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버림받다
에드는 멀뚱히 성녀 리베라를 바라보았다. 성녀에 대해서 별로 좋은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다시 찾아온 걸까?
“우리가 막 돕고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까?”
에드가 던진 물음에 리베라는 잠시 고민했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이곳밖에 없었기에 찾아왔다. 이들이라면 도움이 될 거라 여겼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리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마음에 도움을 청할 곳이 이곳밖에 없어서 무작정 달려왔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알았다.
“알겠어요.”
그녀가 지붕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 에드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리베라가 멈춰섰다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에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론멜 경을 찾아가는 겁니까?”
“도움을 받을 사람이 그밖에 없으니까요.”
이 민폐 아가씨 보소?
에드는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론멜은 성녀의 말이라면 분명 앞뒤 안 보고 도우려고 할 터였다. 그리고 그가 나선다면 결국 일행 모두가 나서야만 된다.
괜히 그래서는 귀찮아지기만 한다. 그래서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에드의 물음에 성녀 리베라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교황 성하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걸 막아주세요.”
에드는 이건 무슨 소린가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국 서열 2위인 라르스 태자 저하는 시트라 교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 보이더군요.”
시트라 교단의 성기사인 론멜은 어디 가서도 찬밥 대우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라르스는 처음 그들을 찾아왔을 때 론멜의 인사도 받지 않고, 거의 없는 인간 취급했었다.
그게 아마도 시트라 교단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번에 국왕의 죽음에 악마가 연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시트라 교단의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교황 성하는 그걸 알고는 직접 움직이셨어요.”
에드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태자를 암살하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리베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시트라 교단의 교황이라고 해도 왕궁에 있는 태자를 죽일 수는 없을 겁니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리베라는 입술을 깨물고는 말을 이었다.
“교황 성하의 여동생이 전대 왕비였습니다.”
에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왕궁의 비밀 통로는 왕족만이 알 수 있을 터. 그 말은 교황의 여동생이 전대 왕비였다면 그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설마 교황이 직접 움직였다는 겁니까?”
“예.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해요.”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태자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직접 움직였을 정도라면 말로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막지 못하면 그때는 시트라 교단 자체가 위험해요.”
리베라라고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암살이 성공한다면 교단은 다음 왕을 추대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하게 되면 교단 탄압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때는 얼마나 많은 교인의 피가 흐를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막아야 해요. 도와주세요.”
에드는 가만히 리베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태자에게 걸리지 않고 교황 성하를 막아야 합니다.”
그게 가장 좋은 길이기는 하지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일행에게 알린다면 분명 그들이 함께하고자 할 테지만 그러면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은밀히 진행해야 하니 조용히 움직여야만 했다.
에드의 시선이 노리스를 향했다. 일행 중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신과 노리스다. 디에고도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많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노리스는 에드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인 것 같으니 돕도록 하죠.”
에드는 리베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왕궁에서 걸리지 않고 그들을 막으려면 우리도 그 비밀 통로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압니다. 따라오세요.”
먼저 앞장서 달려가는 리베라의 뒤를 따라 에드와 노리스가 움직였다.
리베라와 함께 도착한 곳은 왕도의 서쪽이었다. 왕궁이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로 먼 곳. 그곳에 도착한 리베라가 작은 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트라 교단의 작은 사원. 하지만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인지 그 안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에드는 먼지가 가득한 사원의 바닥에 발자국을 보았다.
발자국이 제법 많았다.
“몇 명이나 움직인 겁니까?”
리베라는 그 물음에 주위를 살피며 답했다.
“교황 성하 휘하의 그림자들이 움직였습니다.”
“그림자들이라면?”
“교황 성하가 비밀리에 키운 이들로, 그 실력은 알려진 바 없습니다. 그들의 수가 대략 열 명 내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작 열 명을 데리고 교황이 직접 움직였다. 교황이 간이 큰 건지 아니면 그 열 명의 실력을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곳이 입구라는 것만 알지 어디가 입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 말에 에드가 눈을 감고 심안을 펼쳐 보았다. 곧 안쪽 기도실 아래쪽으로 길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입구를 열 방법이 없을 뿐.
에드가 노리스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바닥을 힘차게 밟았다.
쿠릉!
새삼 노리스의 저 진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왕도의 비상 통로 입구를 강제로 부숴서 열어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리베라는 에드와 노리스를 돌아보았다.
단번에 입구를 찾는 것도 놀라웠지만, 거침없이 그 입구를 부숴내는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에드가 가장 먼저 지하 비밀 통로로 내려가서는 심안을 펼쳤다. 비밀 통로는 길게 이어져 있었고, 심안에 잡히는 이는 없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이 비밀 통로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왕궁 안으로 교황 밀로토가 들어서서 발각되면 이미 이번 일은 실패다.
에드가 그리 말하고는 먼저 튀어나갔다. 기왕 돕기로 한 것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다.
에드가 먼저 달려가자 그의 뒤를 따라서 노리스가 움직였고, 둘이 달리는 것을 본 리베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트라의 신성 마법은 회복에 관련된 것이 없는 만큼 대부분 신성 마법은 개인의 몸을 강화해준다. 그래서 시트라의 성녀인 그녀는 신성력으로 몸을 가볍게 하고 그 둘의 뒤를 쫓아 달려보지만, 어째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멀어지던 거리를 유지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에드는 심안으로 비밀 통로를 확인한 채 달리면서 뒤를 쫓아오는 리베라의 움직임을 보았다. 아린도 쫓아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 자신과 노리스의 움직임을 쫓아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찜쪄먹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에드는 지하 비밀 통로를 따라 한참을 달린 끝에 심안의 끝자락에 잡히는 이들을 읽었다. 그들을 파악한 순간 에드가 속도를 높였다.
노리스도 따라오며 속도를 높였지만, 리베라는 뒤처지기 시작했다.
에드는 그녀를 굳이 기다리지 않고 달려가면서 화살을 뽑아서 시위에 걸었다.
에드가 날린 화살이 복도를 따라 날아갔다.
“컥!”
저 멀리 달려가던 이들 중 하나가 어깨에 화살을 맞고 신음을 흘린 덕분에 비밀 통로를 달려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멈췄기에 에드와 노리스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열 명의 그림자라고 하는 이들. 그들의 면면을 살핀 에드는 감탄했다.
시트라의 신성력이 자신의 몸을 강화하거나 아니면 상대를 파괴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론멜과 함께 하면서 알고 있었다. 저들도 그런 상태였는데 그런 그들이 하나둘 빼어 드는 무기를 보니 성기사가 쓰기에는 어려운 형태의 성유물들이었다.
유물급 장비도 아니고 성유물을 들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 서 있는 것은 교황 밀로토였다. 로브를 두르고 있던 그는 에드와 노리스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이들이군. 여기는 무슨 일인가?”
대답은 에드가 할 필요가 없었다. 에드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자 뒤늦게 도착한 리베라가 숨을 고르며 밀로토를 바라보았다.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성녀?”
밀로토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성하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이런 짓을 시트라께서 용인해주실 거라고 보십니까?”
“당연하다!”
밀로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마젤타 왕국의 국교의 위치가 위태로운 지금. 그걸 막는 일은 당연히 시트라께서도 기뻐하실 일이다!”
에드는 밀로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광신도나 다름없는 얘기다.
신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과연 신들이 그런 것을 바랄까? 그저 자신이 가진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교황이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암살에 나선 일이다.
에드는 지금 밀로토는 대화가 통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패한다면 탄압이 시작될 겁니다!”
“흥! 실패할 일은 없을 거다.”
에드는 그 말에 밀로토의 곁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교단의 더러운 일을 하기 위해서 키워진 그들은 암살에 특화된 이들로 보였다. 게다가 성유물까지 들고 있는 그들이라면 분명 까다로운 상대이기는 하지만 라르스의 곁을 지키고 있던 거구의 수호 기사를 떠올려 보면 저들로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라르스도 보통 인물은 아니니.
에드는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며 말했다.
“리베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든 막아야죠.”
에드는 고개를 돌려 밀로토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밀로토의 시선이 노리스를 향했다.
“호법승. 이 일에 나설 생각이오?”
노리스가 입을 열기 전에 에드가 그를 막아섰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물러나세요.”
“시주.”
“쌍룡사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사실 노리스에게 함께 가자고 한 것은 입구를 찾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인 것이 크다. 저들을 만난 이상은 굳이 그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노리스는 에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쌍룡사는 이번 일에 나서지 않겠소.”
밀로토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죽여서라도 입을 막으려고 했는데 호법승은 그의 실력보다도 쌍룡사라는 이름이 껄끄러웠다.
그가 스스로 물러났으니 이제 남은 이들을 정리하면 된다.
아스트론 교단의 예언에 따른 퇴마행을 함께 하는 악마 사냥꾼이라고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곳은 마젤타 왕국이고, 라르스 암살이 성공한다면 아스트론 교단의 성기사를 죽인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테니.
“성녀는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저 악마 사냥꾼은 죽여라.”
밀로토가 그리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시트라의 증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증표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그림자들에게 스며들자 그들의 몸에서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에드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활을 들어 올렸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순간 악마나 다를 바 없기는 해.”
에드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연달아 날아가는 열 발의 화살.
암살자들 중 몇은 피했고, 몇은 무기를 들어 막았다.
에드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그리 쉬워 보였나?
동시에 부릴 수 있는 이기어시는 최대 일곱 개. 하지만 순차적으로 이기어시를 펼친다면 그 수는 열 개까지도 가능하다.
처음 화살을 맞았던 그림자도 화살대를 꺾고 달려오는 중이었는데 화살들이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차례대로 방향을 틀었다.
달려들던 그림자들은 에드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모조리 바닥에 쓰러졌다.
손을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손을 쓴다면 주저하지 않는다.
밀로토는 자신이 믿었던 그림자들이 모두 쓰러진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들은 성기사보다도 유용할 거라 여겼는데 성유물을 써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당했다.
이런 경우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에드는 그가 당황하는 사이에 벌써 그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웃기지···아악!”
반투명한 검은색 신성 보호막이 자동으로 발동되었지만, 화살이 그대로 그의 어깨에 박혔다. 어깨 전체가 얼어붙자 비명을 내지르는 밀로토를 바라보던 에드가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려 악에 받친 눈빛으로 쏘아보는 밀로토에게 말했다.
“시트라님이 천벌이라도 내릴 줄 알았더니 잠잠하네?”
“감히!”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밀로토가 일어나며 시트라의 증표를 에드에게 겨눴다. 에드가 순간적으로 몸을 빼내려고 하는데 시트라의 증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밀로토가 당황해하며 신성력을 일으켜보지만, 그의 몸에서는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에드는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미간에 화살을 한 발 박아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