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새로운 사령들
산의 동물들이 일제히 재해를 피해 도망치듯 대규모로 움직일 때 산의 주인은 다른 생각을 했다. 감히 자신이 사는 산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분노한 그리폰은 높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로 치솟으니 하늘까지 쫓아오는 마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같잖은 것들.
단숨에 활강해서 그 가슴을 앞발로 찢어버렸다.
다시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부리 쪼아서 쪼개버린 그리폰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산을 더럽힌 마물들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건방진 것들을 향해 날아들며 사납게 그들을 처리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면서도 용맹하게 마물들을 죽이던 그리폰은 솟구쳐 날개에 상처를 입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때 마물들 사이로 솟구쳐 오른 블랙 와이번에게 목을 물렸다. 그냥 당하지는 않고 앞발의 발톱을 블랙 와이번의 가슴에 꽂아 넣었지만, 지금까지 상처를 견디지 못한 그리폰은 결국 피를 뿌리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크르라라!
블랙 와이번이 하늘에서 포효를 터트리며 산의 주인을 죽인 것을 기뻐했다.
심안으로 마물들의 중심을 찾아가며 최대한 화살로 적들을 죽이던 에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마리 그리폰을 바라보았다. 날개를 잃고 피를 비처럼 뿌리며 추락하는 그리폰.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인지 날개조차 펄럭이지 못하고 떨어진 그리폰은 일행의 진행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에드는 이미 날이 저물어 톰과 제리를 소환했던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디에고. 사령을 얻을 수 있겠어?”
에드가 화살로 적을 대부분 죽였다고 하지만 팔백 발을 쏜 이후로는 화살을 가능한 아끼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어서 그렇게 원하던 덱스에게 맡길 수 있었다.
다가오는 마물들을 상대로 덱스는 미쳐 날뛰는 중이었다. 전투 예측이 가능한 그가 날뛰면 어떤 마물도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브란트도 쇠사슬을 휘둘러 마물들을 때려잡는 중이었다.
에드는 그 뒤로는 일행이 위기에 처할 때만 화살을 쏘는 중이었는데 그리폰이 떨어졌으니 좋은 기회였다.
그리폰은 마물은 아니지만, 맹수 중의 맹수였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앞발을 지닌 맹수.
그 용맹함은 어지간한 마물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그래서 에드는 그리폰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약간 방향을 틀더라도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달려드는 마물들을 베면서 에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물이 이 정도나 있다는 것은 ‘지옥화’가 생각보다 많이 진행됐다는 얘기였다. 적어도 9할.
드레드도 ‘지옥화’를 막을 때는 이미 열린 후였다. 중급 악마까지 튀어나왔을 때 막았는데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악마와 싸워야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에드는 그리폰이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리폰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목을 물어 뜯겨서 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용케 숨이 붙어있는 모습에 에드는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그리폰의 미간에 박힌 화살.
역시 새로운 몬스터는 많은 경험치를 준다. 고작 맹수일 뿐인 그리폰이 거의 중급 악마만큼의 경험치를 주는 것을 보면.
에드는 그리폰의 숨통을 끊고는 고개를 돌려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일행들이 이 근처를 온전히 지키고 있기에 디에고는 그리폰의 시체 앞에 설 수 있었다.
디에고는 눈을 감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디에고는 톰이나 제리를 얻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오브를 꺼낼 것도 없이 그저 손짓만으로 사령을 소환할 정도가 됐으니.
그리폰의 시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날개를 한 번 펄럭인 그리폰의 영혼을 향해 디에고가 왼손을 내밀어 그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폰의 영혼은 디에고의 손길이 이마에 닿자 천천히 눈을 떠서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디에고는 자신이 새로 얻은 사령인 그리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이름은 닉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폰은 그 말에 날개를 펄럭이더니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끼아악!
그리폰이 그렇게 포효하더니 디에고를 빤히 바라보았다. 디에고는 그 눈빛을 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갚아줄 건 갚아줘야지. 가라! 닉!”
닉은 그 말에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솟구쳤다. 뭐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니 닉은 하늘을 나는 마물들 사이를 놀라울 정도로 유려하게 비행하며 앞발로 그들을 찢어냈다.
닉은 그대로 날아올라 자신을 물어 죽였던 블랙 와이번을 노렸다. 블랙 와이번은 자신이 물어 죽였던 그리폰의 사령을 보고는 입을 벌리고 독기를 쏘아냈다.
닉은 몸을 회전하며 독기를 피해내고는 앞발로 블랙 와이번의 목을 틀어쥐고는 부리로 그 머리를 쪼았다. 대번에 머리의 비늘이 깨지고 피가 솟구쳤다.
블랙 와이번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다시 독기를 뿌리려고 할 때 블랙 와이번의 턱을 뚫고 날아든 화살이 그 머리를 관통했다. 블랙 와이번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자 닉은 블랙 와이번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발톱을 놓아주고는 다른 마물들을 쫓아 날뛰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블랙 와이번을 보고 에드가 디에고를 돌아보았다.
“이것도 가능하겠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령술사는 마물의 사령도 부릴 수 있다. 그리고 블랙 와이번이라면 그리폰에 버금가는 마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디에고가 블랙 와이번의 곁으로 다가갈 때 그의 뒤로 후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안은 디에고의 어깨를 짚은 채 말했다.
-마물을 사령으로 삼을 때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다른 영혼보다 훨씬 더 강한 지배력을 발해야 한다는 것이지. 처음 계약을 맺을 때부터.
“알겠어요.”
-특히나 블랙 와이번이라면 상급 마물이니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거다.
후안은 살짝 걱정됐다. 씨앗은 발아했고, 무서운 속도로 아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사령술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사령으로 썼을 때 강한 힘을 보장해 주지만 그런 마물들을 제압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그런 후안의 걱정 어린 시선을 등에 지고 디에고는 낮게 주문을 외웠다. 블랙 와이번의 몸에서 튀어나온 영혼이 디에고와 눈을 마주했다.
흉포한 눈빛으로 블랙 와이번의 영혼이 디에고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후안은 물론이고 그걸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긴장할 때 디에고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디에고에서 뿜어져 나온 위압감은 그걸 지켜보던 이들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그 위압감은 사령이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였는지 블랙 와이번의 영혼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디에고가 한 걸음을 더 내딛자 블랙 와이번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블랙 와이번에게 디에고가 손을 내밀자 천천히 고개를 숙인 블랙 와이번이 그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블랙 와이번의 사령이 디에고와 계약하는 것을 보고 후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디에고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언제 이 정도까지 성장했는지 그도 몰랐다.
-장하다. 디에고.
디에고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블랙 와이번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위압감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분위기가 변했다.
디에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블랙 와이번의 사령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퓨리다. 가서 닉을 도와라.”
디에고의 말에 퓨리가 날아오르더니 닉을 도와 마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가장 많은 화살이 소모되는 곳은 하늘을 나는 마물들이었다. 지금은 지상에서 오는 마물들은 일행에게 맡기고 있었지만, 하늘을 나는 마물을 막는 것은 그의 소관이었는데 이제 하늘을 책임질 사령이 둘이나 되었다.
에드는 디에고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럼 하늘은 맡기마.”
“믿고 맡겨주세요.”
디에고는 두 마리의 사령을 더 얻었음에도 태연했다. 장비를 사준 덕분이기도 했지만, 디에고가 그만큼이나 성장했다는 얘기이리라.
에드는 디에고에게 하늘을 맡기고, 활을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궁술로만 길을 뚫었다면 이제는 다르다. 에드는 앞으로 달리며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대신 쏘아내는 화살에는 이기어시를 담았다.
마력량도 늘었고, 마력 회복량도 늘었으니 그걸 확인해 볼 차례였다.
에드가 쏘아낸 화살이 일곱 마리의 마물을 연달아 뚫어냈다.
에드는 그렇게 길을 뚫었고, 그 뒤를 따라 일행이 달렸다. 힘차게 달리는 그들의 앞으로 마물의 파도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술법진을 바라보던 사도 안타렐은 헛웃음을 흘렸다.
“지독한 년이로구나.”
‘지옥화’는 거의 완성 단계였다. 제물로 바쳐진 수십에 달하는 사제들은 ‘지옥화’를 견뎌내지 못하고 이미 육신을 빼앗겼다. 그들의 몸에 깃든 악마들이 술법진을 뛰쳐나오고 싶어 하면서도 나오지 못하는 것은 저 술법진의 중심에 들어선 여인 때문이다.
시트라의 성기사 신시아.
그녀는 제물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끝없는 단련으로 만들어진 육체는 상급 악마까지도 담을 수 있을 그릇이다.
그렇기에 뒤늦게 만난 그녀를 술법진에 올렸다. 그런데 그녀가 저리도 오래 버틸 줄은 몰랐다. 지옥에서 올라오는 마기에 감염되고 있으면서도 용케 버티는 중이었다.
그때 뒤편 바위 위에 누워있던 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물들을 죽이며 다가오는 자가 있다.”
안타렐은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돌아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 자는 인간이 아니다.
라그록스가 보내온 악마. 지금 진행하는 ‘지옥화’의 책임자는 저자다.
처음 만났을 때는 중급 악마였던 자가 ‘지옥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강해지는 중이다. 아마도 ‘지옥화’가 끝나고 지옥의 문이 열린다면 상급 악마로 진화할 가능성이 큰 자였다.
그렇기에 이런 일을 맡은 것이겠지만.
안타렐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술법진을 가동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보조하고 있는 손가락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물들을 죽이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자가 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다.
안타렐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소.”
“설마 나보고 가라는 건 아니지?”
악마 멘제스터의 물음에 안타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준비가 덜 됐지만, 저들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안타렐이 작게 주문을 외자 술법진 위에서 제물이 되었던 사제들의 몸이 삐걱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제를 마기로 타락시켜서 만든 그릇에 하급 악마가 들어 있으니 어지간한 하급 악마는 간단히 죽일 정도로 강하다.
저들이라면 침입자를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안타렐은 술법진을 보조하던 손가락 하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처리하고 와. 오래 비워둘 수는 없으니 서둘러라.”
“예.”
손가락이 타락한 사제의 몸에 깃든 하급 악마들을 데리고 술법진을 떠나 침입자들을 처리하러 이동하자 안타렐은 마력을 더 끌어올리며 말했다.
“집중해라. 곧 ‘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