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위기
후안을 보고 여인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위 격을 지닌 사령을 두고 있다면 무리해서라도 가져야겠는걸?”
악마의 기운을 쫓아왔더니 자신을 찾아온 라그록스의 새로운 악마가 아니라 반쪽짜리였다. 하지만 사령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니 그 기운을 빼앗을 생각이었는데 튀어나온 것이 상급 악마의 사령이다.
아직 술사의 실력이 미천해서 그 격을 고스란히 발휘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 정도라면 사령의 기운을 빼앗아 올 것이 아니라 데려다가 현혹시켜서 부려 먹는 것이 이득이다. 자신이라고 해도 상급 악마의 사령은 얻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저 사령.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을 보니 자의적으로 계약했다는 뜻.
그 말은 저 아이가 반쪽짜리인 것과 연관이 있을 터.
여인이 교태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잡종이라니?”
-몸에 담아두지 못할 힘을 두 개나 담고 있군. 본인의 힘까지 세 가지 힘이 뒤섞여 있으니 잡종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여인은 단번에 자신이 가진 힘을 읽어내는 것을 보고 확실히 상대가 상급 악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 탐이 났다.
“그걸 또 알아보네?”
미소를 지은 그녀가 허리띠를 풀자 하염없이 길게 늘어나며 풀려났다.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허리띠를 보고 후안이 인상을 굳혔다.
-너 그건 어디서 난 거냐?
여인이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본 거야? 염사편이야.”
비단처럼 보이지만 채찍이고, 불꽃의 기운을 품고 있어 휘감기거나 스치기만 해도 불길에 휘감기는 유물이다. 다루기가 어렵지만 다룰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은 무기가 흔치 않다.
저건 속성 무기이기 때문에 사령에게도 통한다. 톰을 이용했다가는 오히려 역소환 당할 수가 있으니 자신이 나서야 했다. 다만 디에고가 성장했다고 하지만 자신이 전력을 다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크리스탈 해골에 사령이라도 모아 놓았다면 해볼 만하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없는 상황.
하지만 그냥 당해줄 수는 없었다.
-버텨라.
그 말과 함께 후안이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커다란 파동이 일어났다. 그 파동에 여인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인상을 잔뜩 굳혔다.
이건 뭔가 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뭔가가.
디에고는 쭈욱 빨려가는 마력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자신이 쓰러지면 엠마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마력을 한계까지 뽑아내는 중이었다. 그때 사방에서 사령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죽는 이들은 많았고, 그들 중 사령이 되는 이들도 있었다. 못해도 수십은 되는 사령이 모여들자 후안도 인상을 굳혔다.
어쩔 수 없었다.
사령을 이용한 사령술은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지만 지금은 위기를 극복하려면 사용을 주저할 수 없었다.
후안이 불러들인 수십의 사령들이 그의 머리 위에서 하나로 모이는 것을 보고 여인은 염사편을 휘둘렀다. 이대로 뒀다가는 손을 쓰기도 전에 죽을 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마치 뱀처럼 날아드는 비단의 주위로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날아드는 염사편을 보면서 후안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사령 세 개가 움직였다.
사령 하나에 방패 하나. 그렇게 세 개의 방패가 나타나 염사편을 막았다.
꽈앙!
과연 사령을 연료로 하는 방패는 그 단단함이 상상 이상이라 염사편의 일격을 감당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일격에 담긴 힘이 생각 이상이라 일격에 방패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안은 디에고의 마력이 감당하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모은 사령들을 하나로 벼려냈다. 그것은 두개골 모양이 되더니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사령들을 연료로 쓴 만큼 마력의 소모는 작았지만, 위력 하나라면 확실한 사령술이었다.
여인은 그걸 보고는 염사편을 휘둘렀다. 뱀과 같은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든 염사편이었지만, 그 궤적을 모조리 피한 채 날아가는 해골이었다.
여인도 그제야 위험함을 느꼈다. 그녀가 손목을 가볍게 떨치자 염사편이 그녀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강대한 마력을 뿜어내자 그것은 불붙은 구와 같은 형세로 공격을 방어했다.
꽈앙!
염사편이 찢겨 나갈 정도로 강한 폭발과 함께 여인은 사정없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빈민가의 건물을 세 채나 부수면서 날아갔지만, 후안의 안색은 잔뜩 굳어 있었다.
조금 전의 일격은 지금 그가 펼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령술이었다. 급하게 끌어모은 사령이라 잡스러운 기운이 많이 섞여서 위력도 떨어졌지만, 중급 악마라고 해도 한방에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솟구쳤고, 그 안쪽에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찢긴 옷 사이로 보이는 속살이 붉게 물들어 있는데 마치 루비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인은 예상대로 혈마석을 복용한 여인이었고, 덕분에 조금 전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상당한 피해를 본 것으로 보였지만, 지금 그녀는 충분히 디에고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렇게 격이 낮아진 상태로 이만한 위력이라니 더 탐이 나잖아.”
미소를 지은 여인이 그대로 돌진해 왔다. 염사편은 이곳저곳이 찢어져 있어서 제 기능을 발휘하기 힘들었지만, 염사편이 아니었다면 저리 멀쩡하지도 못했을 터.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후안이 다급하게 사령의 방패를 옮겼다.
“이까짓 걸로!”
콰창!
핏빛 기운이 손톱 위로 맺힌 그녀의 공격은 염사편을 휘두를 때와는 격이 달랐다.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낸 그녀의 공격에 사령의 방패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여인이 재차 휘두른 공격이 후안을 노렸다. 후안을 역소환하지 않는다면 디에고를 공격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날린 공격이었는데 후안도 그걸 알고는 마지막 남은 사령의 방패를 몸에 품고는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꽈앙!
사령의 방패가 박살 나면서 후안의 몸에서 생긴 반탄력에 여인은 사정없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그 충격은 디에고도 그대로 겪어야 했다.
폐가를 부수고 날아 들어간 디에고가 왈칵 핏물을 토해냈다.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데다가 후안이 조금 전의 충격으로 역소환까지 당한 탓이었다.
디에고가 힘겹게 무릎을 짚고 일어설 때 여인은 재차 폐가의 잔해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사령의 방패를 몸에 담아서 상대에게 그 충격의 대부분을 튕겨내는 후안의 사령술에 피해를 본 탓에 루비처럼 빛나던 몸의 결정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디에고를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디에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디에고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디에고의 상태도 여인의 상태도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인은 그 미색이 퇴색할 정도.
여인은 손톱 위로 다시 핏빛 기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부서진 장에서 엠마가 뛰쳐나와 디에고의 앞을 막았다.
“엠마!”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엠마는 양팔을 벌려 디에고의 앞을 막아선 채 다가오는 여인을 쏘아보았다. 여인은 그런 엠마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호오.”
재미있다는 듯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엠마와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엠마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까지 본 그녀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네.”
둘을 바라보던 여인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톱으로 엠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날 따라오겠다면 둘 다 살려주지. 하지만 거절한다면 너희는 둘 다 죽어.”
디에고는 그 말에 엠마의 어깨를 잡고는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엠마가 그런 그의 손목을 잡지만 않았어도.
디에고가 돌아보자 엠마가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
엠마의 눈빛을 바라보던 디에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여인이 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그래도 엠마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디에고는 엠마가 잡은 손목을 뒤로 당겨 그녀를 뒤로 보내며 답했다.
“죽는다면 내가 먼저야.”
브란트에게 말했던 대로 디에고는 엠마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그 결정에 찬사를 보내며 그대로 돌진했다.
디에고는 그 순간에도 눈을 부릅뜨고 단검을 앞으로 겨눈 채 톰으로 역습을 노렸다. 폐가의 잔해 속에 숨어있던 톰이 튀어나오며 휘두른 발톱에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허를 찌르는 습격이었지만,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촤악!
여인이 휘두른 손톱에 톰의 허리가 잘리며 역소환당했다.
“쿨럭!”
디에고가 왈칵 피를 토한 사이에 여인이 재차 땅을 박찼다. 엠마가 쓰러지는 디에고를 껴안고 여인을 바라볼 때 한줄기 푸른 섬광이 날아들었다.
저 멀리에서 벼락처럼 날아든 푸른 섬광에 여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꽈앙!
여인과 디에고의 사이에 떨어지면서 폭음을 일으킨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바람처럼 달려오는 아린을 본 여인은 디에고에게 시선을 주었다.
“훼방꾼이 있어서 안 되겠네. 다음에 보자.”
여인은 지금 상태로는 성기사인 아린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았는지 황급히 몸을 날리면서 손톱에 맺힌 기운을 엠마를 향해 날렸다.
디에고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엠마를 끌어당기며 몸을 틀어 손톱을 막으려고 했다.
콰앙!
그러나 손톱은 날아온 방패에 맞고 튕겨 날아갔다. 한 호흡이 채 가기도 전에 도착한 아린이 방패와 해머를 집어 들고는 저 멀리 도망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쫓고자 한다면 쫓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전에 살펴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린이 고개를 돌려 엠마와 디에고를 보았다. 엠마가 눈물을 쏟으며 아린을 바라보았다.
“언니. 디에고가. 디에고가.”
아린은 창백한 낯빛의 디에고를 보았지만, 손을 쓸 수 없었다. 악마의 피를 이은 디에고는 신성 주문이 독이니까.
그걸 알았기에 디에고가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괜···찮아요. 엠마 좀 돌봐주세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지만, 아린도 지금 당장 디에고에게 뭔가를 해줄 수는 없었다.
디에고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그대로 혼절했다. 아린은 쓰러진 디에고를 품에 안고는 엠마를 돌아보았다.
“호텔로 돌아가자.”
자신과 떨어져 있었던 탓에 이런 위험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아린도 더는 물러날 생각이 사라졌다. 이 아이들은 치안대장이 아니라 펠만 국왕이 직접 와도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엠마도 아린이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 안심이라 그녀를 따라 호텔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디에고를 품에 안은 아린을 따라가며 엠마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아린은 엠마의 물음에 담담히 답했다.
“걱정돼서 빈민가를 찾아오는 길이었어. 그러던 중에 사령의 기운과 악마의 기운이 감지돼서 서둘러 온 거고.”
치안대장을 만나 엄포를 놓고 돌아왔던 아린은 밤이 되어가자 걱정이 되어 디에고와 엠마를 찾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던 중에 두 가지 기운을 읽었고, 요란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기에 앞뒤 재지 않고 달려왔던 것.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화살에 박혀 벽에 꽂힌 다비드의 상태는 이미 처참했다. 입에 양초를 물린 채로 브란트가 그의 사지를 박살 냈으니까.
그러나 다비드의 눈에 서린 독기는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계속 뭔가 말을 건네려고 하기에 브란트는 그의 입에 물린 양초를 빼줬다.
이빨 자국이 난 양초가 빠져나오자 다비드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독단인가 싶어서 그의 턱을 잡는데 다비드의 눈이 붉게 물들더니 전신에 푸른 핏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현상인지는 브란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투여한 악마의 피를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하지만 저걸 복용하면 잠깐 힘을 낼 수 있으나 결국에는 죽는다.
수천 명 중 살아남은 것은 오직 자신 혼자.
그런데 그 연구 책임자가 스스로 그걸 먹는 것을 보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걸로 다비드의 죽음은 확정이다. 자신이 연구했던 자들과 마찬가지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여겼다.
저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브란트가 잘 알고 있었다.
고통에 고개를 숙인 다비드가 등으로 벽을 쳐서 화살에서 몸을 빼내더니 품에 손을 넣었다.
부서졌던 사지가 악마의 힘으로 이어 붙는 것 같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브란트가 다리를 들어서 꿈틀거리는 다비드의 등을 밟았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도박수를 펼친 것 같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허망함을 느끼리라.
브란트가 다리에 힘을 줘 그대로 다비드의 심장을 으깼다. 그러나 다비드는 심장이 으깨진 상황에서도 품에 넣었던 손을 꺼내 브란트의 다리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브란트가 그 손목을 비틀기도 전에 주사기 안에 들어있던 액체가 다리를 파고들었다. 다비드가 죽어가면서도 브란트를 비웃었다.
“넌 끝···났다.”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처음 악마의 피를 투여했을 때처럼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면서 의식이 날아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