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시트라의 성검
시트라의 성검.
성유물인 시트라의 검에 맞은 부위는 마력으로 억누르려고 해도 빠르게 바스러지고 있었다. 이건 파괴의 신성력에 의한 것.
베인 상처다 보니 바스러지는 범위도 속도도 빨랐다.
단순히 피륙의 상처가 아니다.
마력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상처 만이 아니라 마력까지 파괴하는 끔찍한 신성력.
그건 상급 악마의 격으로도 버틸 수 없었다.
루카스는 뒤로 물러나며 왼손으로 옆구리를 잡아 뜯었다. 검에 베인 곳을 잡아 뜯다 보니 옆구리에서 주먹보다 크게 살점을 뜯어내야 했다.
콸콸 쏟아지는 핏물 속에 루카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성유물 때문에 죽을 뻔했다. 상처 부위 근처를 전부 뜯어내어 파괴의 신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검을 허용한 대가로 많은 것을 잃었다.
그 분노가 가슴에 자리 잡자 혈마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 핏빛 혈관이 도드라졌다.
이 힘은 가능한 쓰고 싶지 않았다. 이 힘을 깨우면 자신이 아니게 되니.
하지만 이 힘까지 꺼낸 이상 오늘 살아 돌아갈 자는 없다.
분노한 루카스의 레이피어가 날아들었지만 위태위태하게 레이피어를 막아내는 아린이었다. 그것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론멜은 바닥에 쓰러진 채 길게 숨을 토해냈다. 자신의 성검이 남긴 상처를 스스로 뜯어낸 악마는 오히려 더욱 날뛰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상처에서 번지는 통증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검에 당한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사슬을 움켜쥐고 상대의 움직임과 마력을 봉인하고 있는 브란트도, 쇄골을 찔린 채 물러났다가 눈이 반쯤 돌아간 채 달려드는 덱스도.
이 고통을 참고 싸운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마검은 상처를 악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통만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렇게 나자빠져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론멜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덱스!”
론멜은 그동안 함께 손발을 맞췄던 덱스를 소리쳐 불렀다. 전투 예측으로 어렵게 싸움을 유지하던 덱스는 기회를 봐서 뒤로 물러났다.
덱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서는 물었다.
“왜?”
“안 아프냐?”
덱스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가능한 상처를 입지 않은 채 싸움을 끝내왔지만, 그렇다고 상처 없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빡치는 게 고통을 앞지른 상황이지.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할말 없으면 간다.”
론멜은 그에게 성검을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싸워.”
“이걸 왜?”
“들어 봐.”
론멜이 건넨 검을 출혈의 검 대신 받아든 덱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검에 당한 상처는 회복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상처를 잡아 뜯어내는 것을 보았었다.
그런데 이걸 쥐는 순간 몸에 마력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크기도 범상치 않았다. 덱스가 놀라서 바라보자 론멜이 설명해줬다.
“상대를 베면 그자의 마력과 체력까지 흡수할 수 있는 검이다. 일시적이지만 그걸 이용해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지. 싸우면 싸울수록 상대를 압도할 수 있게 해주는 성검이다.”
덱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채 성검을 틀어쥐고 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론멜은 헛웃음을 흘렸다.
점점 심해지는 고통도 덱스는 분노로 변환해서 적을 베는 원료로 쓰는 중이다.
보고 배워야 할 판이었다.
브란트는 봉인의 사슬을 통해서 상대를 봉하면서 고통을 감내했다. 그런데 봉인의 사슬이 상대의 마력을 봉하는 통에 오히려 문제가 생겼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지금까지 이 사슬의 힘을 제대로 몰랐다. 자신의 힘을 봉하는 데만 쓰는 줄 알았던 사슬이 다른 힘을 봉하다 보니 자신의 내면에 깃든 힘을 봉하는 힘이 약해졌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힘이 더 커졌고, 상대를 봉하는 데도 그 힘이 많이 작용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급격하게 커지는 중이었다.
-죽여라!찢어죽여!내게맡겨라!저자의목을비틀어뽑아그피를마시겠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끔찍할 정도의 목소리에 입술을 짓씹던 브란트는 고통보다도 목소리에 저항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에드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상대의 마력을 봉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의 검은 빨랐다. 사슬이 견고하게 엮여 있어 쉽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아린을 몰아치는 중이었다.
아린을 돕기 위해 화살을 날리던 에드는 문득 심안에 잡히는 부자연스러움을 읽었다. 그건 사슬을 붙들고 있는 브란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브란트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그걸 의지로 막아내는 중인 것 같았지만, 가만두면 또 폭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마 지금은 버티고 있었다.
브란트를 내보내지 않을 거라면 지금 승부를 낸다.
에드는 성유물 화살 두 발을 시위에 걸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빙결의 활이 품은 빙결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빙결의 활에 새하얀 냉기가 맺히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에드의 견제가 사라진 동안 아린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변화가 생겨났다. 덱스가 뛰어들었는데 그의 움직임이 전과 달랐다.
그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고, 그의 검은 위력적이었다.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론멜의 검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트라 교단의 성유물인 성검.
신속의 검 덕분에 날렵했던 덱스가 성검을 들자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아린을 공격하는 루카스에게 약점이 있다면 왼쪽 옆구리를 뜯어내느라 그쪽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덱스는 집요하게 그쪽을 노리다가 왼쪽 허벅지를 베었다.
이미 성검이 어떤 종류인지 깨닫고 있던 루카스는 허벅지의 근육도 뜯어냈다. 잠깐 사이에 마력이 상당량 소멸되었다.
혈마석의 힘을 깨운 상태라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마력의 손실이 컸다. 감히 자신에게 상처입힌 자를 향해 레이피어를 휘둘렀는데 뒤로 백덤블링하며 레이피어를 피해낸 덱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거지!”
다시 달려드는 덱스의 움직임이 전보다 더 날카로워서 루카스도 더는 경시할 수 없었다. 루카스의 레이피어를 신속의 검으로 흘려내며 다가온 덱스가 휘두른 시트라의 성검이 날아들었다.
이미 두 번이나 당했기에 얼마나 까다로운 검인지 알고 루카스가 몸을 틀어서 공격을 피했다. 덱스의 공격을 피하느라 루카스는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오직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린의 반격을.
근거리에서 폭발적으로 튀어나가며 찔러넣은 성검에 루카스가 레이피어를 휘둘러 흘려내려 했지만, 자세가 흐트러져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린도 성검의 보호막을 생성했는데 그것이 성검만 감싸고 있어서 레이피어가 튕겨 나갔고, 아린의 성검도 루카스의 왼팔을 베었다.
루카스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악업을 쌓고 상급 악마가 된 데다가 혈마석의 힘을 깨우고도 이렇게 몰리니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으아아악!”
괴성을 내지른 루카스가 자신의 다리를 향해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사슬에 묶인 다리가 잘려나간 순간 마력이 회복되었다.
잘려나간 다리가 다시 자라났지만, 성검에 입어 파괴된 부분은 넘치는 마력과 회복력으로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때 두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루카스는 이 화살이 보통 화살이 아님을 알기에 신중하게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그때 아린이 방패로 전면을 가리고 돌진했다.
레이피어로 화살을 쳐내면 방패 돌진을 막지 못한다.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공격을 맞을 생각은 없었기에 루카스는 전신의 마력을 방출하며 자신의 전신을 가릴 마력의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러나 날아든 화살은 단숨에 마력의 보호막을 뚫고 들어왔고, 레이피어로 쳐내는 순간 오히려 무기를 흘려내듯 레이피어를 타고 넘어와 왼손이 잘린 왼팔뚝을 들어 올려 막았다.
쩌저정!
화살에 담긴 냉기가 어찌나 강했는지 마력으로 감싼 팔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렇게 몸이 굳어졌을 때 날아든 화살은 심장에 정확히 꽂혔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 날아든 화살이 그대로 눈을 뚫고 뇌에 박혔다.
그것이 루카스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들어오는 경험치가 놀라울 정도로 많아서 레벨이 단번에 올랐다. 그러나 기쁨을 누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에드는 그대로 브란트를 향해 돌진했다. 브란트는 사슬이 잘려나간 순간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는 것 같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형님!”
브란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에드의 주먹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브란트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던 에드는 긴 숨을 토했다.
미안하지만 일단 재우고 봐야 했다. 그렇게 기절시킨 브란트의 몸을 그의 팔에 두르고 있던 사슬로 꽁꽁 묶는 동안 아린이 론멜의 상태를 살폈다.
론멜은 간신히 혼절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 루카스가 얼음덩어리가 되고 나자 그대로 혼절했다. 그런 론멜을 아린이 회복 주문을 걸어주며 말했다.
“고통의 저주가 걸렸네요. 이 저주에 걸리고 용케 싸웠네요.”
그때 덱스가 다가와 성검을 내려놓고는 드러누웠다.
“아파! 씨발! 너무 아프다고!”
전투에 눈이 돌아가 고통도 잊고 싸웠던 덱스도 전투가 끝나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아린이 저주를 해주 해주며 말했다.
“끔찍한 악마네요. 고통의 저주는 상대에게 오직 고통만을 주기 위해서일 뿐 다른 효과가 없는 데도 이런 저주를 걸어놓은 검이라니.”
아린은 브란트에게 다가와 해주 주문을 외웠다.
악마의 피가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신성력을 사용해서 좋을 것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해주 주문을 거니 그의 전신이 격렬하게 반응했지만, 그래도 깨어나지 않고 해주에 성공했다.
혼절한 브란트의 표정을 내려다보던 아린이 물었다.
“상급 악마는 확실히 죽은 거죠?”
에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혈마석을 꺼내요.”
아린은 그 말에 루카스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러 배를 가르고 혈마석을 꺼냈다. 혈마석을 쥔 채로 아린이 손을 쓰는 사이에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와의 전투는 치열함에 비해서 그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에드는 바닥에 드러누운 덱스를 바라보았다. 덱스는 론멜이 준 성검을 그의 옆 바닥에 던져 꽂아놓고는 그냥 누워 있었다.
상급 악마인 루카스가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그리고 그건 브란트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성검의 영향이 컸다.
성검에 당한 루카스는 약해지고, 성검을 쥔 이는 강해졌으니까.
탐이 나는 성유물이다.
덱스가 그렇게나 잘해줄지는 몰랐다. 전투 예측도 크게 한몫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덱스의 움직임이 빨라진 덕분이었다. 그 잠깐은 민첩에 투자한 에드에게 비견될 정도로 빨라졌다.
전투 예측이 더해진 덱스의 움직임은 루카스조차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검격에 당했다.
그 검격이 아니었다면, 아린의 찌르기가 아니었다면, 에드도 기회를 잡지 못했으리라.
아린이 마지막에 방패 돌진까지 하며 호흡을 맞춰줬기에 공을 들여 준비한 두 발의 화살을 모두 맞춰서 잡을 수 있었다.
에드는 혈마석을 추적하는 아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앞에 놓인 루카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펠만 국왕을 죽이고 레벨이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루카스를 죽이고 레벨이 올랐다.
상급 악마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