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새로운 만남
아스트론 교단의 증표에 꽂혀 있는 사제를 바라보며 라그록스가 붉은 눈을 빛냈다. 사제는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라그록스를 쏘아보았다.
“아···스트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라그록스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가 왜 뒈지는 줄 아냐?”
사제가 입에서 피를 주륵 쏟느라 답을 못하자 라그록스가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을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아스트론 때문이야. 그 새끼가 내 계획을 망쳐 놓아서라고.”
라그록스가 검을 뽑아내자 사제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사제의 머리를 발로 짓밟은 라그록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트론의 신전.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수도승과 사제들이 죽어 쓰러져 있었다. 부러진 뿔의 토끼가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에는 이곳을 지키던 성기사의 팔이 물려 있었다.
아스트론의 신전 중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트라비아 왕국 내에서는 중심에서 멀어져 지키는 이도 별로 없던 곳이었다.
그래도 성기사 하나와 수도승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제물로 바쳐졌다.
라그록스는 짓밟고 있던 사제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가볍게 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낸 라그록스는 아스트론의 증표를 바라보았다.
“내 계획을 모두 수포로 돌린 것 같겠지만, 그 아이가 나를 쫓는 이상 계획은 이어질 거다. 다시 내려오기는 힘들 테니 지켜보기나 해.”
라그록스는 그리 말하고는 검을 휘둘러 아스트론의 증표를 반으로 잘랐다. 반으로 잘려 미끄러지는 아스트론의 증표 안쪽에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손을 넣은 라그록스는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을 꺼냈다.
“아스트론. 엉덩이가 무거운 네가 직접 움직인 건 의외였지만, 그곳에 있는 이상 개입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아.”
라그록스는 히죽 웃으며 피범벅이 된 신전을 걸어가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또 보자고.”
다시 마차를 타고 일행은 대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에드는 옆에서 말을 타고 오는 론멜을 바라보았다. 뭔가 기운이 빠져 보이는 그를 보고 에드가 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풀이 죽어 있을 겁니까?”
“응? 아냐. 누가 풀이 죽어 있어?”
론멜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하는 말에 옆에서 말의 고삐를 쥐고 달리던 덱스가 코웃음을 쳤다.
“훅훅. 신시아 경이 일렌에 남아서 그런 거잖아. 훅.”
론멜은 덱스를 바라보았다. 일렌에서 구한 철 조끼를 입은 채 지칠 때까지 달리다가 말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다시 말에 오르며 체력 단련을 하는 모습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선배가 일렌에 남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훅훅. 그건 딱 보면 알지. 훅. 그 뒤로 네가 말도 없고. 훅. 풀이 죽어 있으니까. 훅훅.”
“아씨! 훅훅 거리지 마!”
덱스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훅훅. 기도만 하면 강해지는 너랑 훅. 같겠냐? 훅훅.”
론멜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상급 악마 둘을 제물로 바치고 얻은 신성력은 막대했고, 지금도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체화하는 중이었다.
체화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확실했지만, 무서운 속도로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느꼈다.
덱스가 저렇게 피나는 훈련을 하는 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잠시 눈을 감고 시트라에게 짧은 감사 기도를 드린 론멜이 말을 몰며 답했다.
“타룬 산맥의 마물이 너무 많아. 신전을 통해서 연락을 넣었으니 지원군이 올 거야. 그동안 일렌을 지키려면 선배가 남아야만 했어. 그뿐이야.”
“훅훅. 그래서 좋아하냐? 훅훅.”
“무슨···.”
쏘아붙이려던 론멜은 얼굴을 붉히고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덱스가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키득거렸다.
“훅훅. 부끄러워하긴. 훅훅.”
에드는 덱스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고는 먼저 달려간 론멜의 뒤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론멜은 신시아와 헤어지고 풀이 죽어 보였다.
그렇다고 론멜을 그곳에 남기고 올 수는 없었다.
수도 시무스에 있는 총본회를 찾아가는 길. 총본회에서 아큘라의 반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론멜은 일행과 함께 가야 했다.
굳이 에드가 말할 것도 없이 론멜이 남겠다고 했을 때 신시아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여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렇게 풀이 죽어 있는 것이겠지.
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론멜은 아직 성장할 구석이 많았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에 에드는 심안에 잡히는 존재를 읽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가고 있어요. 잠깐 만나보고 올 사람이 있으니.”
에드는 그리 말하고는 다크를 몰아서 앞으로 튀어나갔다. 대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나무 둥치에 앉아있는 밀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에드는 다크에 내리지 않은 채 밀러를 내려다보았다.
“여기는 또 왜 온 거야?”
“이번에 세운 공에 대해서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들었어?”
밀러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시트라 교단의 신전에 전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밀러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지옥의 문을 닫아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에드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리는 쏟아져 나오는 악마들은 다 죽였지만, 마물까지는 처리할 시간이 없어. 그건 맡겨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가장 가까운 4군단에 연락을 취해 놓은 상태입니다. 시트라 교단에서도 지원을 온다고 하니 마물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상급 마물까지 있으니 우습게 봤다가는 오히려 피해만 키울 거야.”
밀러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엠버 왕자님께서 4군단장에게 특별히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엠버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지만, 그까지 나섰다면 어떻게든 마물들은 정리되리라. 왕위 계승권을 위해서 업적을 쌓고 있는 그가 실수할 리는 없겠지.
“그런데 왜 기다리고 있던 거야?”
“혹시 어디로 가시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수도 시무스로 가는 길이야.”
밀러는 대충 예상은 했기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도 시무스로 가신다면 태자 저하는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태자?”
“예. 왕국 서열 2위 라르스 님은 이번 트라비아 남부 귀족 공략에 크게 신경을 쓰셨던 분. 국왕 전하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번 일이 실패하며 그 입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특히나 엠버 왕자님이 그 실패 부분에 대해서 부풀리며 정치적 공격을 하는 중이라 그 일의 중심에 있는 여러분을 좋게 보시지 않을 겁니다.”
에드는 밀러의 걱정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아무리 눈이 돌아갔다고 해도 시트라 교단이나 아스트론 교단과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일행을 노릴 수는 없을 테니까.”
론멜의 성장이 눈부시다. 시트라 교단 내에서도 입지가 달라질 테니 자신들을 압박하지는 못하리라.
에드는 말머리를 돌리며 답했다.
“그래도 알려준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에드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밀러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자 라르스는 생각보다 지독한 녀석이지만, 에드가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하기 보다 바삐 움직여야 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사내는 창밖으로 수도 시무스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랑하는 동생이 바쁘다고?”
사내의 뒤편 촛불의 그림자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한 사내가 부복한 채로 답했다. 그림자 속에 어떻게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구의 사내였다.
“예. 3군 사령부를 장악했고, 타룬 산맥에서 일어난 마물의 파도를 막기 위해 4군 사령부까지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물의 파도는 왜 일어난 거지?”
“시트라 교단에서 알려온 바로는 타룬 산맥에서 크로셀이 지옥의 문을 열려고 했고, 그걸 아스트론의 성기사 일행이 막았다고 합니다. 시트라 교단의 성기사도 함께 하고 있는데 지금 수도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내는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크로셀이라···. 감히 내 나라에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단 말이지.”
사내가 뒷짐을 풀고 손가락을 튕기자 문이 열리고 수호 기사가 들어왔다.
“글로웰. 왕국 내에 크로셀이라는 자들이 나 몰래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책임자를 잡아와라.”
“명을 받듭니다.”
사내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이를 향했다.
“다음에 올 때는 아스트론의 성기사에 대해서 알아와. 그리고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방법도.”
“그리하겠습니다.”
“가봐.”
거구의 사내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자 홀로 남은 사내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맨날 업어달라고 하던 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나?”
엠버의 얼굴을 떠올린 사내는 손을 들어 달을 가렸다. 그리고 달을 손에 쥐며 말했다.
“그래도 이 왕국은 양보 못한다. 동생아.”
쿠웅.
덱스가 바닥에 벗어던진 철 조끼가 먼지를 일으키자 론멜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먼지 나!”
“후우. 아직도 삐졌어?”
덱스는 근력에 관련된 장비를 모두 벗고 신속에 관련된 장비만 착용한 채 말을 타지 않고 따라왔다. 믿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비약적인 체력 상승이었다.
단순히 싸움에 특화된 재능을 지녔다고 여겼다. 전투 예측은 분명 뛰어난 재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덱스의 체력이 상승하는 수준이 범상치 않았다. 부족한 체력이 이렇게 빨리 늘어나는 것을 보면 그냥 인간 자체의 성장 한계점이 예상보다 아득히 높았다.
“삐진 거 아니거든?”
론멜이 투덜거리자 덱스가 몸을 풀며 오늘 야영할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야습이 없으니 매일 밤이 심심하네.”
덱스는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는 말했다.
“나 씻고 온다.”
“같이 가자.”
근처에 강이 있어 덱스가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고 론멜도 씻고 오겠다고 떠났다.
디에고가 그런 에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형. 저도 씻으러 갈 건데 같이 안 가실래요?”
에드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일렌을 떠나고 오는 길에 마을이 오랫동안 없어서 오 일 정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이니 씻으러 가자는 말도 나올 만했다.
“다녀오세요. 제가 식사 준비해놓을게요.”
엠마가 더그를 도우며 하는 말에 에드가 잠시 고민했다. 아린이 그런 에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먼저들 씻어요. 식사 끝나면 저랑 엠마랑 씻으러 갈게요.”
남자와 여자가 나눠서 씻자는 말에 에드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씻으러 강가로 갔다. 강가에서는 헐벗은 남자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에드는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내젓고 부츠를 벗었다. 씻는 것은 자신도 좋아하지만, 강가에서 헐벗고 씻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다.
발을 물에 담그니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원했다. 그렇게 발을 담갔던 에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빙결의 활을 집어 시위에 한철 화살을 걸었다.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이는 긴 봉을 지팡이 삼아 걸어 나온 이로 여행자용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후드를 깊게 눌러 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상대가 걸음을 멈춘 곳이 의외였다.
강에 들어오기 전이 아니라 에드가 읽을 수 있는 심안의 가장자리에 섰다. 정확히 심안이 닿지 않는 거리.
에드는 혹시나 해서 한 걸음 더 내디뎠고, 상대는 정확히 한 걸음 물러났다.
심안을 감지한다?
에드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을 때 사내가 왼손을 들어 가슴 앞에 반장(半掌)하고는 입을 열었다.
“시주 눈을 거두시오.”
시주? 승려라도 되는 건가?
에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반장했던 사내는 후드를 벗었다. 파르스름하게 깎은 이마에 두 마리 용이 교차하는 문신을 새긴 승려였다.
론멜이 그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쌍룡사의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