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잡종
내성 안에 있는 치안대장의 사무실에서 빌리안은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펠만 시를 찾아와 정보 집단 타로스를 만들고 그 장이 된 자. 다비드.
그가 오늘 호텔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가서 세 명을 체포해 왔다. 그리고 도망치던 자를 쫓던 중에 수하 셋이 화살을 맞고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리고 쫓던 자는 놓친 상황.
그들을 치안대 감옥에 가두고 심문하려고 할 때 성기사 아린 경이 찾아왔다. 지금 왕국의 분위기를 보면 성기사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래서 용의자들을 풀어줄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말처럼 재판 전에는 함부로 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 용의자들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다비드.
호텔에서 시체가 있어 용의자들을 잡아 왔지만, 타로스가 소식을 전해서 자신이 움직인 생각을 하면 살인이 일어나기도 전에 알렸다는 말이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데도 용의자들을 만나러 온 다비드를 보니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불가합니다.”
다비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작 치안대장 따위가 펠만 공을 왕위에 올린 자신의 부탁을 이리 매몰차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통해서 도망친 브란트를 찾고자 했는데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펠만 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정보 집단의 장이 되었고 왕의 신임을 얻고 있으니.
그러니 펠만 시의 다른 이들이 시기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방해를 받을 줄은 몰랐다.
“서로 돕고 삽시다. 앞으로 타로스의 도움이 꽤 필요할 텐데.”
치안대에게 있어서 정보 집단인 타로스의 도움은 필시 필요할 터. 하지만 빌리안은 그런 말에 흔들릴 이가 아니다.
“불가합니다.”
빌리안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다비드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난 손을 내밀었습니다.”
빌리안의 시선이 다비드를 향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했다.
“멀리 안 나갑니다.”
다비드는 그런 빌리안을 언제고 갈아치우겠다고 다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다비드의 뒤로 다가온 수하가 인상을 굳힌 채 말했다.
“빌리안을 털어볼까요?”
“이미 털어봤다. 털어서 나왔으면 내가 이렇게 얘기 끝내고 나왔겠나?”
다비드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래서 브란트는 아직도 못 찾은 거냐?”
“예. 아직.”
“펠만 시는 꽉 잡은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군.”
다비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탑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사무실인 탑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니 한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비드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다비드는 정말이지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빈께서는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왕의 세 번째 부인. 엘피아.
펠만 공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타로스가 만들어지기 무섭게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타로스를 위해 힘을 써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한 것은 펠만 공에게 넘기기로 한 악마의 힘이었다.
펠만 공이 그 정보를 넘길 만큼 그녀를 아낀다는 것을 알고 같이 투약 중이다.
그런 그녀의 등장에 다비드가 미소를 지었다.
펠만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런 그를 조종하는 그녀는 왕국 내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이었다.
엘피아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다음 투약이 언제인지 궁금해서 찾아왔지.”
“사흘 뒤입니다.”
엘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나가듯 물었다.
“성기사 일행을 치안대가 잡아들였다고 하던데 뭘 계획하고 있는 건가?”
다비드가 그녀를 경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거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는 궁 안에 앉아서 펠만 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걱정하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엘피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다비드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며시 쓸어내리듯 만졌다.
“걱정하지 않아. 난 자네를 믿으니까.”
가벼운 손길에 흥분하는 것을 눌러 참은 다비드는 떠나는 엘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휘 내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빌리안 때문에 일이 꼬이는데 엘피아는 왜 또 이 일에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악마의 힘을 다루지 않으면 짐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브란트는 에슬란의 사슬을 놀라울 정도로 잘 다뤘다. 에드가 민첩함으로 가뿐히 넘어가는 곳을 그는 쇠사슬을 풀어서 그걸 이용해 잘 쫓아왔다.
에슬란의 사슬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에드가 보기에도 대단해 보였다.
그가 가진 악마의 힘을 봉인하기 위한 장비였음에도 이제는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이 보였다.
아무리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고 해도 대낮처럼 밝을 수는 없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횃불의 그림자를 이용해 에드는 서쪽 탑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브란트가 탑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긴가?”
“예.”
브란트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에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척은 숨긴다고 해도 살기는 아니다. 그리고 상대는 살기 정도는 감지할 수 있는 요원들이니 그래서야 침입할 수 없었다.
에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탑 근처에는 병사들이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은 지키고 있을지 몰라도 그곳은 자체적으로 방비하고 있는 것.
병사들이 지키는 곳은 모두 지나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타로스를 치는 일뿐이다.
에드는 브란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형님. 저곳에 있는 자들은 다비드를 따라온 아칼란의 요원들입니다.”
브란트가 에드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 중에는 형님에 대해서 모르던 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다 죽일 각오가 서셨습니까?”
브란트는 그 말에 에드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깃든 살심을 읽은 에드가 말을 이었다.
“각오는 서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는데 가능한 한 조용히 처리해야 합니다. 때려 부수지 않을 생각이니 제가 앞장설게요.”
“난 다비드만 남겨주면 돼.”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에드는 그리 말하고 심안으로 주위를 살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한 거라 이걸로 지금까지 경비들의 시선을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심안으로 주위를 살핀 에드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탑 안에서 싸울 때는 활을 쓸 수 없으니 양손에 비도를 뽑아 든 채 탑으로 다가갔다.
왕궁 안에 있는 데다가 오는 길목에 널려있는 병사들을 믿는 것인지 탑으로 진입하는 데까지는 어려움이 없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가면서 던진 비도가 그곳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요원 둘의 미간에 박혔다.
에드가 달려가 쓰러지기 전에 그중 한 명을 잡았을 때 브란트가 반대편의 요원을 잡아 소리가 나는 것을 방지했다.
에드는 브란트와 눈을 마주치고는 비도를 회수했다. 그리고 심안으로 탑의 내부를 살폈다. 생각보다 요원의 수는 많지 않았다.
고작 스물 내외. 그리고 가장 상층에 있는 자를 감지한 에드가 손짓했다.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며 적들을 죽이는 만큼 외부로 알려질 기회는 없지만, 그래도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은 없다.
에드가 먼저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비도를 던졌다. 에드가 던진 비도는 계단 끝에서 만나는 복도로 휘어져 들어갔고, 에드는 그대로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심안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이기어시로 날린 비도가 상대의 미간에 박아주었다. 쓰러지는 자를 부축한 에드는 그 작은 소리에 복도 양쪽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을 보며 이들이 얼마나 훈련된 자들인지 알 수 있었다.
에드는 두 개의 비도를 더 뿌렸다. 상대가 몇 명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에드가 던진 비도는 바닥을 따라 낮게 날아가다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턱밑을 뚫어버린 비도에 상대가 쓰러졌다.
“컥!”
쓰러지던 자가 짧게 흘린 신음에 에드는 인상을 굳혔다. 신음이 들리니 탑에 있던 자들의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무기를 뽑고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에드는 탑 정상에 있는 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치고 올라갔다.
에드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며 비도를 뿌렸다. 마력이 충분하니 심안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이기어시를 날리는 것만으로 적들을 제압했다.
그들은 에드를 확인하기도 전에 검은 비도가 날아드는 것을 보았고, 반응하기도 전에 하나둘 쓰러졌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무리해서 마력을 쓸 수 없었을 텐데 아직도 마력이 반이나 남았고,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에드는 장비를 회수하는 것도 미루고 그대로 탑의 정상으로 올라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런 에드를 향해서 날아드는 것은 한줄기 섬광이었다.
레벨이 오르기 전이었다면 에드도 피하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섬광. 에드가 고개를 틀어서 피한 순간 날아들었던 섬광이 다시 돌아왔다.
섬광 자체도 빨랐는데 돌아오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심안을 뜨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심안을 뜬 에드는 그것마저 피하고는 화살 세 개를 던졌다.
상대의 양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를 관통한 화살이 벽에 박혔다. 상대도 화살의 힘에 딸려 날아가 벽에 매달렸다.
동시에 세 개의 이기어시를 써서 상대를 벽에 박아버린 에드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낚아챘다.
에드도 놀랄 정도로 빠른 섬광을 쏘아낸 물건.
에드가 낚아챈 물건은 손가락 정도 길이의 칼날이었다. 숨기기도 편하고 위력은 놀라울 정도인 물건. 칼날에 작게 새겨진 룬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물 중에서도 최상위 유물일 것 같았다. 하긴 아칼란의 수장 중 하나인 녀석이 가진 비장의 한 수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하지만 이건 브란트에게도 통하지 않았을 물건이다.
브란트는 이 정도 칼날에 관통당한다고 해도 심장만 아니라면 악마의 힘으로 금세 회복했을 테니까. 게다가 에슬란의 사슬은 원거리 공격은 자동 방어가 가능했다.
에드가 물건을 챙기는 사이에 브란트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의 눈에 일어나는 불길을 보며 에드는 벽에 박힌 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비드.”
벽에 박힌 다비드가 쓴웃음을 짓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것이 보였다. 에드는 그가 소리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입을 여는 순간 옆에 놓여 있던 양초를 집어 다비드의 입에 쑤셔 넣었다.
“으읍!”
소리 지르지 못하는 다비드를 확인한 에드는 브란트를 지나가며 말했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안 됩니다.”
“고맙다.”
에드는 다비드와 브란트를 단둘이 남기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급하게 오느라 회수하지 못한 비도를 회수하며 탑 밖으로 심안을 돌렸다.
다비드의 방에서 억눌린 신음이 에드의 뛰어난 청각에 잡혔다.
으스스한 폐가였기 때문인지 디에고는 엠마와 가까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톰과 제리를 소환한 채 엠마와 함께 앉아서 모닥불을 피운 디에고는 이 순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제리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고, 디에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낮에는 찾지 못했던 혈마석의 악마. 그자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건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몸을 피하기에는 늦었다.
디에고는 엠마를 폐가의 반쯤 부서진 옷장에 집어넣고는 말했다.
“여기서 절대로 나오지 마. 알았지?”
길게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다. 엠마가 입을 열기도 전에 폐가 앞에 기척이 느껴졌다. 디에고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뒤돌아섰다.
디에고가 밖으로 나가자 한 여인이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디에고를 향하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날 찾아온 악마인지 알았더니 너, 반쪽짜리구나?”
그때 디에고의 뒤편에서 후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안은 여인을 바라보며 사납게 외쳤다.
-이 잡종 년이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