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권능
신시아가 정신을 차린 뒤에 가장 바빠진 것은 아린과 론멜이었다. 신시아는 아직 성화로 제물을 바칠 정도로 회복되지 않아서 협곡의 벽에 기댄 채 아린과 론멜이 성화로 바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상급 악마는 론멜이 바치고 있었고, 대악마의 손가락은 아린이 성화로 태웠다.
우선은 가장 강한 그 두 개를 먼저 성화로 바치는 중이었는데 그 둘의 모습을 보면서 신시아는 감탄과 부러움을 표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무려 상급 악마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론멜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트라가 내리는 축복은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성검을 바닥에 꽂은 채 시트라의 신성력을 받아들이는 론멜의 모습을 바라보니 조금 전에 그의 품에 안겼던 것이 떠올랐다.
저 멍청한 론멜이 언제 그렇게 컸는지 놀라웠다. 항상 자신감이 모자라서 자신 앞에서는 입도 제대로 뻥긋 못하던 녀석이 언제 자신 앞에서 그리 당당해졌는지.
신시아는 시선을 돌려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스트론의 성기사.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제물로 바쳤을 뿐이지만, 그녀를 향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줄기는 산맥 어디서도 보일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스트론의 성기사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는데 저 정도 수준이라면 거의 마스터 팔라딘 이상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자신을 치료했던 회복 주문은 더 놀라웠다. 성녀나 가능한 일일까?
저토록 뛰어난 회복 주문에 마스터 팔라딘도 압도할 전투력.
저런 성기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신시아는 고개를 돌려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면면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특히 죽은 악마들의 미간에 박힌 화살을 잡아 뽑으며 화살을 회수하고 있는 사내.
악마 사냥꾼 에드.
그 이름은 마젤타 왕국에도 알려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그의 실력을 설명하기에 한참이나 부족했다.
바스토프가 자신의 몸을 빼앗았을 때의 기억이 흐릿하지만 남아있었다. 몸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을 보였음에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가 작정하고 휘두른 비도는 대악마를 품은 상태에서도 볼 수 없었다. 가히 압도적인 능력.
마지막 화살을 회수한 채 돌아온 에드가 멀찍이 떨어져서 화살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정비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이런 일들이 모두 일상처럼 느껴졌다.
에드가 화살들의 정비를 마치도록 아린과 론멜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에 바친 제물이 값지다는 것이었겠지.
에드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신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그보다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했네요.”
에드는 그녀의 상태를 심안으로 살피고는 말했다.
“감사 인사는 됐습니다. 몸은 움직일 수 있죠?”
신시아의 눈에 의혹이 깃들었다.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린과 론멜이라면 중급 악마까지 제물로 바치면 될 거예요. 하급 악마들이 남는데 놈들도 성화로 태워버려야 하니 도와주시죠.”
“예?”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다 쌓아놓을 테니까 제물로 바쳐요. 이러다가 오늘 안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에드는 그리 말하고는 하급 악마들의 시체를 하나둘 주워다가 그녀 앞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에드가 움직이자 덱스와 브란트도 움직였고, 디에고의 톰과 닉, 퓨리도 하급 악마들을 모아 산처럼 쌓기 시작했다.
신시아는 자신의 앞에 쌓이는 악마들의 시체를 보고는 주저했다.
신시아가 지금까지 제물로 바친 하급 악마는 둘이었다. 그런데 지금 산처럼 쌓이는 하급 악마는 못해도 백을 넘어선다.
이런 걸 자신이 제물로 바쳐도 될까?
악마의 시체는 추려내기에 따라서 상당한 돈이 된다. 이것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못해도 수천 골드는 될 정도다. 그것도 지옥에서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악마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을 터.
그런데 그냥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제가 제물로 바쳐도 될까요?”
성기사로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신시아가 묻자 에드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설마 이걸 마을까지 가지고 가란 얘기는 아니죠?”
신시아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꼭 갚죠.”
“은혜랄 것도 없어요. 당신이 지옥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저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걸 막을 수 없었어요. 이건 당신 몫입니다.”
신시아는 에드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읽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시트라에게 제물로 바치고 다른 방식으로 은혜를 갚으면 될 일이다.
신시아가 기도를 올리자 검은 불꽃이 하급 악마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하급 악마의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며 삽시간에 산처럼 쌓인 하급 악마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100마리가 넘는 하급 악마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고, 그곳에 불붙은 검은 불꽃이 넘실거리며 키를 키웠다. 그렇게 솟구치는 검은 불꽃을 보며 에드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역시 불멍은 악마를 태우는 성화로 하는 게 최고지.”
“불멍이 뭐야?”
덱스의 물음에 에드는 넘실거리는 검은 불꽃을 보며 답했다.
“불꽃을 보면서 멍때리는 거.”
덱스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지금은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없다. 나도 불멍이나 해야지.”
새로운 장비를 이용해서 근력과 민첩이 늘었다고 해도 체력까지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에 미쳐 있는 동안이야 어떻게든 버텼지만, 지금 상태로는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악마의 시체를 옮기는 것도 정말이지 간신히 해냈다. 추욱 처진 채 바위에 등을 기댄 덱스는 산처럼 쌓인 하급 악마들의 몸이 검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넘실거리는 불꽃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멍하니 바라만 볼 수 있었다.
덱스가 불멍을 때리는 동안 디에고는 사령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닉과 퓨리는 특별한 사령이었고, 그들을 부리는 것은 생각보다 마력 소모가 컸다.
이번에 에드가 장비를 사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끝까지 견디는 것은 불가능 했으리라.
사령들을 돌려보낸 디에고도 에드의 옆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형. 그런데 이거 괜찮을까요?”
“뭐가?”
“지옥문 너머를 보았을 때 여기에 있던 것이 성장했어요.”
디에고가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보고 에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후안에게 물어봐야겠는데?”
디에고는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당장은 후안은커녕 제리도 소환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성장했다면 다행인 건가?”
디에고에게 전해진 것은 씨앗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발아했다는 것은 후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지옥의 마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성장했다면 디에고가 어떻게 변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후안을 소환할 때까지는 디에고를 유심히 지켜봐야겠다.
에드의 시선이 브란트를 향했다. 사실 지옥의 마기에 노출되었을 때 가장 위험할 사람은 브란트였다. 브란트는 에드의 시선에 담담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오히려 진정된 느낌이야.”
“다행이네요.”
지옥화는 상당히 위험한 퀘스트다. 에드 본인이야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에도 간격을 볼 수 있으니 위험할 것이 없었지만, 일행은 쉽게 죽어 나갔다.
그런 것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잡아냈다. 에드 본인이 레벨이 오른 것도 있지만, 아린의 성장도 빠른 데다가 덱스나 브란트도 모두 성장이 빨라서 가능했다.
게다가 디에고는 지옥화 덕분에 그리폰과 블랙 와이번이라는 상위 맹수와 상위 마물을 사령으로 얻었다.
날 수 있는 탈 것을 구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령에게 얹을 수 있는 안장만 구할 수 있다면 그때는 이동 속도가 비약적으로 오르게 되리라.
밤에만 이동해도 지금보다 몇 배는 빨라질 테니.
일행 모두를 태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때 론멜이 먼저 기도가 끝났다. 상급 악마를 두 마리째 제물로 바친 론멜의 몸에서 넘실거리는 신성력은 섬뜩했다. 파괴의 신이라 그런지 신성력이 강해질수록 위험하게 느껴졌다.
론멜은 그래도 처음이 아니라 그런지 신성력을 갈무리하고 일어났다. 만약 같은 수준으로 성장한다면 전투에 있어서는 론멜이 아린보다 유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둘의 간격이 좁혀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론멜은 기도를 끝내고 일어나서는 돌아보았다. 그는 하급 악마가 산더미처럼 쌓인 채 검은 불꽃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놀라서 다가왔다.
“선배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 보이기에 하급 악마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론멜은 그 말에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돕기는 했지만, 상급 악마 하나를 제물로 받은 것만 해도 과분하다고 여겼다.
이들은 신시아를 구해줬으니까.
그런데 한두 마리도 아니고 하급 악마를 모조리 제물로 바치게 해줄 줄은 몰랐다. 신시아 선배도 이걸 통해서 시트라의 사랑을 더 받게 되리라.
“고맙다.”
에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그러면 중급 악마는 아린에게 양보하시죠.”
“사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에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정하지만 론멜의 공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에게 상급 악마를 내준 것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분배를 잘못하면 의가 상하고 멀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선배 기도가 안 끝났으니 중급 악마들이나 한데 모아놓아야겠군.”
론멜이 중급 악마들 시체를 옮기기 시작하기에 에드도 그를 도와서 시체를 옮겼다. 그렇게 옮긴 시체들은 모두 서른두 마리.
중급 악마를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모두 지옥화 덕분이다.
그렇게 시체를 다 쌓을 때쯤 아린의 기도가 끝났다. 그걸 알게 된 것은 그녀에게로 떨어지던 신성력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협곡을 따라 퍼져 나가는 신성력에 휩쓸린 중급 악마들에게 그대로 성화가 붙어 타올랐다. 그리고 협곡 끝까지 날아갔던 신성력의 파도가 다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성화로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협곡을 타고 뻗어 나갔던 신성력이 돌아오면서 중급 악마들이 모조리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돌아온 신성력이 아린에게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하늘까지 빛의 기둥이 오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후광은 전에 없이 밝았다.
이제는 아스트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도 시간이 드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게 된 걸까?
이곳에서 에드가 폭렙한 것처럼 아린도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저 정도라면 상급 악마도 혼자 때려잡을 정도지 않을까 싶었다.
아린은 후광을 등에 업은 채 에드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푸른 하늘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뭔가 그녀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린?”
아린은 에드 앞으로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에드의 품에 있던 칠채비도가 모두 저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터져 나온 빛이 그대로 칠채비도를 뒤덮자 칠채비도가 빛나면서 물결무늬의 파형이 그 위에 그려졌다.
이건 귀환의 권능이 새겨지는 것.
에드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중에 아린의 눈에서 푸른빛이 사라지더니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아린!”
에드가 놀라서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로 에드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에드는 그녀를 안은 채로 혹시나 해서 손을 내밀었고, 칠채비도가 차례로 날아와 에드의 손에 잡혔다. 에드는 칠채비도를 바라보다가 다시 아린을 돌아보았다.
지금 아린이 아스트론의 권능을 사용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