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총본회의 밤
론멜은 성녀를 따라 걸어가며 물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절 위협하는 이들에게서 저를 지켜주면 돼요.”
리베라의 말에 론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성녀를 위협하는 이가 있다?
“총본회 안에서 말입니까?”
“예. 그러니 부탁해요.”
론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누구도 저를 넘기 전에 성녀님을 해할 수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론멜은 성녀 리베라에게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시트라 교단의 총본회에 있는 이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는 리베라는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와 함께 걸으며 그녀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론멜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총본회로 다가가니 성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론멜에게는 까마득한 선배들.
론멜이 고개를 숙이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베라를 바라보았다.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시면 어떻게 합니까?”
성기사단의 서열 2위인 베논이 다가오면서 하는 말에 리베라는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몸에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베논도 흠칫 놀랄 정도로 기세를 일으킨 리베라가 입을 열었다.
“프레디 추기경을 만나러 가겠어요.”
베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밤이 늦었습니다. 거처로 가시죠.”
리베라는 미미하게 인상을 굳힌 채 같은 말을 했다.
“프레디 추기경을 만나러 가겠어요. 안내해줄 것이 아니라면 비켜요.”
“성녀님.”
리베라의 뒤에 서 있던 론멜은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성녀는 그들에게 있어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 그녀의 말에 이리 토를 단다?
그녀는 마스터 팔라딘보다도 교내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저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베논이 위협적으로 나서자 리베라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론멜 경. 길을 열어주세요.”
론멜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부단장님. 비켜주시죠. 성녀님의 뜻입니다.”
“론멜. 물러나라.”
베논이 인상을 굳힌 채 무기를 잡는 것을 보고 론멜도 성검의 그립을 틀어쥐었다.
“부단장님. 성녀님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비켜주십시오.”
“마스터 팔라딘의 뜻이다.”
“말했지만, 성녀님의 명령이 더 우선입니다.”
“이 새끼가!”
베논이 이를 뿌득 갈면서 무기를 뽑는 것을 보고 론멜도 성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베논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켜주십시오. 부단장님!”
“안 비키면 벤다.”
론멜은 베논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베논이었다. 하지만 론멜은 총본회에서 나와 에드 일행과 함께하면서 상상도 못 할 전장을 헤쳐 나왔다.
저들 중 중급 악마와 싸워본 이들이 있을까?
상급 악마는 물론이고 대악마의 손가락까지 잘랐던 만큼 베논의 눈빛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론멜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성녀님. 그럼 길을 열겠습니다.”
론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베논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손짓했다. 그러자 베논과 함께 있던 성기사가 튀어나갔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지며 휘두르는 검에는 살의가 없다.
론멜은 그 검격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작 이런 수준이었던 건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덱스와 대련하며 깨졌고, 브란트와의 대련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련에서 이기기 위해서 에드의 조언대로 수많은 기도로 보낸 시간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카앙!
특히나 지옥의 문을 닫으면서 셀 수도 없는 사선을 거쳐온 론멜의 검은 저들과 다르다.
단번에 검을 튕겨내고 어깨로 선배의 명치를 들이받았다.
콰직!
흉갑이 우그러지며 튕겨 날아간 선배가 바닥을 굴렀다. 론멜은 베논을 향해 튀어나갔다. 베논이 그 모습에 검을 찔러왔다.
이번 검은 살의를 담은 검. 확실히 조금 전의 성기사보다는 날카롭고 위협적이었지만, 론멜은 오히려 마주쳐가며 고개를 트는 것만으로도 검을 피했다.
베논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그대로 그의 코를 향해서 머리를 들이 박았다.
빠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뻗어버린 베논을 내려다보며 론멜은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리베라를 돌아보았다.
“누가 막더라도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가시죠.”
론멜이 총본회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리베라는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잘했다고 여겼다. 에드가 충격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와 함께한 론멜마저 이리도 강할 줄은 몰랐다.
총본회 내에서 그를 따라 걸으며 리베라는 결심을 굳혔다. 교황의 뜻을 따라 시트라 교단을 마음대로 움직이던 이들을 단죄하고 제대로 그 뜻을 세우겠다고.
사실 조금 걱정했는데 론멜이 성기사와 싸우는 것을 보고 에드는 걱정을 덜었다. 론멜은 생각보다 강했고, 시트라 교단의 성기사들은 볼 것도 없었다.
하긴 마스터 팔라딘만 봐도 신성력은 론멜에게 비교가 되지 않았고, 노련해 보여서 약간 걱정이 됐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만 걱정이라면 론멜이 손속에 사정을 둔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동문에 같은 교단의 인물들이라 죽이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이 오히려 론멜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저들이 언제까지 저렇게 한 명씩 그를 상대하겠는가?
에드는 자신의 기척을 죽인 채 그들을 따라서 은밀하게 걸음을 옮겼다.
리베라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교황이 자리를 비운 이상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리베라.
교황이 있었다면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막겠지만, 일반 사제들은 그녀를 막을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아마도 윗대가리들만 썩은 것으로 보이니 그녀의 계획은 성공할 수도 있으리라.
리베라가 찾아간 것은 온건파의 수장 격인 프레디 추기경의 거처였다. 리베라를 가장 지지해주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이.
어차피 성녀인 그녀는 교황의 위에 오를 수 없으니 그를 추대하는 것이 옳으리라. 리베라가 프레디의 거처로 가던 중에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다.
마스터 팔라딘 블레이크와 그의 뒤로 늘어선 이들은 총본회에 남아있던 성기사 셋이었다.
모두 네 명.
블레이크는 그들의 앞을 막아선 채 입을 열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프레디 추기경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비켜주십시오.”
론멜이 리베라를 대신해 하는 말에 블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베논과 성기사 한 명을 더 보냈는데 어떻게 저들이 이곳까지 들어온 걸까?
블레이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론멜의 뒤에 선 리베라를 바라보았다.
프레디 추기경은 지금은 거의 실각한 추기경이었다. 교황 밀로토의 반대파 수장인 그를 만나러 가는 이유가 뭘까?
교황 밀로토가 그림자와 함께 태자 라르스를 죽이러 간 뒤다. 라르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그들이 원하는 이를 국왕에 올리기만 한다면 그때는 시트라 교단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교황 밀로토가 없는 지금 리베라가 이렇게까지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설마 밀로토가 없는 사이에 프레디 추기경을 교황으로 추대라도 하려는 건가? 하지만 밀로토가 돌아오면 다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녀의 앞을 막는 이유는 만약을 위해서였다.
“물러나라. 론멜.”
론멜은 그 말에 인상을 굳힌 채 성검을 들어 올렸다.
“마스터 팔라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블레이크는 론멜이 저리 말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성기사 만년 꼴찌였던 론멜이 이 정도로 겁 없이 구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큰소리를 내는 것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도.
“론멜. 뭣도 모르는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물러나라.”
“그럼 제가 알아듣게 설명해 보시죠. 어째서 위계가 더 높은 성녀님의 앞을 막고 계신 건지 말입니다.”
블레이크는 이를 뿌득 갈았지만, 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다른 성기사 셋이 건방지게 떠들고 있는 론멜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론멜. 미쳤냐?”
론멜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선배 성기사들을 보고는 검을 겨눴다.
“선배. 전 지금 성녀님의 명으로 호위를 서는 중입니다. 물러나십시오.”
말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동시에 론멜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 사이로 론멜이 파고들었고, 그 공격들을 지나친 론멜은 폼멜로 선배들의 턱과 관자놀이를 쳤다.
마지막 한 명은 무릎을 측면에서 걷어차 부숴버리고는 뛰어오르면서 무릎으로 턱을 올려쳤다.
아무리 선배들이라고 해도 저들은 선을 넘었다. 성녀에게 무력을 행사한 순간 성기사로서의 자격이 없어진 셈이니까.
론멜은 그렇게 성기사들을 쓰러트리고는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마스터 팔라딘.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물러나십시오.”
블레이크는 론멜의 움직임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아보았다. 확실히 옛날의 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출중한 실력.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실력을 믿고 자신의 앞을 막는 저 무모함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건방지구나.”
더는 긴말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블레이크가 론멜을 향해 달려들었다. 블레이크가 들고 있는 쌍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론멜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론멜은 자신을 몰아쳐 오는 쌍검을 받아내면서 확실히 블레이크의 실력이 뛰어남을 알았다. 하지만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다.
블레이크보다 더 강한 악마들과 싸웠고, 그보다 훨씬 변칙적인 덱스와 한방이 묵직한 브란트까지.
그들과 수많은 대련으로 다듬어졌기에 블레이크의 연환검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공격을 차분하게 받아내는 모습에 블레이크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이만큼이나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성기사들을 제압하던 것도 실력을 다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블레이크도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블레이크가 자신의 갑옷에 있는 권능을 일으켰다. 성기사 중 막내였던 론멜에게 준 성유물은 상대를 베어서 그 힘을 빼앗는 성유물이다.
즉 베이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가장 쓸모가 떨어지는 성유물.
하지만 블레이크가 가진 갑옷은 다르다. 그 갑옷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힘을 끌어내 준다. 그렇게 끌어낸 힘으로 신체 반응 속도를 높인 블레이크의 연환검이 점점 더 빨라졌다.
카칵! 캉!
론멜은 블레이크의 연환검에 조금씩 상처를 입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죽일 듯이 쌍검을 휘두르는 블레이크는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이였다.
성녀가 자신에게 우상이었다면 마스터 팔라딘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자신에게 살의 가득한 눈빛으로 쌍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검에 담긴 살의에 상처를 입으면서 론멜은 그 상처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그리고 조금씩 잃어가던 존경심이 바닥을 보였을 때 론멜의 검이 부드럽게 기울어지며 연환검의 검로를 틀어서 서로 부딪치게 한 후에 지나가면서 옆구리를 길게 베었다.
스칵!
블레이크는 자신의 갑옷이 그대로 잘려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 갑옷의 성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이.
성유물에도 등급이 있고, 가장 밑바닥인 성검에게 자신의 갑옷이 베일 리는 없었으니까.
“커헉!”
옆구리가 베인 순간 마력이 확 빠져나갔다. 예전에 알던 성검이 아니다. 휘청이며 바닥에 검을 짚은 블레이크의 목에 성검을 겨눈 론멜이 입을 열었다.
“마스터 팔라딘. 당신의 죄는 이 밤이 끝나고 묻겠습니다.”
블레이크는 심각한 탈력감에 검을 놓쳤다. 고개 숙인 채 검을 놓친 그를 보니 언제나 성기사들 앞에서 당당하던 그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론멜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리베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리베라는 무너진 블레이크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오늘 밤이 가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오싹한 느낌에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론멜의 뒤로 블레이크가 뛰어오르고 있었다. 살의 가득한 눈빛에 검을 내리치는 그 모습에 놀란 그녀가 소리치기 전에 론멜이 뒤돌아서고 있었다.
론멜의 검이 블레이크의 검을 막아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늦을 것 같았다. 그만큼 블레이크의 움직임은 갑작스러웠고, 폭발적이었다.
그때 마법처럼 블레이크의 미간을 뚫고 나오는 화살촉이 보였다. 휘두르던 검이 힘을 잃었고, 론멜이 검을 튕겨낼 수 있었다. 바닥에 줄 끊어진 인형처럼 형편없이 뒹구는 블레이크를 바라보는 론멜은 고개를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론멜은 다시 시선을 돌려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론멜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뜨고는 리베라를 돌아보았다.
“서두르시죠.”
리베라는 론멜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프레디 추기경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