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송별회
천천히 눈을 뜬 브란트는 마치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이상하게 머리는 전에 없이 맑았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잠잠할 때도 항상 꺼림칙하게 느껴지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브란트가 몸을 일으키니 날이 밝았는데도 일행이 어제의 야영지에 모여 있었다. 브란트는 자신의 옆에 누워서 잠이 든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에드를 바라보았다.
“왜 출발 안 한 거야?”
“몸은 좀 어떠세요?”
브란트는 팔을 휙휙 돌려보려다가 멈칫했다. 사슬을 감고 있는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음. 머리는 맑은 데 몸은 예전 같지 않아. 몸이 무거워.”
에드는 브란트의 가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섶을 열어보세요.”
브란트가 옷의 앞섶을 열어보더니 인상을 굳혔다.
“이게 뭐야?”
브란트의 가슴 중앙에 엄지손톱만 한 붉은 점과 다섯 개의 선이 나선형으로 그 점으로 모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에드는 당황한 브란트에게 말했다.
“형님의 몸 안에 깃든 힘을 노리스가 봉인해 줬습니다.”
“봉인?”
“예. 그 힘을 쓰지 못해서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걸 겁니다. 머리가 맑아진 것을 보면 확실히 봉인이 되었나 보네요.”
브란트가 인상을 미미하게 굳혔다.
“그걸 왜 말도 없이···.”
“엠마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브란트는 그 말에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엠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긴 자신이라고 해도 엠마가 그렇게 고통받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해달라고 할 터였다.
브란트는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래서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
브란트의 대답에 에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브란트는 양날의 검이지만 그가 악마의 힘을 깨운다면 한 명 이상 분의 힘을 낸다. 그런 그를 더는 쓸 수 없게 된다?
이게 만약 게임이라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한 현실이다.
누구보다 엠마의 뜻이 중요했다.
“형님이 잠든 동안 모두 모여서 얘기해 보았습니다. 악마를 상대하는 데 있어 형님은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형님이 계속되는 고통을 참으면서 도움이 되어주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만 엠마가 알게 된 이상 더는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브란트는 그 말에 에드와 그 뒤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정을 내린 건가?”
에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 형님은 악마를 때려잡을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반인을 상대로는 충분히 강합니다. 어지간한 용병 정도는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정도죠.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브란트가 정착한다면 에드는 아낌없이 돈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도움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정착금을 줄 수 있었다.
아칼란의 다비드가 죽었으니 브란트를 쫓을 자도 없을 터.
모두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원한다면 마젤타 왕국에서도 얼마든지 정착할 수 있으리라.
브란트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을 감고 고민했다.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고통에서 해방된 지금이 너무나 편안했다.
하지만 이 일행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대악마 사냥이다. 그 위업을 함께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에드는 고민하는 브란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도 시무스에 가는 동안 생각해 보세요. 아무래도 정착하기에는 시무스가 좋을 수도 있으니까요.”
론멜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본교의 총본회가 그곳에 있으니 도움을 받기도 편할 거야.”
“생각해 보지.”
브란트는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무스까지 가는 길에 몇 개의 도시를 지나쳤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 흔한 악마 하나 만나지 않고 시무스에 도착했다.
도착하면 곧장 시트라의 총본회를 갈 생각이었지만, 대악마의 힘을 봉인했기에 굳이 그곳을 먼저 찾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론멜이 먼저 시트라의 총본회를 찾아가 사정 설명을 한다고 했고, 우리는 그사이에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오는 길에 브란트의 힘을 봉인하면서 하루를 더 보냈기에 도착하고 나서 카산드라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마도 내일이면 카산드라가 찾아올 터.
오늘 하루는 여독을 풀기로 했다.
시무스에 악마가 있다고 하지만 그놈을 잡는 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브란트는 엠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결정을 오늘 듣기로 했다.
호텔에서 론멜을 제외하고 모두 한자리에 모였을 때 브란트가 엠마의 손을 잡은 채 이야기를 꺼냈다.
“엠마와 이야기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
엠마가 브란트의 손을 꼭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가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어요. 저를 욕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아빠가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서 고집부렸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에드가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엠마. 네 결정을 탓할 사람은 없어. 형님 덕분에 일행이 도움을 받았던 적도 많았고, 형님이 고통받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일행으로 데리고 다녔던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사실 노리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브란트가 품고 있는 대악마의 피의 힘을 온전히 봉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엠마.”
에드의 사과에 엠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에드는 디에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디에고. 엠마랑 잠깐 나가 있어 줄래?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알겠어요.”
디에고가 엠마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에 에드는 품에서 금패를 꺼냈다. 에드가 차곡차곡 쌓는 금패를 보고 덱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브란트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나에 100골드짜리 금패 스무 개를 쌓은 에드가 금패를 브란트에게 밀어줬다. 브란트는 금패를 바라보다가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왜?”
“형님. 정착금으로 쓰세요.”
“2천 골드를?”
이곳이 마젤타 왕국의 수도 시무스라고 해도 2천 골드는 큰돈이다. 정착에는 쓰고도 남는다.
에드는 미소를 지은 채 웃으며 말했다.
“큰돈 같지만 대저택은 사지도 못할 돈이에요. 그래도 작은 저택을 하나 사고 가게 하나 차릴 정도는 되겠죠. 엠마 요리 실력이 좋으니 음식점을 차려도 될 테고요.”
브란트는 손을 내밀어 금패를 쓸어 담으면서 말했다.
“음식점이 대박 나면 꼭 갚지.”
사실 거절하고 싶었지만, 엠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브란트는 금패를 거절하지 않고 챙겼다.
브란트가 그리 말해줬기에 다른 일행도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덱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난 공짜로 줄 거지?”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시무스에 오도록 철 조끼를 입고 뛰어서 그런지 그의 몸은 전보다 더 좋아졌다. 단순히 체력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근력까지 많이 늘어났다.
덱스의 너스레에 브란트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돈도 잘 벌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무슨 소리야? 나 여기서 무일푼인 거 몰라?”
하긴 악마를 잡아도 그 부산물을 팔지 않고 다 성화로 태워버리니 일행은 돈을 벌지 않고 쓰고만 있었다. 대부분 돈을 아스트론 교단의 것으로 써왔으니까.
브란트는 그 말에 웃더니 말했다.
“죽지만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면 직원으로 써주마.”
“이걸로 노후는 해결됐군.”
다들 그의 이별을 아쉬워서 하는 농담이라는 것을 안다. 덕분에 무겁지 않게 브란트와의 이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의 옥상에는 차를 마시는 곳이 준비되어 있었다. 디에고는 그곳에서 따뜻한 홍차와 엠마가 마실 달콤한 고구마 라떼를 주문했다.
의자에 앉아서 음료를 기다리면서 디에고는 가만히 엠마를 바라보았다. 엠마는 디에고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엠마는 난간에 기댄 채 시무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왕궁을 바라보던 엠마가 불어온 바람에 머리가 펄럭일 때 디에고가 입을 열었다.
“엠마.”
엠마가 돌아보니 디에고가 일어나서 그녀의 옆에 섰다. 엠마는 디에고의 시선을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잘 결정했어.”
엠마는 디에고의 말에 솔직히 놀랐다. 다른 누구보다 반대할 거라 여겼던 그가 찬성해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약간은 서운했다.
이제 함께할 수 없는 데 괜찮다는 건가 싶어서.
디에고는 그런 엠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걱정이 많이 됐었어.”
“응?”
“우리가 상대하는 악마는 점점 강해지고 영악해지고 있어. 이번에 지옥의 문을 닫을 때는 일행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했을 정도고. 사실 우리 중 누가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위험이 항상 함께했어.”
엠마는 그 말에 디에고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았다.
“···디에고.”
디에고가 엠마의 어깨를 살짝 잡고는 말을 이었다.
“네 결정에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몰라.”
엠마는 그 마음이 고마웠기에 오히려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대신 이제 함께 못하잖아.”
디에고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엠마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바라보는 사이에 디에고는 자신의 가슴을 엄지로 쿡 찍으며 말했다.
“대악마의 머리를 자르고 난 영웅이 되어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말. 엠마는 그것이 마치 예언처럼 들렸다.
“그리고 내가 돌아오면···, 음···.”
엠마는 디에고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 바짝 다가갔다. 디에고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엠마는 뒷짐을 진 채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면?”
엠마가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디에고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장난치겠다고 가까이 얼굴을 가져왔던 엠마는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알고는 물러나려고 했다.
그런 엠마의 팔을 디에고가 잡았다.
“함께 하자.”
엠마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것을 보고 디에고는 용기를 내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엠마는 디에고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심장 박동은 당장 터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엠마는 그의 빠른 심장 박동 소리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엠마는 손을 뻗어 디에고의 등을 끌어 안았다.
“좋아. 함께 해.”
디에고는 엠마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엠마는 디에고의 품에서 작게 속삭였다.
“대신 다치지 말고 돌아와.”
디에고는 그 말에 굳게 다짐했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성장했지만, 더 강해지겠다고. 그래서 자신은 물론이고 일행 누구도 다치지 않게 지키겠다고.
호텔의 연회장을 통째로 빌린 송별회.
그 돈은 론멜이 시트라 교단에서 가지고 온 돈으로 열었다. 호텔의 쉐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을 먹고, 마젤타 왕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요정의 눈물이라는 술을 마셨다.
시무스로의 여정을 함께한 노리스도 송별회에 참가한 채로 온갖 과일 요리를 먹고 있었다.
에드는 요리를 먹으면서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노리스와 이곳에 오는 동안 그의 능력에 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심안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법을 만든 노리스는 에드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에드는 스스로 숨기면서도 심안을 다시 열어둘 수 있었다.
그렇게 열어둔 심안에 잡히는 존재들이 있었다. 고작 둘.
에드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군복을 입은 굉장한 미남자.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거구의 사내.
미남자를 본 론멜이 앞으로 나섰다.
“파괴는 끝이 아닌 시작일지니. 시트라의 검 론멜입니다. 라르스 태자 저하.”
에드는 그 말에 미남자를 바라보았다. 안젤로가 선이 고운 미남이라면 라르스는 뚜렷한 인상에 남자다운 미남자였다.
태자라고 하면서 저만큼이나 단련이 되어 있나 싶을 정도로 잘 단련된 사내였다.
라르스는 일행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군. 라르스라고 한다.”
밀러가 주의하라고 한 남자. 라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