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본체
라그록스가 나뭇가지에 오른 사이에 에드는 아린과 합류했다. 옆에 나란히 선 에드를 바라보며 아린이 물었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마력의 회복은 장비의 능력이다. 이건 이 안에서도 작용하기에 마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차오르고 있었다.
문제는 신성력을 다루는 이들이다. 이들은 신성력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
그들이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을 체화해서 근육 자체의 성능을 높인 것도 있지만, 그 힘을 끌어내는 데는 신성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성력이 유한한 이곳에서의 전투는 성기사들을 빠르게 지치게 한다. 그것을 알았기에 에드는 더욱 자신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상대는 대악마다. 악마의 시대 1처럼 대악마 하나가 엔딩과 직결된 곳이 아니다.
에드와 연관된 대악마만 해도 이미 네프사엘이 줄을 서고 있었다. 다른 대악마까지 상대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저놈은 자신이 잡는다.
대악마에게 쇄폭시를 쓰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시트라가 만들어준 화살을 부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그래서 에드가 활에 건 것은 아펠라의 이빨이다. 악마를 잡아먹는 마물의 이빨. 자신이 아끼던 무기 중 하나지만 대악마를 잡는 데는 얼마든지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라그록스가 나뭇가지 위에서 양팔을 벌리더니 말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나?”
잘 알고 있다. 이곳은 ‘격리’된 곳.
드레드가 대악마에게 넘어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에서 이길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드루이드가 아닌 이상 라그록스가 '격리' 안에서 가호를 받는 것은 무리다.
일행 중에 드루이드가 없으니 지금 남은 능력만으로 대악마를 잡아야 한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다.
에드의 시선이 제라드를 향했다.
“제라드. 저놈은 우리가 끌어낼 테니까 네가 저 나무를 베라.”
제라드가 에드의 말에 나무를 바라보았다. 두께가 장정 스무 명이 팔을 벌려도 감싸 안을까 말까 한 거대한 나무다. 그런 나무를 베라니?
“형. 진심이야?”
“진심이야. 저걸 베면 다시 신과 연결될 수 있어.”
신이 세계에 쉽게 개입하지 못한다고 해도 대악마와 싸우는 현장을 무시할 리는 없다. 그러니 나무를 베면 신들이 도울 터.
아스트론도 시트라도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충분히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에드는 그리 말하고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느껴지는 거죠?”
에드의 물음에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이 마기를 이용하는 거라서 느낄 수 있어요. 다만 막아내는 것은 가능해도 흘려내는 것은 힘들어요.”
“이제 괜찮을 겁니다. 먼저 공격하죠.”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라그록스를 향해 해머를 집어 던졌다.
라그록스를 향해 날아가던 해머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맞아 튕겨 날아가는 것을 보니 라그록스의 능력이 대충 짐작이 갔다. 문제는 저 공격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에드의 거리를 보는 능력도 통하지 않는다.
저번에 만난 지옥의 문을 비집고 나오던 대악마의 능력은 피할 수 없는 공격이더니 이번 능력은 심안은 물론이고 거리를 보는 능력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대악마 정도 되니 이렇게 까다로운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동안 에드도 성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공격에 전조도 없었지만, 몸을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저번처럼 아린의 뒤에서 싸운다.
그렇게 아린을 선두로 해서 일행이 쐐기처럼 진형을 짜고 달리던 중에 에드는 라그록스가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본 순간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공격인데 과연 전면에서만 막으면 되는 걸까?
아린은 옆에서 달리는 덱스를 어깨로 밀고는 그 반동으로 옆으로 물러났다.
콰카칵!
예상대로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덱스가 조각날 뻔했다.
에드는 몸을 구르면서 화살을 날렸다. 견제가 없으니 놈이 마음대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지금까지 전면만 방어하면 되는 것처럼 보여주더니 지금은 그 허를 찔러 공격했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면 덱스를 잃을 뻔했다.
덱스는 바닥에 난 고랑을 보고는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을 보니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보였다.
덱스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전투 예측도 통하지 않는다. 저놈의 공격은 어떤 방법으로도 볼 수 없다. 성기사들만이 마기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는데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어찌나 빠르고 강력한지 막는 것이 전부인 상황이다.
에드는 걸어두었던 화살을 거두고 한철 화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에드가 작정하고 쏟아내는 연사는 거의 줄지어 날아간다. 스치기만 해도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은 알기에 라그록스도 그 공격을 마냥 무시하지는 못했다.
날아들던 화살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튕겨 나가는 사이에 아린이 라그록스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콰앙!
아린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아래로 내리며 몸을 낮췄지만, 라그록스의 이번 공격은 밑에서부터 위로 후려친 것이라 몸이 뜨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노리스가 뛰어올라 잡아주는 사이에 론멜이 튀어 나갔다. 에드도 론멜의 뒤편에서 화살을 쏘아 보냈다.
에드의 화살은 견제용이었다. 스킬 없이 오직 연사로만 쏜 화살이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신성력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활 자체가 아스트론의 축복으로 강화되어서 모든 화살에 신성력이 담겨 있으니 라그록스도 무시하지 못했다.
라그록스가 화살을 쳐내는 사이에 바싹 거리를 좁힌 것은 론멜이었다.
론멜은 괴물을 베어내면서 검의 위력을 한층 높였다. 덕분에 그의 움직임은 쾌속했다. 돌진하는 속도만 놓고 본다면 에드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
라그록스는 코앞에 다가온 론멜이 휘두르는 검을 보고 처음으로 손을 움직였다.
카앙!
검과 팔이 부딪쳤는데 어떻게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걸까?
론멜은 첫 공격이 막히는 순간 그 반동을 이용해 2격을 넣고 있었고, 그런 론멜의 뒤편으로 덱스가 나타나 반대쪽으로 돌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둘의 합공에 이어 에드의 화살까지 끼어드니 라그록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벌레라고 여겼던 존재들의 합공에 자신이 몰리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던 것.
동시에 밀려오는 공격에 라그록스가 오히려 앞으로 마주쳐 나오며 손을 들어 론멜의 검을 잡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지던 론멜의 검이 맥없이 잡히는 모습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유물인 검을 맨손으로 잡아내는 패기를 보인 라그록스는 덱스가 휘두른 도를 발로 짓밟았다. 에드는 화살을 날리던 것을 멈추고 론멜을 발로 걷어찼다.
바닥에 내려선 노리스가 아린을 내려놓을 틈도 없다는 듯 발을 뻗었다. 노리스가 덱스를 밀어내니 그들이 있던 곳에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바닥이 갈라지는 틈에 에드는 지척에서 라그록스와 눈이 마주쳤다. 라그록스의 짜증이 가득 섞인 얼굴을 보며 에드는 아펠라의 이빨을 시위에 걸면서 칠채비도를 일제히 날렸다.
일곱 자루 비도가 떠오르는 모습에 라그록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잔재주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몸에서 튀어오른 칠채비도가 라그록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라그록스는 귀찮다는 듯 칠채비도를 무시한 채 손을 뻗어 에드의 목을 틀어쥐려 했다.
에드는 그 손바닥을 향해 아펠라의 이빨을 쐈고, 뒤편에서 아린이 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이 쭈욱 늘어나는 인식 속에서 에드가 쏘아낸 아펠라의 이빨이 라그록스의 손바닥에 박혔다. 게다가 칠채비도가 일제히 라그록스의 팔뚝에 박혔다. 늘어진 시간 속에서 에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느꼈다.
에드는 쇄폭시를 사용하면서 그대로 백스텝을 밟고 물러나려 했지만, 몸을 빼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늘어진 시간 속에서는 에드 또한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탓이었다.
아찔한 순간에 에드는 날아오는 검을 보았다. 아린이 던진 성검이 날아와 보이지 않는 손에 꽂혔다.
그렇게 날아든 성검에서 터져 나온 신성 보호막에 에드를 감쌌을 때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날아들었다. 신성 보호막으로 감싸고 있었더니 그 채로 던져 버렸다.
쾅!
성검이 손바닥에서 뽑혀 나왔고, 그렇게 튕겨 날아간 에드는 나뭇가지에 부딪힌 후에 다시 떨어져 내렸다. 에드는 그렇게 날아갔다가 떨어져 내려서는 라그록스를 바라보았다.
“끄아아아!”
라그록스는 섬뜩한 눈빛으로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칠채비도가 박혔고, 쇄폭시까지 터진 에드의 공격은 대악마에게도 통했다.
라그록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콰콰쾅!
라그록스의 전면에서 가공할 돌풍이 일었다. 이번에는 본능적으로 느껴진 것이 있어 다들 무기를 들어서 막았다. 단 한 명만 빼고.
모조리 튕겨 날아갈 때 덱스는 이번에 뭐가 보였는지 몸을 비스듬히 뛰어오르며 그 돌풍을 피하고는 그 사이로 고통의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라그록스의 넝마가 되었던 팔에 레이피어가 박히자 덱스는 죽어라, 몸을 굴렀다.
콰칵!
빠르게 몸을 피했지만, 라그록스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덱스의 옆구리가 길게 베이며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라그록스는 덱스를 공격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덱스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틀면서 그 와중에 라그록스의 손목을 베었다.
라그록스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보통 물건으로는 자신의 몸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건 성유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넝마가 된 팔 때문에 몸에 두르고 있던 마력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덱스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다.
마검에 찔린 상처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라그록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일상인 지옥에서 올라오기 전 과거를 추억하게 했다.
“하. 재미있네?”
이 안에서 저들을 상대로 압승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공격을 어떻게 피해내고 막아내는지 모르겠지만, 제법 버티는 것을 보니 자신도 전력을 다해야 하려나 보다.
라그록스의 등 뒤로 마기로 이뤄진 여섯 개의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연결된 날개와 같이도 보였다.
그리고 라그록스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인간의 형상을 벗은 그는 넝마가 된 왼팔을 스스로 뽑아냈다. 마력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고통을 전해주는 팔이 남아 있어 봐야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뽑아낸 팔의 자리로 새로운 팔이 튀어나왔다.
라그록스는 눈에 보인다고 해도 자신의 공격을 쉬이 막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기의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은 숨기는데 쓰는 마력조차 아끼기 위한 것.
어차피 라그록스의 공격은 막기도 어려웠고, 막아도 크게 튕겨 나갔다.
현실에서 본체를 드러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신들의 표적이 되어 그들의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밀려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격리’된 곳.
이곳에서는 본체를 드러낼 수 있다.
본체를 드러낸 라그록스는 전과는 수준이 달랐다. 에드도 게임상에서 보던 것과 현실에서 본 대악마의 본체가 다름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가히 압도적인 격과 강력한 공격.
라그록스는 다른 이들을 물러나게 한 후에 덱스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옆구리를 다친 덱스가 검과 도를 들어 막았지만, 라그록스의 공격 앞에서 검과 도가 박살 났다.
덱스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