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지옥화
타룬 산맥에 들어서면서 일행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디에고는 그나마 체력이 되니 홀로 걸었지만, 테인은 더그가 업고 움직였다.
엠마는 아린의 등에 업힌 채로 이동했는데 그 선두에 선 에드는 심안으로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이동했다.
마물의 개체 수가 늘어났다고 했지만, 산맥의 초입에는 오히려 마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달랐다.
성기사 신시아가 산맥에 들어선 지 한달이 넘게 지났다고 했지만, 마물과의 전투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 찾은 마물과의 전투 흔적을 쫓아서 에드는 빠르게 길을 달렸다. 레인저의 기억에 더해져 심안을 이용해서 전투 현장을 찾고 그곳에서 다음 전투 현장을 향해 이동하는 에드는 그 움직임이 산맥의 깊은 곳을 향한 것을 보고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산맥에서 성기사나 되는 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론멜이 그만큼이나 신경을 쓰고 있다면 무사히 찾아주고 싶었다.
에드를 쫓으면서 론멜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뭘 알고 달리는 거야?”
“마물과의 전투 흔적을 쫓는 거니까 잘 따라와요.”
에드는 그리 말하고 속도를 더 높였다. 그 모습에 론멜이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뭐 잘못된 건 아니지?”
에드는 그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곳에 남겨진 흔적만 본다면 이상은 없었다. 마물들의 시체들은 사라졌지만, 전투 흔적에서는 시트라의 성기사답게 압도적이었다.
어지간한 마물로는 성기사를 죽이지 못한다.
에드는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이 뒤처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디에고가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런 디에고를 론멜이 업고 달렸다.
그렇게 이동 속도를 높였지만, 에드가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니니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에드가 걸음을 멈춘 것은 해가 지고 어두워진 뒤였다.
그곳에는 야영한 흔적이 있었다.
에드는 그곳에서 걸음을 멈춘 후에 말했다.
“더는 무리니 오늘은 여기서 쉬죠.”
에드의 말에 론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로 혹독한 훈련을 해왔던 론멜도 지금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신시아를 찾아간다고 해도 그녀가 위급한 상황이라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드는 그들을 잠깐 돌아보았다. 일행 중 지치지 않은 것은 아린과 브란트 정도였다. 나머지는 땀이 범벅됐는데 특히 더그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테인을 업고 이만큼이나 따라온 것이 대단하다 여겨졌다.
에드는 그들을 돌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영준비들 하세요. 방향만 잡아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에드의 말에 일행은 빠르게 야영준비를 시작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먹을 것을 준비하는 그들을 두고 에드는 걸음을 옮겼다.
밤이라고 해도 심안으로 전투의 흔적을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이동하면서 에드는 새삼 감탄했다.
처음 만났던 시트라의 성기사 론멜은 아린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 형편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니 신시아라는 성기사가 남긴 흔적은 제법이었다.
마물과의 싸움이 모두 치열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치열함도 치열함이지만, 전투에 능숙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실력에 차이가 날 수 있나 싶은 정도였다.
만나보고 싶어졌다.
에드는 두 곳의 전투 흔적을 더 발견하고는 방향을 확실히 잡았다.
그런데 흔적을 살피다 보니 이 정도 거리를 오면서 싸운 횟수를 생각하니 너무 많다.
아무리 마물이 늘어났다고 해도 이렇게 많을 수가 있나?
이 정도라면 그냥 뒀다면 일렌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에드는 가만히 일행이 쉬고 있는 야영지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둠에 휩싸인 산맥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조금 더 속도를 높여봐야겠다.
에드는 전날 생각했던 대로 이동 속도를 높이고자 했지만, 속도는 전날과 비슷한 수준에서 그쳐야 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에드.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
에드는 지금 심안에 잡히는 모든 마물을 먼저 달려가면서 화살로 잡아 죽이는 중이었다.
평상시라면 마물을 죽이고 현철 화살을 회수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씨가 말랐던 마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녀가 이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다 보니 신시아를 찾기 위한 타임어택이 되어 버렸다. 다행이라면 마물이 몰려오는 방향이 일정하다는 점이었다. 그 중심을 찾아가는 것이 가능해진 것.
그래서 에드는 일행을 이끌면서 선두에서 마물들을 쏴죽이는 중이었다.
에드는 그렇게 전진하던 중에 뒤따르던 이들의 숨이 차서 헐떡이는 것을 보고는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 모습에 다들 멈춰섰다.
에드는 그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잠깐 숨 좀 돌리죠.”
일행들은 말을 할 기력도 없는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드는 그런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심안으로 주위를 경계하면서 에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곳은 인간이 살지 않는 곳. 그런데 혈마석의 악마가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마물들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증상에 대해서는 기억에 있었다. 드루이드 드레드로 플레이 하다 보면 겪는 현상.
에드는 더그의 등에 업혀 와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테인에게 다가갔다.
“이 현상.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테인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산맥으로 진입한 채 업혀 온 것에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에드의 말을 들으니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설마 ‘지옥화’를 생각하는 건가?”
에드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루이드는 드레드로 플레이하다 보면 만나는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인데 ‘지옥화’의 부수적인 효과로 마물들이 급증한다. 다만 마물이 급증하기 시작하는 것은 ‘지옥화’가 일정 이상 진행된 다음이다.
마물이 급증했다는 것 자체가 ‘지옥화’가 적어도 7할 이상 진행되었다는 얘기.
게다가 그게 한 달 전에 신시아라는 성기사가 파견된 이유이니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지옥화’를 막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다. ‘지옥화’는 주변 환경 자체를 지옥처럼 바꾸는 것. 그렇게 되면 지옥과 동기화되면서 지옥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되면 그때는 악마들이 튀어나올 수 있게 된다. 열심히 악마 사냥을 해도 ‘문’이 한 번 열리면 많은 수의 악마들이 튀어나온다.
‘문’을 빨리 닿지 못하면 결국 대악마까지 튀어나오는 끔찍한 일이다.
트라비아 왕국에서 16년 전 ‘지옥화’는 드레드가 막았는데 설마하니 대륙에서 보자면 남쪽, 그것도 남서쪽에 치우친 곳에서 ‘지옥화’가 진행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옥화’는 어지간한 제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뭐가 제물인지 보다 ‘지옥화’를 막는 것에 집중해야죠.”
에드는 ‘지옥화’를 얘기하다가 아린을 돌아보았다. 드루이드 드레드가 ‘지옥화’를 만들던 자들을 박살 냈는데 그게 크로셀이다. 그리고 크로셀은 아린과도 악연으로 엮여 있었다.
‘지옥화’는 아린이 겪었던 일과 다른 일이라고 하나 이번 일은 반드시 크로셀과 연관이 있다.
에드의 시선을 받은 아린이 물었다.
“왜 그래요?”
“이번 일. 크로셀이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지금까지 달려가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옥화’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있어요. ‘문’을 열려는 거죠?”
“맞아요.”
“그렇다면 제 복수보다 ‘문’을 막는 것이 먼저예요.”
아린은 확실히 성장했다. 분노 때문에 앞뒤 재지 않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그 분노조차 삼킬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그 분노를 풀어야 할 대상을 만났을 때는 지금의 결심이 흔들릴 수 있지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게 정말 ‘지옥화’라면 신시아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더는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테인. 죄송하지만 일렌으로 돌아가 주셔야겠어요. 엠마와 함께.”
테인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화’에서 마물이 급증하는 것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는 얘기. 그러니 자신처럼 짐이 되는 이들이 함께 갈 수는 없었다.
“부디 ‘지옥화’를 막아주게.”
에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그를 돌아보았다.
“둘을 부탁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렌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물들의 습격이 뜸할 거다. 더그의 실력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실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돌아가는 것은 전력에 들지 못하는 더그와 테인, 엠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에드, 아린, 덱스, 브란트, 론멜, 디에고다.
“조심하게.”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테인을 업은 더그가 먼저 앞장섰고, 엠마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가 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가장 체력이 되는 것은 브란트였다. 대악마의 피를 받은 그는 체력면에서는 단연 발군이었다. 힘도 좋았고.
“디에고는 형님이 업어주세요. 날이 어두워지면 톰을 소환할 테니 그때까지만.”
“그래.”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지옥화’가 의심되는 이상 이제는 잠을 줄이면서 이동합니다. 단단히 각오하세요.”
에드의 말에 덱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지옥화’가 뭐야?”
“지옥의 ‘문’을 열기 위한 작업입니다. 마물이 급증하는 것을 봐서는 대략 7할 이상이 진행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잠을 줄여서라도 이 중심을 찾아가야 합니다.”
덱스가 그 말에 인상을 굳히고는 물었다.
“우리가 찾는 목표도 그곳에 있는 거야?”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절묘하니까요. 그리고 설령 혈마석의 악마가 연루되지 않았다고 해도 ‘지옥화’를 알아낸 이상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이건 시간 싸움이니까요.”
덱스는 의문이 풀렸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네가 다 잡을 거야?”
에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달리는 중에 방해가 되는 놈들만 잡는 겁니다. 곧 저 혼자 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마물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이게 정말 ‘지옥화’라면.”
“좋아. 이번에는 나도 날뛰게 해줘.”
“그럴 기회는 넘칠 겁니다.”
에드가 말을 마치고 활을 왼손에 쥔 채 손짓했다.
“속도를 올립니다. 잘 따라오세요.”
에드가 어제와 같은 속도를 유지한 것은 테인을 업고 있는 더그의 속도에 맞췄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마물들을 처리한다고 해도 그들을 돌려보냈으니 속도를 더 높일 수 있었다.
에드를 선두로 일행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타룬 산맥 깊은 곳에서 수많은 새가 일시에 날아올랐다. 산맥의 모든 동물도 그때를 같이해서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쥐부터 시작해서 사슴에 이어 야수들까지 자연재해를 만난 것처럼 도망치며 산맥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