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소년
에드는 엠버의 뒤에 몰려있는 군대를 보았다. 그 수가 못해도 일만은 되어 보였다.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에드는 엠버와 함께 말머리를 같이하며 말을 몰고 있었다. 일행은 멈춰선 군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일만에 달하는 군대와 그 맞은편에 있는 일행.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다르게 저 둘이 붙는다면 일만의 군대도 일행을 잡을 수는 없으리라. 모두 죽이는 것은 지치고 불필요한 일이라 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몸 하나 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이들이니까.
에드는 만약의 경우에도 위험할 일이 없음을 깨닫고는 편안히 엠버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엠버가 말을 멈춘 곳은 평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였다.
일만의 군대와 그 옆에서 마주하고 있는 일행의 전력을 비교한 에드는 시선을 돌려 엠버를 바라보았다. 엠버는 그 시선에 입을 열었다.
“왕도에서 형님이 나를 부르고 있네.”
“들었습니다.”
엠버는 자신의 군대에 시선을 준 채 말했다.
“형님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 나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을 거야.”
저들의 형제애가 어떨지 모르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옆에 있어 줄 뿐.
엠버는 쓴웃음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형님을 탓할 수는 없지.”
엠버의 시선이 에드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갑작스러웠어. 악마와 연관되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돌아가실 분은 아니었으니까.”
엠버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를 이해시켜다오. 아버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를.”
에드는 엠버의 눈에 깃든 갈등을 읽었다. 왕국 서열 2위로 올라선 그는 순순히 라르스에게 당해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났다. 그 길이 피의 길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한 각오를 했다는 것.
그런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묻는 것은 라르스가 아버지와의 죽음과 연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일까?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해 확신하고 싶어서?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라르스 전하는 상관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악마와 관련된 일입니다.”
에드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대로. 다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말해줘야 한다면 결국 악마를 죽인 것도 자신임을 알려줘야 하니까.
에드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엠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엠버는 에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
“형님은 상관없는 일이었나 보군.”
“예.”
엠버는 자신의 군대를 두 눈에 담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타룬 산맥으로 갈 생각이야. 그곳에 마물이 판친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그 마물들을 모조리 죽이고, 왕궁으로 갈 거다.”
이만한 군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향한다면 라르스가 순순히 그의 입궁을 받아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만한 공을 세우고 명성을 얻은 후에 왕궁으로 향한다면 라르스도 그를 죽일 명분이 사라진다.
만약 선왕의 죽음이 라르스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엠버는 타룬 산맥으로 가지 않고 3군단과 4군단의 병력을 모아 왕궁으로 진격했을 터.
하지만 선왕의 죽음과 연관이 없다는 확답을 받고 나니 공을 세우고 당당히 궁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은 것이리라.
엠버는 에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는 경로를 보니 떠나는 것 같군. 트라비아 왕국으로 가는 건가?”
“예. 다음 악마는 트라비아 왕국에 나타나서요.”
엠버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대들 덕분에 왕국이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지옥의 문을 막은 것도 그렇고, 악마들을 죽여준 것도 그렇고.”
엠버는 에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의 화살은 오직 악마를 향하는가?”
“예. 악마나 악마에 홀린 자를 향하죠.”
에드의 대답을 들은 엠버는 자신의 목을 만지며 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악마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되겠군.”
“악마의 꾐에 넘어가는 자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엠버 왕제님께서는 확신이 있으시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엠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에드는 그런 엠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쓰는 것도 주의하십시오.”
“그리하겠다.”
엠버의 확답을 들은 에드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떠나도 되겠습니까?”
엠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도 좋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해다오.”
엠버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언제든, 무슨 일이든 있다면 나를 찾아와라.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
마젤타 왕국 서열 2위. 현 국왕의 동생인 왕제 엠버의 말에 에드는 미소로 답했다.
“악마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믿음직하군.”
엠버는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군대를 향해 말을 달리며 말했다.
“악마 사냥이 끝나도 한 번 들러라! 그때는 좋은 술을 대접할 테니.”
엠버가 군대를 이끌고 왔기에 혹시 다른 마음을 품었나 걱정했는데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현 국왕이 그 자리에 자격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리라.
선왕의 죽음을 자신이 내린 것은 절대로 비밀로 해야겠다. 형제에게도 칼을 드는데 괜히 자신의 손에 죽은 것을 안다면 그때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엠버가 도착하고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떠나는 것을 본 에드는 일행에게 돌아갔다.
“저 군대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타룬 산맥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지옥의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마물들을 사냥할 거라고 하더군요.”
에드의 시선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움직이는 군대를 향했다.
“그리고 왕궁으로 향한다고 했습니다.”
에드의 말을 들은 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군.”
만약 내란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악업이 피어났을 것인가?
에드는 그걸 막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우리도 이제 가볼까요?”
마젤타 왕국에서의 모든 일이 끝난 기분이다. 제법 긴 시간 왕국을 여행하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 함께 트라비아 왕국으로 돌아간다.
대악마들을 사냥하러.
마젤타 왕국의 국경을 넘어 선 에드는 새까맣게 탄 숲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젤타 왕국군을 화공으로 죽였다고 하더니 끔찍하네요.”
숲에 나는 불은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다. 까맣게 타서 죽어버린 숲을 보니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린은 그런 숲을 보고는 말을 타고 가면서 기도를 읊었다. 자신의 몸에 깃든 신성력을 체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곳에서 죽은 이들의 원혼들이 승천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는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하늘빛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만 본다면 성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녀의 신성력은 경이로웠다. 그들이 가는 길의 반경 100미터 정도는 신성력의 빛이 비쳤고, 주위가 정화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론멜이 입맛을 다셨다.
“나는 도움이 안 되니 아쉽군.”
시트라 교단의 신성력은 정화에 어울리지 않았다. 원혼이 나타난다면 그들을 죽여 소멸시키는 것이 그들이 하는 정화이니까.
아린이 정화를 하면서 이동했기에 일행의 이동 속도는 줄어들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동하던 일행은 밤이 깊어졌기에 야영지를 정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불에 타 죽어버린 숲의 어둠은 어쩐지 괴기스러운 것이 있어서 아린은 계속 기도를 올렸고, 일행은 저녁을 준비했는데 에드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저녁 준비를 도와주던 노리스도 인상을 굳힌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뭔가 있군요.”
심안이 아니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꺼림칙한 기운이다. 수많은 이가 죽은 숲에 뭐가 나타나도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이곳으로 오는 기운은 심상치 않은 면이 있었다.
“사령인 것 같은데···.”
사령인 것 같은데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에드도 활을 꺼내 들었다. 그런 에드의 앞을 노리스가 막아서며 말했다.
“이건 제게 맡기고 저녁 준비를 해주시죠.”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같이 가죠.”
“나도.”
덱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에드는 덱스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덱스가 가진 성유물들이라면 사령이라도 벨 수 있다. 가지고 있는 무기가 좋아진 데다가 브란트가 봉인한 후에 마음껏 대련하지 못해 쌓이는 것이 많았던 덱스에게는 좋은 기회다 싶었기에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저도 갈게요.”
수많은 원혼이 모여서 만들어낸 것 같은 기운이니 사령술을 익힌 디에고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다 가버리면 이곳을 지킬 이들이 얼마 없다.
아린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지만, 또 모르는 일이라 디에고에게는 이곳의 안전을 맡기기로 했다.
“네가 이곳을 아린과 함께 지켜줘.”
브란트도 이제는 지켜줘야 하는 존재이기에 디에고는 남기기로 했다.
에드와 노리스, 덱스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숲의 안쪽이었는데 그곳으로 다가가면서 에드는 바닥에 까맣게 타서 죽은 시체들을 보면서 인상을 굳혔다.
트라비아 왕국은 가장 손쉽게 적을 격멸할 방법을 택했다고 하지만 그 전장에는 끔찍함만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몸을 풀 수 있겠군.”
“조심해요.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
보이지 않는 적이라고 해도 적이라면 자신을 노릴 때 전투 예측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덱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에드를 따라 움직였다.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까맣게 타버린 나뭇가지 조각나 바닥을 비추고 있었는데 에드는 문득 주변에 타죽은 시체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시체들이 없는데요?”
노리스도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시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소이다.”
에드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자가 이곳에 나타난 걸까?
시체를 부리는 크로웰이 나타났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악마가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악업이 아니라고 해도 이곳에서 떠도는 원혼만 가지고도 여러 가지 일을 해낼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여기고 달려가던 중에 에드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시체들의 산이 보였다.
까맣게 탄 시체들이 한가득 쌓여 동산을 이루고 있는 곳.
그곳에 원혼들이 모여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은 넘어 보이는 원혼들이 떠도는 곳.
시체들의 동산 위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을 중심으로 수많은 원혼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에드는 인상을 굳힌 채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저 소년.
뭔가 위험해 보였다.
에드가 화살의 시위를 거는 사이에 노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소년을 향해 반장하며 입을 열었다.
“소시주는 누구시기에 원혼들을 모으고 있소?”
그 말에 소년이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흰자위만 남은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던 소년이 입가를 말아 올렸다.
“기다렸다. 에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