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혼절
석장을 짚은 채 선 노리스는 장엄하게 타들어 가는 성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다가 화살들을 회수해서 돌아와 손질하기 시작한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언을 따라 나왔는데 벌써 대악마 셋을 해치웠다. 비록 하나는 대악마가 되다 만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던 놈 중 하나였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업적이었다.
그걸 이 짧은 시간 동안 해낸 데에는 악마 사냥꾼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일행의 리더로서도 손색이 없었고, 그 덕분에 대악마들이 하늘을 찢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대악마들도 지금 자신들이 사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일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반응을 보이는 그들과의 싸움은 쉽지 않을 터.
전대의 영웅인 3영웅의 하나인 드레드가 합류하면서 일행의 전력은 크게 발돋움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다.
대악마는 과연 대악마.
네프사엘과 싸우면서 일행이 모두 달려들어서 겨우 잡아낼 수 있었다. 대악마는 자신의 공격기도 잘 통하지 않을 정도의 강자였다.
쌍룡사에서 두 명의 호법승이 있었지만, 두 명을 뽑는 것이라 둘이었을 뿐 다른 한 명과 자신의 차이는 극명하다고 여겼다.
그런 자신도 대악마를 상대하면서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데 에드는 달랐다. 아린이나 론멜은 대악마를 제물로 바치고 신의 힘을 얻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또한 부러운 것이었지만, 에드는 달랐다.
그는 그냥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기어시를 다루는 것도 세 개가 한계였는데 이번에는 일곱 개의 비도를 모두 다뤘으니까.
그의 성장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자신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노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동굴에서 호흡하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마력이 풍부한 숨을 들이마신 노리스는 제물을 바치는 순간 이곳의 마력 농도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기 하지 않았다면 알아채기 힘들었을 일.
노리스는 앞으로도 제물을 바칠 때 운기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마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드는 화살을 모두 수거하고 정비까지 마친 후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캄벨은 신성 회복 주문으로 회복이 되고 나서 다시 무기를 든 채 에스터의 뒤를 지키고 있었고, 에스터는 아린을 따라서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심안에 일행이 포착되었다.
잠시 후에 도착한 일행은 드레드를 필두로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다친 이는 없었다. 드레드는 옆구리에 끼고 온 디에고를 내려놓으며 아린을 바라보았다.
“성기사는 저게 편하군.”
죽은 대악마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완전한 박멸. 정령은 강대한 힘을 전해주지만, 신처럼 성화로 태워버리지는 않으니까.
드레드는 고개를 들어 동굴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신성 축복을 바라보았다. 대악마가 쌓은 악업을 제물로 바치는 만큼 그만큼의 선업을 얻으며 신은 강해진다.
세계의 균형이 신에게 기우는 것이 과연 잘된 일일까?
잠시 그에 대해 생각하던 드레드는 긴 숨을 토해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드레드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악마를 놓치지 않던 그 집요함 덕분에 네비로스를 죽일 수 있었다. 자신마저 잠깐 네프사엘의 죽음으로 방심했던 순간에도 일말의 방심조차 하지 않고 뒤를 쫓았던 사냥꾼.
자신에게 네비로스의 정수가 남아있을 때는 정 하나 주지 않으려고 했던 이가 아닌가?
그런 그가 예의를 차리고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야 끝이라는 것이 실감 나서 말일세.”
에드는 드레드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살집에서 그가 건네주었던 화살을 꺼내 들었다.
“받으십시오.”
에드가 건네준 화살.
그걸 받아든 드레드는 만감이 교차했다.
네비로스의 정수를 품고 정령의 힘을 빌려 억누르고 살아온 16년. 놈을 죽일 방법을 찾는 시절이었지만, 자신은 조금씩 지쳐갔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
에드를 만나 그에게 화살을 건네면서 마음을 놓았다. 자신이 네비로스에게 굴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끝내줄 것을.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기 전에 막아줄 것을 알았으니까.
그랬던 네비로스의 정수를 뽑아내고 죽였다.
허탈하고, 진이 빠졌다. 16년간의 피로가 모두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돌려받은 화살. 이 화살을 받으니 드디어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레드는 말없이 화살을 받아 챙기고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대악마 네비로스와 싸울 때 함께 했던 이들보다 더 뛰어난 이들이다.
자신이 없었다고 해도 네프사엘은 죽었을 터.
라그록스까지 자신의 도움 없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뛰어난 이들인지 알 수 있었다.
드레드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에드는 드레드가 물러나자 디에고에게 다가갔다. 디에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동굴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저 이렇게 무기력해도 되는 걸까요?”
“무기력하다니?”
에드는 디에고의 옆에 앉아서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트론의 축복이 내려오면서 주변을 푸르게 밝히고 있어서 더욱 창백해 보이는 디에고의 얼굴을 보며 에드가 미소를 지었다.
“넌 충분히 잘했어.”
“몇 번이나 역소환 당하고, 잠시 묶어 놓은 것밖에 하지 못했어요.”
“몇 번이나 역소환 당하는 와중에도 너는 굴하지 않고, 닉과 퓨리를 소환했어. 덕분에 일행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잠시 묶어 놓은 덕분에 내 화살이 놈의 머리를 터트릴 수 있었고.”
디에고는 그 말에 픽 웃고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너 기다리고 있을 엠마도 있으니까.”
에드의 말에 디에고는 빙긋 웃었다. 엠마의 얼굴을 떠올린 디에고는 몸을 일으키고는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정신을 차린 것 같아 에드는 디에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신의 축복이 끝난 것인지 아린의 몸으로 푸른 신성력이 쏟아졌다. 아린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후광이 더욱 거세졌고, 이제 그녀는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린은 에드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니 그제야 아직 아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가 아린은 사라지고 아스트론만 남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
다음 대악마는 시트라에게 바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될 정도였다.
“아린.”
“예.”
에드는 아린이 아직 온전히 그녀임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린은 그런 에드에게 다가와 살며시 그를 끌어안았다.
아린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건가?
에드가 당황해서 바라보는데 아린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힘이 빠지는 그녀를 부축하는 에드를 에스터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달리아 왕국군의 반역은 손쉽게 제압되었다. 젝스 대장군이 죽은 것을 알고, 그 휘하에 있던 이들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에스터 공주의 명에 의해 바튼 공이 대장군의 직위에 올랐고, 그녀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동굴 뇌옥에 수감되었다.
네프사엘이 있을 때는 쓰지 못했던 동굴 내부까지 파악하고 그곳에 각기 그들을 수감한 이후에 에스터는 문제에 봉착했다.
“식량이 부족할 줄은 몰랐네요.”
바튼 공은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이대로라면 한 달이 한계입니다.”
바튼 공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인상을 굳힌 채 중얼거렸다.
“그의 방식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기에 이 군대가 유지되었군요.”
에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아 왕국의 국민이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고 젝스 대장군을 죽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모인 이들이 굶어 죽게 생겼다.
그렇다고 이들을 그냥 해산할 수도 없었다.
지휘가 없는 군대는 그야말로 도적이나 다름없으니. 그리고 왕국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모인 병사들을 그렇게 보낼 수도 없었다.
병사들의 걱정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협상하러 에드 일행을 따라가려고 해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병사 하나가 들어와서는 소식을 전했다.
“에드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병사가 물러가고 잠시 후에 에드와 드레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조합이라 에스터가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에스터가 권하는 자리에 앉은 에드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이제 우리는 떠날 거예요.”
“떠난다고요?”
아직 병사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에 에스터는 울상이 되었다. 그런 에스터에게 에드는 드레드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드레드에요. 3영웅의 한 명이죠.”
3영웅에 대한 것은 에스터도 알고 있었다. 다만 드레드가 그들 중 한 명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아, 죄송해요. 그것도 못 알아보고.”
드레드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보급품이 부족하지 않소?”
드레드의 뜬금없는 물음에 에스터는 잠시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드레드는 품에서 금빛 광채를 뿌리는 상자를 꺼냈다.
발론의 금화 상자.
드레드가 에스터를 만나고 싶다고 하기에 데리고 왔더니 대뜸 발론의 금화 상자를 꺼내줄 몰랐다. 저거 하나에 10만 골드.
저 정도라면 달리아 왕국군의 숨통을 트여줄 수 있다.
턱.
또 하나의 발론의 금화 상자가 나왔다. 공주이다 보니 에스터도 발론의 금화 상자가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20만 골드. 군자금으로도 제법 큰 돈이다. 대악마라고 해도 이만한 후원을 했을까 싶었을 때 드레드가 하나 더 발론의 금화 상자를 꺼냈다.
30만 골드.
그 정도라면 에드도 탐이 날 정도의 액수다.
드레드는 세 개의 발론의 금화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에드에게 들었네. 공주는 전쟁 없이 양국 간의 불화를 없애기 위한 협상을 하고 싶어 한다고.”
에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 마음이 기특해서 주는 것이네.”
에드는 드레드의 통 큰 씀씀이에 감탄했다. 하긴 16년 전에 대악마를 잡으면서 부를 축적한 이다. 도박이나 엉뚱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저만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에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드레드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 아버지와는 연이 있었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
악마의 시대에서는 달리아 왕국으로 넘어가는 이야기가 없었으니 아마도 16년의 세월 중에 벌어진 일인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왕국군을 대표해서 감사를 전합니다.”
“이것으로 보급이 해결된다고 해도 시간이 그리 넉넉지는 않을 걸세.”
에스터도 알고 있었다. 이 군대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돈을 잡아먹는지 실감했으니까.
30만 골드라고 해도 길어야 반년. 그것도 아끼고 아껴야 버틸 수 있는 돈이다.
“그 안에 결정짓고 싶어요.”
에스터의 시선이 에드를 향했다.
“그래서 부탁드리려고요.”
에드는 에스터를 트라비아 왕국의 수도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네프사엘이 죽고, 젝스 대장군이 죽으면서 상황이 변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아무래도 에드 일행의 인맥을 이용한다면 얘기를 나누기 수월한 것도 있지만,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까.
에드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같이 가죠.”
사실 에스터가 바로 움직이기 힘들 거라고 여겼기에 오늘 떠난다는 말을 하러 왔는데 드레드가 그녀의 고민을 한 방에 날려줬다.
덕분에 그녀가 같이 갈 수 있게 됐다.
“준비할게요.”
에스터의 대답을 듣고 돌아온 에드는 방에 누워있는 아린을 보고는 그녀를 돌보던 테인에게 물었다.
“아직 차도가 없습니까?”
“그러게. 깨어나질 못하는군.”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린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