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재회
달리아 왕국 사절단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달리아 왕국의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국경을 지키던 트라비아 왕국의 기사단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달리아 왕국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에스터 공주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선 이들을 보고 잠시 주저했다.
트라비아 왕국에 보고는 올렸지만, 아직 답은 듣지 못한 상태. 그런 상황에서 국경 근처까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온 기사단장 플립은 에스터 공주의 옆에 선 성기사를 보고 인상을 굳혔다.
소문이 들린다고 하지만 독한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속국이나 다름없게 된 달리아 왕국의 공주를 억류할 수 있었다. 그럴 마음으로 온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에스터 공주의 옆에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달리아 왕국으로 향한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갈 때 이미 아스트론 교단에 보고했고,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차기 마스터 팔라딘이자 교단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에스터 공주와 함께하고 있으니 함부로 굴 수도 없었다.
“아린 경이 달리아 왕국 사절단과 함께 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많은 도움을 얻은 것도 있고, 이번 사절단을 왕도까지 호위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아린이 우연히 만난 것이라면 그만 따로 보낼 생각도 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국경까지는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기 바랍니다.”
달리아 왕국의 국경을 지키던 트라비아 왕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트라비아 왕국의 국경까지 가게 된 일행은 트라비아 왕국의 왕도를 향해서 계속 이동했다.
그렇게 트라비아 왕국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드레드가 말을 꺼냈다.
“할 말이 있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낸 드레드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드레드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 기회에 은퇴할 생각이었네. 숲으로 돌아가 정령과 함께 지낼 생각이었지.”
드레드의 말에 모두가 인상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드레드는 굉장한 전력이었다.
전대 영웅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방면으로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의 지식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날 두고 은퇴한다고?”
제라드가 따지고 들었다. 제라드는 문신술을 익히고 배우면서 드레드를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떠난다고 하니 제라드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드레드는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끝까지 들어.”
드레드의 말을 듣고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드레드는 노리스를 한 번 보고는 아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스트론의 예언대로 잠든 자들이 깨어나고 대혼란이 일어난다면 홍련왕을 비롯해 드래곤들이 깨어날 수도 있지만, 고대 정령들이 깨어날 수도 있어. 그들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끔찍해.”
고대 정령에 대한 것은 드레드로 플레이해 본 에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왜 잠들었는지에 대해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고대 정령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런 고대 정령이 깨어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에드도 이 얘기를 가벼이 들을 수 없었다.
드레드는 두 주먹을 마주 댄 채 말을 이었다.
“고대 정령들을 찾아서 그들의 뜻을 듣고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해야겠네. 그래서 자네들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군.”
제라드는 심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에드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고대 정령에 대해서라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해합니다.”
에드의 대답을 들은 드레드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잠시 그렇게 바라보던 드레드가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할지 잘 알고 있네. 그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용서하게.”
“아닙니다. 그 또한 대악마를 상대하기 위함인 걸 알고 있습니다.”
에드가 대표로 답하자 드레드는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들을 함께 데리고 가고 싶네.”
드레드의 말에 제라드의 얼굴이 확 폈다. 정말 드레드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나 보다.
“사실 매드 몽키가 필요하기도 하고.”
아인 강이 닿아있기만 한다면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기도 하다. 드레드가 이제야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그것도 염두에 두었다는 얘기다.
에드는 제라드를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때?”
제라드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형이랑 헤어지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계약 건은 다 끝난 거지?”
네프사엘을 죽이면서 그에 대한 보상도 모두 지급했다.
그랬으니 거래는 일단 끝난 상태였다. 대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해서 제라드도 함께 하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대악마를 만날 것 같지는 않으니 그에게 의뢰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드레드를 따라가고 싶어 한다. 제라드는 야만 용사로 스스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 성장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이 드레드였다.
에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따라가.”
대혼란에 대악마들이 날뛰고, 잠들어 있던 자들이 깨어나 날뛰게 된다면 그 틈바구니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든 전쟁이 될 터였다.
그러니 최대한 아군의 전력을 높이는 것이 옳았다.
제라드는 에드의 말을 듣고는 씨익 웃었다. 어차피 결정은 자신이 할 것이었지만, 에드가 저리 말해주니 마음이 놓였다.
“형. 우린 다시 만날 거야.”
“그럼 안 보려고 했어?”
제라드가 씨익 웃는 걸 보고 에드도 피식 웃어버렸다.
일행에서 드레드와 제라드의 팀은 그렇게 헤어졌다.
드레드와 제라드의 팀이 헤어졌지만, 사절단은 인원이 더 불어났다. 사절단을 호위하기 위해 트라비아 왕국의 왕궁에서 기사단을 보내왔으니까.
그리고 기사단을 이끄는 이는 낯이 익은 이였다.
국왕의 수호 기사였던 로건이라는 이였다. 펜드래건 앞에서도 국왕을 지키려고 나섰던 수호 기사.
로건은 사절단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
“국왕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왕도까지 호위할 수호 기사단장 로건입니다.”
펜드래건의 눈에 들더니 수호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건가?
로건이 데리고 온 기사단의 호위를 받고 나서는 사절단도 긴장을 풀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여행길이 되었다. 로건은 왕궁까지 가는 길에 성이나 마을에서 쉴 곳을 모두 수배해 놓아서 그의 말대로 이동하기만 하면 잠은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었다.
왕도까지 사흘이 남았을 때 에스터가 에드의 방을 찾아왔다.
아린과 연인이 된 것을 안 뒤로 에스터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에드는 그녀의 방문이 조금 뜻밖이었다.
에드는 정비하던 장비들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차를 내려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스터는 에드가 따라준 차가 담긴 찻잔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에스터가 입을 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사흘이라고 하지만 곧 왕국 직할령이다. 그 안에서 달리아 왕국 사절단이 위험해질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찻잔에 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잘 될까요?”
에스터의 물음에 에드는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해했다.
에스터는 용기가 필요했다. 하긴 그녀가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이 그녀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걸까?
에드는 이곳에 와서 가족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것은 대악마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 오히려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감히 여왕이 될 그녀의 어깨에 올라간 짐의 무게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대답해주기로 했다.
“예. 잘 될 겁니다.”
에스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어째 애써 웃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힘이 된다면 다행이다 싶었다.
에스터는 그 뒤로 아무런 말도 없이 차만 조금씩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그녀가 차를 다 비우기에 찻주전자를 다시 들었다.
에스터는 고개를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큰 도움이 됐어요.”
그 말을 끝으로 에스터가 자리를 떴다. 에드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빈 찻잔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가만히 그걸 바라보던 에드는 찻잔을 정리해서 치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아서 무기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트라비아 왕궁의 왕도.
그 성문을 지나면서 에드는 감회가 새로웠다.
왕도를 떠날 때와 지금은 모든 게 달랐다.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것도 있지만, 일행도 늘었다.
마젤타 왕국을 거쳐서 달리아 왕국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도착한 왕도에서 백성들은 대로에 나와서 사절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국의 사절단이라고 한다면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었다. 진상품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오랜 여행으로 지저분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는 에스터는 달랐다.
에드의 방을 찾아갔다가 다시 나온 뒤로 에스터는 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것의 무게를 알았고, 이제 그 무게를 짊어지기로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비록 초라한 말을 타고 있음에도 일국의 여왕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어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아니면 달리아 왕국의 여왕답다는 말을 수군거리고 있었다.
하긴 일반 백성들이 이웃 왕국의 여왕을 이렇게 직접 볼 일은 평생 없을 테니까.
그렇게 대로를 따라서 이동해 왕궁까지 가자 왕궁 친위대가 나와서 사절단을 데리고 이동했다. 그렇게 일행은 왕도에 들어선 이후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왕궁까지 갈 수 있었다.
사절단이 머물 별궁을 배정받고 에스터 공주와 에드, 아린만을 초대한 정찬에 초대를 받았다. 일행도 사절단과 함께 별궁에 머물고 있었기에 에드와 아린도 별궁의 시종들이 권해준 옷으로 갈아입고 정찬에 참여하기로 했다.
정찬 시간에 맞춰서 에드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기는 모두 일행에게 맡긴 채 왕궁 정찬에 어울리는 연미복을 입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야 시상식에 참여할 때 종종 입던 옷이지만 이곳에 와서는 입을 일이 없었던 옷이기도 했다.
에드가 연미복을 입은 채 서 있으려니 푸른 하늘빛의 드레스를 입은 아린이 내려왔다. 그녀도 드레스가 어색한지 어쩔줄 몰라했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예뻐요.”
아린은 그 말에 얼굴을 붉히고는 어색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 어설픈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때 별궁에서 나오는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에스터 공주.
깨끗하게 씻고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에드는 그날 저녁 이후로 그녀에게 어떤 위엄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런 위엄이 더해지니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도 후광을 등에 업은 아린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색하지 않나요? 드레스 입어 본 지가 오래돼서.”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행은 곧 마차를 타고 국왕이 기거하는 하늘 궁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차려진 식탁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펜드래건! 세실리아!”
펜드래건과 세실리아가 레이든 국왕과 함께 자리에 있었다. 에드의 시선은 곧 레이든 국왕의 옆에 서 있는 여인에게 머물렀다.
남색 단발 머리에 남색 드레스를 입은 에밀리아 공주가 그곳에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