로 살피면서 육안으로도 돌아보는데 역시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칸이 달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쿵! 쿵!
그리고 칸이 도약하더니 단번에 날아왔다. 물론 에드처럼 아무런 도움도 없이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5미터의 목책 위에 손가락을 걸칠 정도로는 뛰어올랐다.
손가락을 걸친 칸이 훅 솟구쳐 목책 위에 서자 카일과 리프도 뒤따라 올라왔다.
그들은 목책의 중간에 단검 하나 꽂아 넣고 그걸 발판 삼아 목책 위로 올라섰다. 에드는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분명 조금 전까지 심안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마을의 지붕 위에는 활을 들고 자신을 겨누는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 자들이 족히 스물은 되어 보였다.
에드쪽만 아니라 아린의 일행이 속속 올라오고 있는 목책을 향해서도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기척을 숨기는 것이 가능한가?
육안으로는 확인이 되는데 심안으로는 그들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숨을 내쉬지 않는 존재들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으로 온전히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존재들인가?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은 자들이다.
메르헨도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자들이에요.”
“그래? 적이야?”
“모르겠어요. 악마를 처치한 곳마다 저들이 있었어요. 그리고는 저희 눈에 띄면 사라졌어요.”
저 정도로 능숙하게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자들이 메르헨 일행의 눈에 띄었다. 그건 일부러 행적을 밝혀줬다는 말이다.
그래서 에드는 화살을 날리는 대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누군지 밝혀라.”
에드의 물음에 그들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명이 손을 들자 모두 활을 내렸다. 그 모습에 에드도 활을 내렸다.
저들이 시위를 당기고 있는 활을 겨누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에 에드는 활을 내린 채로 저들을 이끄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모습이 에드에게는 의외로 다가왔다.
검은 피부. 그에 비견되는 달빛을 머금은 은발.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와 있는 뾰족한 귀.
“다크 엘프?”
악마의 시대 1을 즐겼던 에드도 모르는 종족이다. 어쩌면 저들 또한 고대의 종족으로 표현조차 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닐까?
에드의 중얼거림에 은발의 다크 엘프가 입을 열어 답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려? 누구를?”
다크 엘프의 시선이 메르헨을 향하고 있었다. 메르헨이 다크 엘프의 말에 앞으로 나섰다.
“헬레나를 알고 있어요?”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다크 엘프에게 물었다.
“에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헬레나에게 안내해줄 수 있겠습니까?”
다크 엘프는 가만히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서린 갈등을 읽은 에드가 메르헨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메르헨만 보낼 마음은 없습니다.”
메르헨이 감동한 듯 에드를 올려다보았지만, 에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곳에 헬레나가 있고, 다크 엘프들이 그녀의 뜻을 따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에 온 것은 노리스의 나침반이 가리킨 곳이었기에 왔다. 상급 악마 이상의 존재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일 텐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헬레나가 아군이라는 증거도 없었고.
“당신들이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따라오십시오.”
다크 엘프가 먼저 앞장섰고, 그런 그녀를 따라 일행은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 마을에 왜 기척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이 마을은 버려진 마을이었다. 몰살 당한 것이 아니라 그냥 버려진 마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크 엘프를 따라 이동한 곳에서 에드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보았던 모습에서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은 헬레나와 그녀가 손을 붙들고 있는 다크 엘프 여인. 미간을 찌푸린 다크 엘프 여인의 볼록하게 올라온 배를 본 에드가 노리스를 돌아보았다.
노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다크 엘프 여인의 뱃속 태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