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콜
시끌시끌한 주방에서 엠마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직접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옆에서는 면을 튀기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을 감독하며 도움을 주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진두지휘하면서 직접 라면을 끓이고 국물의 간을 보는 것은 엠마였다.
“라면 4개 출발!”
엠마가 라면을 담아서 내주고 돌아서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디에고?”
디에고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뭐 도와줄 것 없어?”
“잠깐만. 조금만 있으면 브레이크 타임이야.”
엠마는 그리 말하고는 약 10분 정도 라면을 더 끓이고는 옆에 있는 종을 쳤다.
“재료 소진! 브레이크 타임이야. 다들 점심 먹고 와.”
엠마의 말에 일하던 애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빵 바구니에 들어있는 빵들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몇몇 소년들은 디에고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하긴 디에고는 페르산 왕국 혼혈이다 보니 백인들이 판치는 트라비아 왕도에서는 특히 눈에 띄었다. 게다가 셰프인 엠마는 이곳에서 일하는 소년들의 우상이었다.
그런 엠마가 이렇게 반가워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녀는 언제나 친절했지만, 주방 내에서는 청결과 맛의 유지를 위해서 언제나 엄했다.
그런 엠마가 저리도 반가워하니 디에고에게 관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엠마는 빵 두 개를 들고는 디에고를 데리고 주방 뒤편의 공터로 갔다. 몇몇 소년들이 모여서 빵을 먹다가 엠마와 디에고를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디에고는 몇몇 소년들의 눈에 서린 질투심을 읽고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엠마는 건물의 그늘에 앉아서 디에고에게 빵을 내밀었다.
디에고는 빵을 받아서 한입 물었다. 단단한 바케트 빵 안에 버터와 과일 쨈이 들어가 있었다. 단순하지만 맛있었다.
이걸 먹으니 새삼 엠마의 손맛이 그리워졌다.
디에고가 말없이 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엠마도 빵을 우물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디에고. 뭔가 달라진 것 같아.”
“그래?”
디에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많은 성장이 있었다. 이제는 사령의 수가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다루는 실력도 늘었고 그들을 강화하는 법도 안다. 그리고 크리스탈 해골을 다뤄서 원혼을 이용한 혼령박도 익혔다.
마력도 성장해서 이제는 후안에 비견될 정도로 성장했다. 격이 상승했지만, 엠마가 그걸 알아볼 수 있을까?
디에고는 문득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건을 두른 채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엠마를 보았다. 하루하루가 생사를 오가는 자신의 삶과는 다른 삶이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삶을 찾았다.
전쟁고아들을 구하고 성공한 음식점의 셰프가 된 모습은 빛나 보였다.
자신이 그 옆에 서도 되나 싶을 만큼.
디에고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엠마가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디에고는 흠칫 놀라 그 손을 바라보았다.
엠마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는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또 쓸데없는 생각 했지?”
“으응?”
당황하는 디에고와 눈을 마주친 채 엠마가 말을 꺼냈다.
“잊지 마.”
“뭘?”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 잊지 말라고.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힘들여 성공하려고 하는지 잊지 말라고.”
기다린다고 했던 엠마는 디에고가 돌아올 자리를 위해서 이리도 노력하고 있나 보다. 디에고는 그런 엠마의 진심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자신이 이렇게 아버지 후안과 함께 대악마의 퇴마행에 나선 것은 원죄를 사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에드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기다리는 엠마 때문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돌아올 생각이었다.
“지내기에는 어때?”
“정신없이 바빠. 그래도 엄청 즐거워. 돈도 많이 벌려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어.”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건 전쟁고아들을 고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말마다 빈민가에 무료 배식도 하고 있어.”
“대단하네.”
대악마를 잡고 세계를 구하고 있다는 사명 아래에서 움직이지만, 이렇게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고 있는 엠마를 보니 오히려 부럽기까지 했다.
“오빠도 돌아오면 같이 하자.”
“그래. 엄마도 좋아하실 거야.”
빈민가에 살아봤기에 빈민가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잘 알았다. 그들은 먹을 것이 가장 필요하고, 그다음에는 빈민가를 벗어날 기회를 원한다.
그리고 그건 디에고의 엄마도 원했던 일이었다.
디에고가 굶주리지 않기를. 그리고 번듯한 일을 가지기를 바랐다.
디에고는 후안을 좋아했다. 빈민가의 등불이었던 그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처럼 빈민가의 등불이 될 기회를 엠마가 주려 했다.
“꼭 그렇게 하자.”
디에고가 환한 미소를 지었고, 엠마도 그를 마주 바라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세계에 라면 가게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에드는 기분이 좋아졌다. 맛도 더 개량되어서 진한 풍미가 느껴졌다.
라면이 이런 고급 음식이었나?
에드가 국물까지 완전히 비우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다른 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고 있었는데 에드는 이 정도 매운맛은 매운 것도 아니라 한 그릇 더 주문하려고 했는데 브레이크 아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 정도가 적당했다.
에드는 다른 이들이 식사를 마치는 것을 보고는 브란트를 돌아보았다.
“저녁에 마감하고 나서 술이나 한잔해요.”
“그래. 9시면 재료 소진으로 끝나니까 그때 보자.”
9시에 다시 라면 가게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행은 볼일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에드는 아린과 함께 베네딕토 대주교를 만나러 갔다.
대신전에 가니 베네딕토 대주교는 반갑게 차를 내줬다. 에드와 아린이 차를 받아서 향을 즐기는 사이에 베네딕토 대주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생했네.”
에드는 어깨를 으쓱였고, 옆에서 아린은 차만 마셨다. 베네딕토는 그 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퇴마행이 쉽게 끝나지 않는군. 그래도 대악마를 셋이나 잡았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네.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없을 정도야.”
3영웅이 대악마 셋을 죽인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그들은 각자 하나씩의 대악마를 죽였다. 그런데 아린이 이끄는 팀이 대악마를 셋이나 죽였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그만큼 아스트론 교단의 이름도 끝없이 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예언이 내려왔습니다.”
“새로운 예언?”
에드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아스트론이 전했던 새로운 예언을 전해주었다.
“대악마 셋이 죽었고, 그 빈자리를 노리고 악마들이 일어날 것이다.”
베니딕토의 인상이 굳어질 때 에드의 말이 이어졌다.
“잠든 자들이 깨어나니 그들이 적이 될지 힘이 될지는 모른다고 전했습니다.”
얘기를 들은 베네딕토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가 담담히 말했다.
“대혼란이 올 거라고 했습니다.”
베네딕토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남은 대악마들과 그 자리를 탐하는 악마들, 그리고 잠들었다고 하는 고대의 존재들이 깨어난다고 했다고?”
“예. 그랬습니다.”
베네딕토는 턱을 괴고는 지도를 가져와 펼쳤다. 그리고는 지도를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악마들이 나타나고 있네. 그것 때문에 성기사들을 파견 보내고 있었네. 그냥 악마가 등장하는 빈도가 오른 것이라고 여겼을 뿐인데 그 뒤에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군.”
에드는 지도에서 베네딕토가 짚어준 곳들을 살폈다. 생각보다 많았다. 얼핏 보아도 스무 곳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건 트라비아 왕국 내에서만 이런 겁니까?”
“타 왕국에도 악마들이 판을 치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다른 왕국으로 성기사들을 파견 보낼 정도는 아니라서 각 교단에 연락을 취해서 악마 사냥을 하는 중이네.”
“이미 시작됐군요.”
아스트론의 예언을 듣고서 왕도로 오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언제 시작한다는 말은 없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세계는 벌써 대혼란으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혹시 성기사가 갔는데도 연락이 끊긴 곳이 있습니까?”
성기사들의 수준은 하급 악마 이상 중급 악마 이하다. 그런 성기사들이 연락이 끊긴다면 상급 이상의 악마가 나타났다는 얘기.
그렇다면 그곳을 우선해서 가야 한다. 가장 효과적이려면 일행을 나눠서 트라비아 왕국 곳곳으로 보내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일행들이 위험해진다.
아마 지금 대악마나 상급 악마 이상은 일행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든 따로 흩어지기만 기다리며 그렇게 되면 가차 없이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에드는 가만히 지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부마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미 자신의 위업을 이룬 이네. 어떻게 그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지도 마련해주세요. 지금 움직이는 성기사들이 표시되는 지도 있죠?”
“있네.”
“그거 두 개만 준비해 주세요. 하나는 부마에게 주겠습니다.”
“부마에게?”
“예.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대혼란 앞에서 은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에드의 말을 들은 베네딕토가 지도를 준비했다. 건네준 지도를 받은 에드가 그걸 챙기며 말했다.
“성기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나눠서 맡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사실 일손이 부족했거든.”
베네딕토의 시선이 아린을 향했다.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아린이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의 아린은 마스터 팔라딘은 물론이고 교황과 성녀를 포함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스트론의 화신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총본회에 들르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군.”
“그러게요.”
“크로셀에 대한 것은 들었다.”
아린은 그 말에 인상을 굳힌 채 답했다.
“라그록스가 부리고 있었어요. 그와 싸우는 중에 모두 죽였죠.”
베네딕토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의 원수이자 친구들의 원수. 그런 그들을 향한 복수를 모두 이뤘다. 그 복수가 시원했냐고 물을 수 없었다.
크로셀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고생했다.”
아린은 베네딕토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모든 복수를 이뤘기에 그 위로를 위로로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예. 최선을 다할게요.”
에드는 아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끝나고 나거든 그때는 술 한잔 같이하시죠.”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술을 사겠네.”
에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짓고는 지도를 챙기고 떠났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베네딕토는 성호를 그었다.
“그대들의 앞길에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다 같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 펜드래건이 세실리아와 함께 찾아왔다.
에드가 보낸 초대장을 받고 온 그들은 이미 브란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안면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서 라면이라는 것을 먹고 싶었는데 이렇게 올 줄은 몰랐군.”
펜드래건은 브란트와 엠마와 인사를 나눈 후에 말했다.
“혹시 귀족이나 누가 귀찮게 하면 사람을 보내. 내가 해결해 줄 테니.”
브란트는 그 말에 에드를 바라보았다. 사실 왕도에서 장사를 하다 보면 시비를 거는 이들이 없을 수가 없다.
귀족들이 줄을 서서 먹는 것도 충분히 화를 낼만 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들도 펜드래건의 앞에서 화를 내지는 못할 터였다.
“아니. 이걸 남겨두지.”
말을 마친 펜드래건이 검을 뽑아서 가문의 문장을 입구의 옆에 그려놓았다. 펜드래건의 가문이 뒤를 봐준다는 표식이니 감히 다른 수작을 부리는 이들은 없으리라.
브란트가 힘이 봉인되어 있다고 해도 어지간한 이들을 다 때려눕힐 정도라고 해도 귀찮음을 피할 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다들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에드는 펜드래건과 따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악마의 시대 1의 주인공인 펜드래건과 억지로 악마의 시대 2에 끌려와 이제 주인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에드가 마주 앉은 자리였다.
“그래. 할 말이 뭔가?”
에드는 펜드래건의 앞에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대혼란으로 어지러워진 상황입니다. 성기사들의 손도 부족하다고 하네요. 아스트론 교단에서는 펜드래건에게 부탁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저는 아니거든요.”
펜드래건이 그 말에 씨익 웃었다.
“그래. 무슨 부탁인데?”
에드는 왕도를 중심으로 동과 서를 나눴다.
“저희가 동쪽, 펜드래건이 서쪽을 맡아주세요.”
펜드래건은 지도가 아니라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내기할까?”
에드는 역시 펜드래건답다고 여겼다.
“그러죠. 뭘 걸까요?”
펜드래건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원하는 것 하나 들어주기. 그게 무엇이든.”
에드는 씨익 웃었다. 자신이 뭘 걸 줄 알고?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