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의뢰
아린은 의식을 차리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저 멀리 하늘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던 아린은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히 기도를 시작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다시 눈을 감고 몸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깜짝 놀랄 정도로 신성력이 늘어나 있었다.
대악마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하나를 바쳤을 뿐인데 이렇게 강해져도 되는 걸까?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이걸 체화하는 것도 일이다 싶어서 아린은 다시 눈을 떴다.
“깼어요?”
에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구도가 이상하다. 왜 거꾸로 보이는 거지?
그러고 보니 지금 뭘 베고 있는 거지?
그걸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아린이 얼굴을 붉히며 얼른 일어났다. 무릎베개를 해주던 에드는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기에 오히려 걱정했다.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울 텐데···.”
“괜찮아요.”
하긴 그녀 정도 되는 성기사가 조금 오래 누워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는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끼지는 않을 터.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린의 상태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요.”
아린은 손부채 질을 하다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일행 모두가 편하게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모두 더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다들 무사하네요.”
“그건 아린의 신성력 때문이에요.”
아린이 기절하기 전에 사방으로 뿜었다가 다시 회수한 신성력은 회복의 기능이 있었는지 그 파도에 휩쓸렸던 이들은 크고 작은 부상이 모두 회복되었다.
“제 신성력이요?”
에드는 당시의 아린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혹시 기억나지 않아요?”
“대악마의 손가락을 제물로 바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럼 이것도 기억이 안 나겠네요.”
“뭐, 뭔가 실수했나요?”
에드가 옷을 펼쳐 보이자 그 안에서 칠채비도가 스스로 뽑혀 나왔다.
“어?”
처음에는 귀환 능력만이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의지만으로 간단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물론 무한하게 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초. 하지만 이건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5초 정도 의지로 조종하고 나면 3분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조종할 수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귀환 기능은 언제든 쓸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칠채비도를 전투에 사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아스트론의 은총이라고 할까?
아린은 그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에드는 칠채비도를 모두 되돌려 수납하고는 답했다.
“아린이 제물을 바치고 나서 칠채비도에 이런 기능들을 넣어 줬어요.”
아린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요?”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린은 뺨을 긁적였다.
“그 정도면 권능이 아닌가요? 그걸 제가 무슨 수로···.”
에드도 그것에 대한 답은 없었다. 다만 그 순간 그걸 지켜보았던 이들끼리 아린이 잠든 사이에 예상만 해보았다. 론멜이 그 의견을 내보았다.
“아린 경.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자네 몸을 빌려 아스트론이 강림했던 것 같아.”
“예?”
아린이 황당하다는 듯 돌아보자 론멜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확신은 들지 않아. 정말로 강림했다면 그 격이 느껴졌을 텐데 그런 것은 없었거든. 그리고 칠채비도만 저렇게 만들고 기절했으니 그것도 의문투성이고. 하지만 권능을 남긴 것은 확실해.”
아린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한 것이 에드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만족하기로 했다.
잠시 몸 안의 신성력을 살펴보았지만, 강해진 것 외에는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저 잘된 일이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너무 늦었네요. 이제 돌아가죠.”
아린은 옆에 놓인 해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길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무기들이 일제히 날아왔다. 해머는 손으로 와서 잡혔고, 방패는 날아와 등에 장착되었다. 그리고 성검은 검집으로 돌아갔다.
“어?”
귀환 기능은 해머에게만 있던 것. 그게 그녀가 가진 장비에 모두 작용 되고 있었다.
에드도 그걸 보고는 놀랐다. 칠채비도 외에 그녀가 가진 장비도 강화되었다. 귀환 기능은 에드에게 가장 효과적이지만, 아린이 가진 방패의 위력은 해머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런 방패가 돌아와 계속 던질 수 있다면 중거리에서 그녀의 역할이 커진다.
“그럼 일렌으로 돌아가죠.”
먼저 출발한 더그와 테인, 엠마가 기다리고 있을 터.
에드의 말에 일행이 모두 돌아갈 준비를 마쳤을 때 신시아가 입을 열었다.
“지옥화는 막았지만, 산의 마물은 더 늘어났으니 그들을 막으러 가겠어요.”
론멜이 놀라서 물었다.
“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그 몸으로 마물 사냥하겠다고요?”
“악마도 아니고 마물 사냥 정도에 당할 것 같냐? 이게 지금 날 뭐로 보고.”
솔직히 신시아는 지금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만했다. 몸은 모두 회복됐고, 그녀의 신성력은 전에 없이 강해졌다. 비록 하급 악마라고 하나 한 자리에서 100마리를 태웠다.
그것만으로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다. 론멜과 함께 밤을 다 보내도록 함께 시트라에게 기도를 하면서 신성력을 체화하면서 몸의 상태는 최상.
지금 당장 마물을 잡으러 간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게다가 검도 찾아야 해.”
“성검 하르멜을 잃어버렸어요?”
“놈들에게 잡힐 때 잃어버렸어.”
죽은 놈들은 탈탈 털었는데 얻은 것은 지팡이 하나뿐이었다. 사도 안타렐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제외하고는 없어서 성검을 탐색해야 했다.
론멜은 잠시 신시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에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물은 모르겠지만, 일단 성검 하르멜은 찾아야 해. 성검을 찾는 걸 돕고 나서 일렌으로 가겠다.”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론멜이 함께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신시아가 다시 위험해질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해요. 일렌에서 보죠.”
“그래. 일렌에서 보자고.”
론멜과 신시아를 두고 일행은 일렌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행을 모두 돌려보낸 후에 론멜은 신시아와 함께 성검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장선 것은 론멜이었다. 론멜은 성검을 뽑아든 채 걸어가다가 튀어나온 마물의 목을 단칼에 베였다. 그 일격을 보고 뒤따라 오던 신시아가 감탄했다.
“제법인데?”
뭔가 어설펐던 론멜이 아니었다.
성기사는 자격이 되면 총본회를 떠나 각자 임무를 수행한다.
마젤타 왕국의 국교인 시트라 교단이다 보니 왕국 내에 나타나는 마물과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성기사들은 대부분 총본회에 있지 않다.
총본회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이들은 마스터 팔라딘과 은퇴한 성기사들이 교관들로 남을 뿐 현역의 성기사들은 대부분 총본회를 떠나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던 중 시트라 교회나 신전에 지원을 요청하거나 해야 성기사들이 만날 뿐이다.
이번에도 신시아가 만약 크로셀의 사도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녀도 타룬 산맥의 마물 현상에 지원을 요청했을 터였다. 그녀가 체감하던 수준에서도 성기사가 셋 이상 모이고 수도승들이 지원을 나와야 간신히 감당했을 정도의 일.
교단만이 아니라 왕국의 협조까지 얻어야 간신히 막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마물의 이상 증가 현상에 대해서만.
만약 지옥화가 끝나고, 지옥의 문이 열렸다면 그때는 교단과 왕국 전부 총력을 기울여야 했으리라.
그 모든 일을 론멜이 함께 하는 일행이 해결했다.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가능했다.
그 일행과 함께하면서 론멜도 저리 성장한 걸까?
지금 론멜이 보여주는 기세나 검격의 날카로움을 보면 마치 마스터 팔라딘을 보는 것 같다.
경험이나 그런 것은 아직 부족하겠지만, 품고 있는 신성력의 크기가 달라졌다. 하긴 자신도 이번에 얻은 신성력의 크기를 생각하면 마스터 팔라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성기사들을 통틀어서 손에 꼽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론멜의 일검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론멜은 신시아의 감탄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죠.”
론멜은 에드 일행과 함께하면서 단 하루도 편히 보낸 적이 없었다. 특히 상급 악마를 제물로 바친 이후에는 기도와 대련의 나날이었다.
어떻게든 한 방이라도 먹이기 위해서 덱스와 브란트와 얼마나 대련을 했던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 괴물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자신이 까마득하게 높게만 보던 신시아에게 칭찬을 들었다.
하긴 그 전에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총본회의 성기사단에서도 지금 일행만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매일 전투와 훈련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이들이니까.
새삼 자신이 그들과 함께 한 것이 어떤 행운인지를 깨닫는다.
신시아는 그런 론멜의 옆에 서며 물었다.
“그래서 성검이 반응하고 있어?”
론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반응이 잡히지 않아요.”
론멜이 신시아를 도와서 성검 하르멜을 찾고 있는 이유는 론멜이 가진 포식검과 성검 하르멜이 한 쌍이기 때문이다.
서로 일정 거리 안에 있으면 공명할 것이라 이렇게 찾는 중이었다.
그때 측면에서 달려오는 두 마리 마물에 론멜이 곧장 성검을 휘둘렀다. 횡 베기에 이은 사선 베기로 단번에 마물 둘을 처리한 론멜이 웃으며 말했다.
“잘 따라와요. 일단 하르멜을 찾고 일렌으로 돌아가죠.”
신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오다가 물었다.
“그런데 에드 일행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신시아도 이제는 그 일행의 중심이 누군지 알게 됐다.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공할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아스트론의 성기사인 아린이 일행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론멜은 그 물음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급 악마를 쫓던 중에 만났어요. 우연히 만났는데 그들이 아스트론 교단의 예언에 따른 퇴마행을 하는 중이라고 하기에 조금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함께하다가 여기까지 왔죠.”
“예언에 따른 퇴마행이라고?”
“예. 신전에 들렀을 때 일단 보고는 해둔 상황이에요.”
론멜은 그간 있었던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자랑처럼 들려주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허풍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젤타 왕국에서 5만 병력을 파견한 사건에 대해서는 그녀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상급 악마의 농간이었고, 군단 사령관이 상급 악마였다? 그리고 서열 3위 엠버 왕자를 도와 상급 악마를 사냥했다는 말까지 들으니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신시아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그 인간들 인간이기는 한 거야?”
아무리 예언에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론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한 달도 안 돼서 벌어진 일이다. 그 짧은 시간에 상급 악마 둘을 처리하고 지옥의 문을 닫았다고?
16년 전에 나타난 전설의 삼 영웅에 비견되는 위업이 아닌가?
일렌에 돌아오는 길에 카산드라가 주었던 구슬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다. 신호만 보내는 것이지만 카산드라는 하루 만에 일렌을 찾아왔다.
그걸 보면 카산드라가 주위에 있었던가 상상도 못 할 이동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카산드라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에드를 바라보다 물었다.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발품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구해드릴게요.”
에드는 카산드라가 특별히 관리해야 할 큰손이었기에 그녀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에드 일행은 단순히 큰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루는 위업을 보면 앞으로 더 높은 곳에 오를 이들. 그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구해다 줄 용의가 있었다.
에드는 믿는다는 눈빛으로 의뢰했다.
“사령에게 얹을 수 있는 안장이 필요해요. 일곱 개.”
카산드라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사령술사 자체가 희귀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사령술사들이 반영체인 사령에 올라타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런 이들이 다른 이도 탈 수 있는 사령용 안장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에드는 카산드라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못 구합니까?”
카산드라는 에드의 눈에 실망의 기색이 비치는 것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뇨!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일단 지르고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