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성화의 효과
론멜의 성검을 잡아 던질 때는 심증만 믿고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기어시가 있으니 만약 상대가 반응하지 못한다면 코앞에서 멈출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이렇게 중량이 나가는 검을 날린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걸 믿고 벌인 일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 검에 반응했다. 이기어시는 화살을 이용하는 공격이다 보니 베기는 써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베는 것까지 펼쳐 보았다.
그렇게 날아든 검격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다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공간의 굴절.
그런데 그 뒤로 보여주는 능력을 보니 시야에 닿는 부위는 얼마든지 공간을 비틀 수 있었고, 이동할 때는 보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부위의 공간을 접어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쫓을 수 있었다. 자신의 민첩에 론멜의 성검이 상대의 힘을 흡수하면서 전해주는 것까지 더해지니 공간 이동하는 악마를 쫓을 수 있었다.
펼치는 능력을 보면 이 놈도 상급 악마일 가능성이 컸다. 5만 명의 죽음에 연관된 악업은 사실 3군단 사령관인 이놈이 더 많이 챙겼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성검을 들고 공격하는데 그걸 피해서 쌍둥이 탑의 다른 탑 정상으로 공간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저런 사기적인 능력도 있나 싶었다.
에드는 탑에서 내려 상급 악마를 쫓아가면서 자신들의 무기를 거둬간 기사들이 있는 곳을 스쳐 지나가며 칠채비도를 챙기고 탑을 올랐다.
탑의 외부에 나와 있는 창문을 밟으면서 올라선 에드는 아직도 도망가지 않고 서 있는 악마를 볼 수 있었다.
“넌 대체···.”
이 와중에도 입을 벌리는 악마를 향해 칠채비도를 날렸다. 곧장 따라붙으려고 한 순간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상대와의 간격을 보는 능력은 심안보다 먼저 악마가 전방의 공간 전체를 찌그러트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칠채비도에 집중했다.
칠채비도는 페트라의 공간 굴절에 비틀려 날아가다가 돌아와 그의 어깨에 박혔다. 왼쪽 어깨에 상처가 있어 반응이 늦을 거라는 생각이 옳았다.
에드는 왼쪽 어깨가 석화되는 페트라를 향해 돌진했다.
조금 전에 펼친 공간을 찌그러트리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그 정도 힘을 썼다면 아무래도 재사용 대기 시간이 있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달려드는 에드를 보고 과연 페트라는 작은 공간을 비틀었다.
그 간격을 읽은 에드는 지그재그로 뛰며 모조리 피해냈다. 활이 있었다면 이렇게 다가갈 일은 없었겠지만, 상성 상 화살로 상대했다면 상당히 까다로웠을 상대였다.
성검은 상대의 힘과 마력을 빼앗아 주지만 상대가 상처를 바로 제거하면 그 힘과 마력의 양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다.
그러니 가능한 연속해서 상대를 베어 죽여야 하는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숨통은 자신이 끊어야 했다.
에드가 거리를 좁히자 페트라가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에드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페트라가 눈을 감은 순간 탑의 정상이 모두 놈의 간격 안에 들어갔다. 이건 피할 겨를도 없다.
에드는 전력을 다해서 땅을 박차며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드드득.
탑 정상 전체가 뒤틀린다. 그리고 그건 에드도 피할 수 없었다.
에드의 왼팔과 오른 다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간격을 보는 에드는 체력을 높이기도 했지만, 상대의 공격을 허용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팔과 다리가 꺾여 나가는 통증에 인상을 굳혔지만, 그보다 빠르게 에드의 검이 페트라의 목에 닿았다.
상급 악마가 펼친 치명적인 한 수. 지금까지 피하기만 하다가 자신을 끌어들인 후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간 전체를 비틀고 찢어내는 공격.
페트라의 필살기라도 봐도 좋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날아든 검은 페트라의 목을 찔렀다.
설마 그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가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페트라가 뒤늦게 대응했지만, 그 정도로 피할 수 있는 에드의 검이 아니었다.
촤악!
목에 닿는다 싶은 순간 이미 검을 기울여 상대의 목을 길게 베었다. 반쯤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질 때 에드는 왼발로 땅을 딛고 성검을 다시 휘둘렀다.
성검이 전해준 힘과 마력이 상당해서 그대로 상대의 목을 잘라낼 수 있었다.
페트라의 목이 잘려 허공에 떠올랐을 때 놈의 눈이 떠졌다. 그 눈에는 불신의 기색이 가득했다.
하긴 자신의 필살기 안에서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앞으로 나아간 에드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왼팔과 다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기도 했지만, 피부도 터져서 전신이 피 칠갑을 한 상태였다.
에드는 성검을 비스듬히 내린 채 바닥에 떨어지는 페트라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상급 악마의 경험치는 역시나 짜릿하다.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단번에 7할에 가까운 경험치가 차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젤타 왕국에서 이 놈이 끝이 아니라 중급 악마라면 둘 이상 상급 악마라면 하나만 더 잡아도 레벨이 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일행들이 속속 올라왔다.
가장 먼저 올라온 아린은 눈이 크게 커진 채로 에드에게 다가와서는 신성 회복 주문을 걸었다.
왼팔과 다리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에드는 바닥에 누웠다.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래도 회복이 시작되니 고통이 조금씩 줄고 있었다.
“왜 혼자서 무리했어요?”
“멀리 도망치면 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공간을 접어서 도망치는 놈이었다. 놈이 작정하고 도망치는 것에 집중했다면 아무리 에드가 빨라도 잡지 못했을 정도였다.
상급 악마였기에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마지막 승부수가 통할 거라 여긴 것이겠지.
에드도 높은 체력이 아니었다면 왼팔과 오른 다리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으리라. 전신이 뒤틀리고 찢겨 죽을 수 있었다.
아린이 나직한 한숨을 내쉴 때 브란트가 론멜과 덱스를 데리고 정상에 도착했다. 덱스는 바닥에 누운 에드의 팔과 다리를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이 정도로 당한 건 처음 보는데?”
“함정에 당했어.”
“함정을 파고도 뒈졌다는 거네.”
덱스는 그리 말하면서 낮게 투덜거렸다. 무기를 다 빼앗긴 상황에서는 자신의 전력이 급감한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장비들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무기가 아니라 신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들로.
덱스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에 론멜은 에드에게 다가와서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증거는 있었습니까?”
“심증만 있었습니다.”
론멜은 헛웃음이 나왔다. 마젤타 왕국 서열 7위를 향해 검을 던지는데 고작 심증만 가지고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치자면 아린도 마찬가지다. 악마라는 것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해머를 불러들여 공격에 가담했었으니까.
그녀의 신성 공격에 악마라는 것이 발각되기는 했지만, 이 둘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다.
에드는 오른손으로 아린의 손목을 잡고는 말했다.
“시간만 지나면 회복할 것 같아요. 우선 혈마석을 확인하죠.”
체력에 많이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일반인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되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는데 마스터 팔라딘 급의 신성 회복 주문을 받으니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뒤틀렸던 뼈와 근육이 회복되는 과정은 에드에게 다시 한번 결심하게 만들었다. 다음에는 이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잡아 죽이겠다는 결심을.
혼자서 잡을 수 있지만, 이렇게 다치면서 잡을 거라면 차라리 다 같이 잡는 것이 좋다. 막타는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에드가 회복하는 사이에 아린은 페트라의 배를 갈라 혈마석을 꺼냈다. 아린이 혈마석을 쥐고 기도를 올리는 동안 탑의 옥상으로 올라오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엠버와 그의 수호 기사들이 올라왔고, 그 뒤로 테인과 디에고, 엠마도 따라 올라왔다.
디에고가 달려와 에드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형!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좋아지고는 있지만,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회복된 건 아니었다.
그때 엠버는 배가 갈린 채 죽은 페트라의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확실히 죽은 건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론멜이 대신했다.
“예. 죽었습니다.”
엠버는 그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실각이 최선이라고 여겼는데 죽었다. 그것도 악마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수고했네.”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 말에 엠버의 시선이 에드를 향했다. 대뜸 상대를 향해 검부터 던졌던 이였다.
“놀라운 실력이더군. 이름이 뭔가?”
에드는 몸을 일으켰다. 팔과 다리 모두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전투는 무리지만 움직일 수는 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에드라고 합니다.”
“에드. 자네가 그 악마 사냥꾼이군.”
“그렇게들 부릅니다.”
엠버는 흥미가 돈다는 얼굴로 페트라의 시체를 보며 물었다.
“저자가 악마라는 것을 알아보았나?”
“예.”
론멜이 경악하든 말든 에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드의 대답을 들은 엠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거침없이 공격하는 것을 보니 확신이 있는 것 같더군. 게다가 그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네.”
사실 엠버는 에드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다만 수호 기사 넷이 동시에 달려들었음에도 유유히 그들을 빠져나가 페트라를 쫓았다.
뭔가 휙휙 지나가는 것만 느껴졌는데 그 악마가 저기 죽어 있는 것을 보니 새삼 그 실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괜찮다면 저녁이나 함께 하지.”
“그리하겠습니다.”
엠버는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뒤돌아서 내려가며 명령을 내렸다.
“임시로 3군단 사령부는 내가 관리하겠다. 사령부에 소속된 이들에게 연통을 넣어 이리 오라 전해라. 악마 사령관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봐야겠다.”
“예.”
멀어지는 엠버를 보면서 에드는 마젤타 왕국에도 피바람이 불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라그록스가 왜 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트라비아 왕국 너머에 혈마석을 뿌렸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 끝이 슬슬 보이는 것 같으니 말이다.
5만 명의 죽음에 관련된 악업으로 상급 악마가 되었을 자들은 죽었고, 더 악마가 있다고 해도 상급 악마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상급 악마라는 것이 어찌나 귀한지 막상 찾아보면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연달아 둘이나 만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덕분에 쏠쏠한 재미를 보았지만.
에드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아린의 손에서 혈마석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아린은 론멜을 돌아보았다. 론멜은 그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아스트론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시트라의 종이라고 아스트론을 무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성화를 일으켰다.
페트라의 몸에서 일어난 푸른 성화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이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를 시트라에게 바쳤을 때도 하늘까지 검은 불꽃이 솟구쳤었다. 상급 악마부터는 시트라도 아스트론도 기쁜 마음으로 제물을 받아서 그런 걸까?
그렇게 솟구친 푸른 성화에 페트라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바라보며 에드는 왼손을 들어보았다. 천천히 주먹을 쥐어 본 에드는 그렇게 페트라가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빛의 기둥을 보았다.
그 빛이 아린을 비추면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문득 시선을 돌리다가 페트라의 시신이 성화에 타고 잿가루만 남은 자리에 남은 칠채비도를 바라보았다.
석화의 권능이 담긴 칠채비도. 그 검은 검날에 다마커스처럼 하늘빛 물결무늬가 새겨졌다.
시트라의 성유물에 아스트론의 신성력이 깃든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