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루마인 협곡
“무슨 개 소리냐! 나는 달리아 왕국의 특무대 크로···.”
너무 좋게 대해줬나 보다. 에드는 손을 들어 상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케엑!”
달리아 왕국은 지금 점령군과 정벌군이 들어온 상황. 어느 쪽이 이기든 달리아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그 안에서도 반란군이 공주인 에스터를 데려다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밝히며 전력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들이 국경을 넘어서 분탕을 치고 있다?
과연 반란군의 선택일까? 점령군이 이기든 정벌군이 이기든 이 사실이 전해지면 달리아 왕국 탄압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인데?
에드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들이 그렇게까지 몰렸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도 큰 피바람을 부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륙에 큰 피바람이 불었던 때에는 항상 그 뒤에 악마들이 있었다. 제 2왕자인 클리프 왕자가 달리아 왕국을 정벌하던 그 전쟁에도 대악마 네프사엘이 손을 썼었는데 그가 죽은 이후에 다시 한번 달리아 왕국에 피바람이 불만한 사건의 시작이 이곳에 있었다.
에드가 다시 한번 물었다.
“널 홀린 자가 누구냐?”
아무리 근력에 투자하지 않았다고 해도 레벨이 오르면서 자연스레 늘어나는 근력 덕분에 에드는 이미 범인은 아득히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다.
따귀 한 번에 이가 세 개나 뽑힌 사내는 그 한 번에 살짝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악마는 멀고 인간은 가깝다.
에드가 재차 손을 들어 올렸을 때 그의 옆으로 다가온 이가 있었다.
“내가 해봐도 되겠나?”
에드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드레드를 보고는 순순히 물러났다.
드레드는 사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에드는 겉보기에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드레드는 달랐다. 마치 한 마리 곰을 마주한 것과 같은 느낌.
사내가 겁에 질려 있을 때 드레드는 손을 내밀어 사내의 턱을 잡았다.
“으으읍!”
비명을 내질렀지만, 드레드는 태연하게 벌린 사내의 입으로 나뭇잎 한 장을 넣었다. 그 굵은 손가락이 들어가니 억억 거리던 사내가 나뭇잎을 삼키자 그런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려 준 드레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네는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할 걸세.”
“무슨 개소···끄윽!”
“아! 예쁜 말도 써야 해. 안 그러면 꽤 고통스러울 거야.”
드레드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널 홀린 악마를 너무 믿지 마. 그는 널 지켜줄 수 없다.”
드레드의 붉은 눈을 바라보던 사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알았다. 저 눈은 자신과 비슷한 눈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건 그냥 악마의 눈이다. 자신처럼 악마에게 홀린 자의 눈이 아니라.
그런 자의 말이라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드레드가 물러나자 에드가 사내에게 다가가서는 물었다.
“널 홀린 자가 누구냐?”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거역하기 힘들었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녀의 말을 따랐고, 그녀가 짠 계획은 모두 성공으로 이뤄졌지. 우리에게는 행운의 여신이라고 불린다.”
드레드가 그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혹시 특징이 있나?”
“손톱이 붉은색이었지. 피처럼 붉은색.”
드레드가 에드를 돌아보았다.
“네프사엘이다.”
“손톱 색만으로 알 수 있습니까?”
드레드가 테인을 돌아보았다.
“영감도 알고 있지?”
“대악마에 대해서는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지. 하지만 네프사엘이 붉은 손톱을 가졌다는 것은 전해지고 있네. 다만 그것만 가지고 네프사엘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따름이지.”
에드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자는 어디를 가면 만날 수 있지?”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에드는 고개를 기울였다.
“달리아 왕국군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그 악마는 죽여야 해.”
사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자 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드레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사내가 배를 잡고 쓰러졌다.
“으으윽!”
신음을 흘리는 사내를 바라보던 에드가 말했다.
“달리아 왕국군도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서는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드레드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자 사내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눈물 콧물 다 흘리는 사내를 바라보던 에드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잡혀 왔던 이들은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고, 그들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팀장이 사실은 악마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그를 따르며 했던 일들이 다 옳은 일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에드는 사실 그들에게 물어도 해결될 일임을 알았지만,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악마에게 홀린 자. 원래라면 죽였어야 할 자이지만, 단서였기에 살려뒀다. 지금도 심히 갈등이 되는 중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물어도 될 것 같았으니.
에드의 그런 심정을 느꼈는지 사내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루마인 협곡에 있소. 그곳에서 참모이자 후원가로 지내고 있소.”
에드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그의 품에서 칠채비도가 떠올랐다.
“잠깐만.”
에드가 고개를 돌리니 드레드가 사내에게 다가가 그 미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이마 위로 나뭇잎이 떠올랐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 사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 때 드레드가 입을 열었다.
“악마 추종자들은 손을 쓸 방법이 없지만, 악마에게 홀린 자들은 정령의 목소리를 통해서 되돌리게 할 수 있지. 잠깐만 기다려 보게.”
“아아아악!”
긴 비명을 내지르던 사내가 풀썩 쓰러지자 드레드가 그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았다. 진짜로 눈동자가 제 색을 되찾았다.
에드가 그 모습을 보고 칠채비도를 몸으로 되돌렸다. 악마에게 홀린 자여서 죽이려고 했더니 드레드 덕분에 살려주게 생겼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아쉽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곧 털어냈다.
네프사엘이라고 추정되는 적이 어디 있는지 파악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될 일이다.
같이 잡혀 왔던 이들이 인상을 굳힌 채 쓰러진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에드 일행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들. 달리아 왕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선 그들은 악마에 홀린 자의 말을 듣고 국경을 넘어왔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사로잡혔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저들이 자신들을 어찌 처분할지도.
에드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길 안내를 해줘야겠어.”
무기만 빼앗아 놓으면 저들이 도망칠 길은 없다. 목적지를 정했으니 이제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길 일은 없으리라.
달리아 왕국의 국경은 트라비아 왕국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정벌군이 북상하면서 국경에 병력을 배치해 두었던 것.
그래서 에드 일행은 어렵지 않게 그곳을 지나갈 수 있었다.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와 함께 하니 트라비아 왕국의 검문은 쉽게 지나갔다.
달리아 왕국군 열 명이 함께였지만, 의식을 되찾은 사내는 자신의 이름이 플렉이라는 것을 밝히고는 자진해서 안내하고 있었다.
전직 크로우였던 플렉은 악마에게 홀렸던 것이 풀리고 나서는 드레드를 믿고 따르고 있었다. 어째 가만두면 드루이드가 되겠다고 따라나설 정도로 열정적으로 드레드를 따랐다.
그리고 플렉을 따라나섰던 아홉 명의 달리아 왕국인들도 일행과 함께하면서 이들이 악마를 사냥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듣고는 자신들과 다른 대의를 쫓는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악마들과 함께해서 좋은 꼴 본 이들이 없다는 것을.
달리아 왕국군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악마를 죽여야 하고 그건 자신들이 아니라 이들이 대신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정벌군이 진행하는 방향이 아닌 달리아 왕국 서부로 향했다. 산지가 많은 곳이라 마차로 이동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에드 일행은 이곳에서도 짐 마차를 가득 싣고 다니면서 마을마다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아스트론 교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보급품을 전해줘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것을 해준 일행은 루마인 협곡으로 향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루마인 협곡. 그 협곡은 굽이굽이 굴곡진 협곡인 데다가 미로를 방불케 하는 곳이라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면 점령군이든 정벌군이든 그들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에드도 루마인 협곡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 그냥 이들을 두고 찾아갈 생각을 했었는데 그래서는 도저히 달리아 왕국군을 만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마인 협곡 안에 주둔하고 있다는 달리아 왕국군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의 심안이 뛰어나다고 하나 대자연의 웅장함 앞에서는 무력했으니까.
플렉과 일행을 살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따라가는 중에 아린이 물었다.
“그곳에서 몸을 숨기려고 하면 쉽지 않겠어요.”
군대는 강하다. 그리고 이들은 악마를 잡고 싶은 거지 인간 군대를 떼로 죽일 마음은 없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이 먼저 공격해온다면 응할 생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인간들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네프사엘이 인간들 뒤에 숨는 거다.
달리아 왕국군의 참모에다가 오는 동안 이야기를 들으니 군자금을 후원해주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런 인물의 뒷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받아들일 만큼 달리아 왕국군의 사정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인물을 잡으러 왔다고 한다면 순순히 내줄까?
무엇보다 달리아 왕국군을 만나기 전에 그들의 공격을 당했을 때 곤란해진다. 그것 때문에 플렉과 부하들을 인질로 삼은 것이기도 했지만, 일단 달리아 왕국군을 무사히 만나기를 바랐다.
“진짜 네프사엘이라면 아마도 왕국군을 먼저 보내서 우리를 공격하려 하겠죠.”
일행의 힘을 깎아 먹거나 아니면 일행 손에 달리아 왕국군이 죽거나 네프사엘이 악업을 쌓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형의 특성인지 협곡 위에 활을 든 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심안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달리아 왕국군이 왜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이들. 그들이 겨누는 화살을 보면서 아린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죠?”
협곡 위는 못해도 수십 미터에서 백 미터를 넘는 높이를 가진 곳이었다. 올라가고자 한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태반이 뛰어 올라갈 수 있는 높이의 협곡이었지만, 올라가는 중에 공격을 받는 것도 그렇고 테인도 위험하게 된다.
마차를 끄는 말도 위험할 상황.
에드가 익힌 스킬은 대부분 한 놈을 잡기 위한 것이지 이렇게 여럿을 상대하는 스킬이 아니었다.
그때 협곡 위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 중 한 사내가 나섰다. 활도 들고 있지 않은 자는 일행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플렉! 그들은 누구기에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거냐?”
플렉이 소리쳐 답하기도 전에 에드가 말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라 협곡을 달렸다. 수직으로 달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에드는 튀어나온 부분을 밟고 몇 번 솟구치는가 싶더니 단숨에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의 정면에 내려섰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드는 상대의 손목을 잡고 뒤로 돌아간 에드는 샐러맨더의 검을 뽑아 상대의 목에 겨누고는 말했다.
“근거지로 안내해주면 고맙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