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미친놈
론멜은 에드가 자신의 검을 뽑아 던지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한줄기 벼락처럼 날아드는 성검. 그걸 보는 순간 마치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성기사라고 해도 마젤타 왕국 서열 7위인 3군단 사령관을 죽인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마등이 지나가듯 시간이 느려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악마라면 반드시 반응할 것이라 여겼다.
다른 무기도 아니고 성검이다. 상대의 힘을 빼앗아 오는 성유물.
게다가 시트라의 권능으로 상대는 입은 상처를 회복하기 힘들다.
악마라면 절대로 그냥 맞아줄 수 없다. 어떻게든 막아낼 터.
무엇보다 자신은 시간이 느려지게 느껴져서 그런 거지 에드가 던진 검은 뒤에 있던 수호 기사들이 막아낼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페트라가 고개를 트는 것이 보였다.
페트라가 3군단 사령관이라고 하지만 그의 실력이 에드가 지척에서 던진 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그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날아가던 성검의 궤적이 바뀌었다.
고개를 트는 정도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페트라의 눈이 커지면서 그의 앞으로 공간이 일렁였다. 그것은 감각의 교란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공간이 굴절했다.
그렇게 날아들던 성검이 그 굴절을 견디지 못하고 페트라의 옆으로 날아갔다. 페트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성검은 그를 지나쳐가는가 싶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직선으로 날아가 찔러가던 검이 방향을 틀며 베어오는 통에 페트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러났다.
그 잠깐의 공방.
정말이지 눈 한 번 깜빡일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페트라가 물러나며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 앞에 나타난 공간의 굴절이 성검의 궤도를 틀어 회의실 탁자를 베고 바닥에 박혔다.
그제야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아린!”
그때 에드가 튀어나가며 소리치자 아린이 오른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뭐하는 건가 싶었는데 에드가 바닥에 박힌 성검을 집어 들 때 벽이 부서지며 아린의 해머가 날아와 그녀의 손에 잡혔다.
아린은 해머를 손에 쥐고는 곧장 에드의 뒤를 따라갔다.
그사이 에드는 페트라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 에드의 앞으로 네 명의 수호 기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네 명의 수호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뽑아 휘두른 검이 에드를 난도질해 왔다. 에드는 그렇게 날아드는 검격을 허공에 바닥과 수평으로 누우면서 모조리 피해내고는 그대로 페트라를 찔러 갔다.
페트라는 입을 열어 상대를 꾸짖으려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크게 소리치려고 할 때 이미 성검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공간 굴절을 다시 사용했다.
성검이 공간 굴절에 비틀려 옆으로 지나갔다. 페트라는 그렇게 성검을 흘려냈다고 여기고 오히려 반격을 가하려고 했는데 왼쪽 어깨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페트라는 그제야 저 성검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시트라의 성검.
파괴의 권능이 담겨 있어서 어깨 부위가 재로 변해 흩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황급히 손을 들어 어깨의 상처를 도려냈다. 상처가 훨씬 커지면서 어깨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었다.
에드가 재차 성검을 휘둘러 왔으니까.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성검이라는 것을 깨달은 페트라는 자신의 뒤편 공간을 접었다.
쉬악.
페트라가 회의실의 벽에 닿도록 물러났을 때 조금 전 그가 있던 공간이 잘려나갔다.
살다살다 저리 빠른 검을 쓰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검의 변화는 없는 단순한 공격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검은 자신의 능력으로도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상당히 거리를 벌린 덕분에 입을 벌릴 시간은 있었다. 아니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에드를 뛰어넘어 회의장 천장에 닿을 듯 도약했던 아린의 해머에 맺힌 강대한 신성력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옆으로 공간을 접으며 몸을 피해 아린의 공격을 피했다고 여겼을 때 그녀의 해머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공격은 회의실 바닥에 흠집조차 내지 않았다.
다만 그 해머에 깃들어 있던 강대한 신성력이 회의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크윽!”
페트라는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피하지 못해서 신성력에 노출되었다.
페트라는 신음을 흘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을 따르던 수하도 마찬가지였다.
페트라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의 피부는 거칠었다. 손에 닿는 감촉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
악마의 피부. 거칠지만 한없이 질긴 그 피부가 밖으로 드러났다.
변신이 풀렸다.
지난 16년간 간신히 숨겨왔던, 그래서 간신히 이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게다가 이번에 엠버 왕자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건 기회라고 여겼다. 왕도에는 시트라 교단의 총본회가 있으니 교황은 물론이고 마스터 팔라딘이 있어 그곳에서 활동할 수 없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
이곳에서 엠버 왕자의 몸을 빼앗는다면 3군단이 아니라 다른 군단의 힘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왕도에 가지 않고 편지만으로 연락하며 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 모든 것은 저 미친놈 때문이다.
저들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이번에 얻은 악업으로 인해서 상급 악마로 올라선 자신의 능력은 저들의 눈을 가리고도 남았다. 저들의 감각을 교란하고서 어떻게 하나 지켜보려고 했다.
그건 일종의 유희였다.
그런데 확신도 없이 대뜸 성검을 뽑아 날린 미친놈.
그건 분명 미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그리고 그자가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은 찢어 죽여야겠다. 그래서 달려드는 그자가 점유한 공간을 비틀었다. 공간과 함께 놈도 비틀릴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급하게 공간을 접어 옆으로 피했다.
촤악.
조금 전 서 있던 공간이 베였다.
페트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육체 능력이 아니라 공간을 다루는 능력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능력은 즉발성이다. 자신이 원하는 곳의 공간을 파악하는 순간 그 공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자신이다.
그런데 지금 보여준 저 미친놈은 자신의 눈으로도, 감각으로도 쫓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즉발성이라고 해도 공간을 특정 짓고 그곳을 어떻게 할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사치였다.
이런 짧은 사고의 순간에 이미 상대는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자와 반대편으로 달려드는 이는 아스트론의 성기사다.
페트라는 공간을 접고 엠버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엠버를 인질로 잡고 도망쳐야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곳으로 이동한 순간 페트라의 몸을 칭칭 감는 사슬이 있었다. 자신이 도달한 순간에 이미 사슬이 그 공간을 휘감고 있었으니 마치 사슬이 휘감는 공간으로 이동한 꼴이다.
자신을 묶은 자를 향해 시선을 돌려서 그 목을 비틀어 버리려고 했다.
좁은 공간을 설정하면 그 공간에 대한 지배력이 올라가 더 큰 위력을 낼 수 있기에 한 선택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상대는 몸을 움직여서 그걸 피해냈다.
공간의 비틀림은 눈으로 쫓을 수 없는데 어떻게 된 건가 파악할 틈도 없었다. 다급하게 공간을 접으며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쫓아오던 미친놈 손에 죽을 뻔했다.
“크윽!”
그런데 제대로 피했다고 여겼는데 왼쪽 가슴 아래쪽으로 길게 베였다. 손톱으로 그 부위를 도려내느라 왈칵 피가 쏟아졌다.
피를 쏟아내면서도 재차 공간을 접어서 피하지 않았다면 날아오는 성기사의 해머에 맞았으리라.
자신의 뒤편 벽이 박살 나는 것을 보니 저 해머도 보통 해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오싹함이 들어 본능적으로 탑의 외부로 공간을 접었다. 해머로 벽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렇게 몸을 피한 페트라는 자신이 있던 곳을 지나가는 미친놈을 보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베였으리라.
상급 악마가 되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라그록스도 아스트론과 3영웅의 눈을 피해 마젤타 왕국에 있는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기회를 잡은 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3영웅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놈들에게 죽을 판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잃게 되더라도 일단 몸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재차 공간을 접을 때 자신이 빠져나온 곳으로 뛰쳐나오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높이를 생각하면 저 미친놈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처럼 공간에 관련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저게 무슨 짓인가?
코웃음을 치며 쌍둥이 탑의 정상으로 이동했다. 장거리의 공간을 접어서 이동하면 재사용하는 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지금은 확실히 피해야 했다.
그렇게 이동한 페트라는 바닥에 떨어지는 놈을 바라보았다.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뒈지겠다 싶었지만, 그냥 떨어지게 둘 마음은 없었다.
놈의 목이 있는 공간을 비틀었다. 그런데 그걸 또 몸을 웅크리며 피해냈다.
그걸 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걸까?
그럴 리는 없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상대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 높이에서 떨어져서는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 곧장 튀어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었을 때 그는 탑의 입구에 있는 이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어어 하는 사이에 그들을 돌파하는가 싶더니 탑의 벽을 타고 오르고 시작했다.
탑의 외벽에 나 있는 창틀을 밟고 도약하는데 쭉쭉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저쪽 탑에 난 구멍으로 속속 뛰어내리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팔에 사슬을 두른 자가 옆구리에 시트라의 성기사와 한 사내를 끼고 뛰어내리고 있었다.
저 높이가 인간이 막 뛰어내려도 되는 높이인가? 죽을 텐데라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반대편 탑에서 푸른 성광을 머금은 해머가 날아오고 있었다.
옆으로 몸을 피해서 그걸 피해내는 사이에 이번에는 아스트론의 성기사도 탑에서 뛰쳐 내렸다.
쿵!
먼쩌 뛰어내린 자가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는가 싶더니 곧장 튀어왔다. 그리고 아스트론의 성기사도 바닥에 요란하게 내려서더니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 탑의 정상에 미친놈이 도착했다. 해머로 시선을 끄는 잠깐 사이에 탑의 정상까지 올라온 놈의 왼손에는 비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성검과 비도.
장검과 단검을 든 놈을 향해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놈의 왼손이 흐릿해지는 순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비도가 날아들었다. 성검이 날아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공간을 굴절하고 놈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자신의 앞 공간 전체를 비틀었다. 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의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지리라.
그런데 놈은 어째서인지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공간을 비틀거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다만 굴절시켰던 비도가 어느새 왼쪽 어깨에 박혀있었다. 분명 날려 보냈다고 여겼는데 어째서인지 어깨에 박혔다.
처음에 성검에 입은 상처가 아니었다면 반응했을 텐데 그때 근육을 도려냈던 탓에 반응이 늦어서 비도를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비도가 박힌 왼쪽 어깨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고 있었다.
페트라를 향해 놈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