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덫
호텔 방으로 돌아온 에드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아칼란의 요원을 바닥에 던졌다. 몸 이곳저곳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린이 에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한테 붙었던 꼬리라고요?”
“죽지 않게 치료 좀 부탁할게요.”
아린은 고민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얼굴색이 창백한 것을 보니 이대로 두면 죽겠다 싶어서 우선 회복 주문을 걸어줬다.
회복 주문으로 상처가 아물자 사내도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으으음.”
눈을 뜬 그를 저 멀리 떨어져 앉아서 보고 있던 브란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가와 손을 뻗어 사내의 코와 입을 가리도록 잡고는 들어 올렸다.
그 괴력에 끌어올려 진 사내가 신음을 흘리는 사이에 그의 두 눈을 바라보던 브란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아칼란이구나.”
“끄으읍.”
아린이 놀라서 말리려고 할 때 에드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말렸다. 브란트는 아칼란의 손에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그들에게 쌓인 원한은 그가 해소하는 것이 옳았다.
어지간한 정보를 얻었음에도 굳이 놈을 이곳에 끌고 온 이유이기도 했다.
어쩌면 브란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자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데려왔는데 브란트의 반응을 보니 가면을 쓰고 있었을 상대의 눈빛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브란트가 사내의 얼굴을 움켜쥔 채 에드를 바라보았다.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나?”
에드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탈탈 털어왔기에 더는 궁금한 것이 없었다. 브란트는 에드의 대답에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회의에 참석하는 에드와 아린, 테인, 덱스에 디에고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모두 사내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이었다.
“잠깐 혼자 있고 싶군.”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브란트는 그자의 얼굴을 틀어쥔 채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브란트가 은신에 둔하다고는 해도 일반인 눈에 띄일 정도로 허술한 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브란트가 나가자 좌중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덱스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발목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아칼란이면 브란트랑 더럽게 엮인 곳 맞지?”
“맞아. 그것도 엮인 당사자 중 하나 같네.”
위에서 시킨 대로만 했다? 그래도 당하는 처지에서는 그리 곱게 볼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 원한을 풀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오늘 이렇게 밤에 모이라고 한 것도 꼬리를 통해서 알아낸 정보를 공유할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안건 때문에 모인 것이었으니까.
잠시 기다리니 브란트가 돌아왔는데 그의 뺨에 핏방울이 묻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는 그에게 수건을 건네며 뺨을 가리켰고, 브란트는 수건으로 뺨을 닦고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제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곳에는 브란트보다 어른인 테인이 있다 보니 정중히 사과했다. 분노에 눈이 돌아가서 사람 하나 으깨고 돌아온 것이었으나 모두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에드는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몇 가지 의견을 나눠야 할 것이 있어 이렇게 모이자고 했습니다.”
에드가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드는 우선 정보 요원에게서 얻은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 전의 사내는 전직 아칼란 요원이었고, 다비드 휘하에 있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브란트의 몸에서 넘실거리는 살기가 방안에 스산하게 깔렸지만, 그 살기의 방향이 어딘지 아는 일행은 무던하게 그걸 받아넘겼다.
저 정도 살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모두 성장한 것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비드는 베리코 왕국의 개국 공신이 될 판이더군요. 지금은 이곳에서 아칼란에서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데리고 타로스라는 정보 집단을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거군.”
“썩어도 준치라고 전직 아칼란 요원들이니 도시 하나의 정보를 틀어쥐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에드는 브란트를 한 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다비드는 태자에게 악마의 힘을 주었던 자입니다. 그리고 그자가 이곳에 있었다는 말을 들으니 아귀가 맞아떨어지더군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보고 에드가 담담히 말했다.
“펠만 공. 이제는 펠만 국왕이 악마의 힘을 얻었습니다.”
테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위험한 힘에 손을 댔군.”
태자의 말로를 잘 알았기에 테인이 한 말은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그래서 말인데 혈마석을 가진 악마를 처치하는 것 외에 악마의 힘을 손에 얻은 자들에 대해 단죄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의 말에 아린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에드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복잡한 것은 내려놓고 간단히 봐요. 악마의 힘을 탐한 자는 곧 악마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높은 곳에 올라있을수록 큰 위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아린은 그 말에 에드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에드는 악마의 힘을 지닌 자를 사냥하는 데 있어 그들의 직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일수록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린도 그 말에 이제는 동의한다. 그 뒤의 정치적인 문제는 뒤로 미뤄놓고 그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줘요.”
“뭘 말이죠?”
“혈마석을 지닌 악마를 먼저 죽이겠다고요.”
에드는 아린도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당연하죠. 먼저 펠만을 죽이게 되면 그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거예요.”
아린이 그 확답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일 때 에드가 브란트를 돌아보았다.
“다비드에게 우리에 대한 보고가 올라갔다고 합니다. 브란트에 대해서 알게 됐으니 그들의 움직임도 주의해야 할 겁니다.”
브란트가 팔짱을 낀 채로 얘기를 듣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에드는 그런 브란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혈마석의 악마를 찾을 때까지 덱스와 함께 호텔에서 지내세요. 먹는 것도 특별히 조심하시고요.”
상대는 정면 대결을 고집하는 무리가 아니다. 무력 충돌은 저들이 이길 방법이 없으니 다른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지.”
테인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내가 도울 방법이 없어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디에고와 아린의 감지 능력이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에드도 심안을 떴지만, 그런 특수한 힘을 구분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테인이 디에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
“맡겨만 주세요.”
디에고가 가슴을 쫙 펴고 하는 말을 들으니 믿음직스러웠다.
에드, 아린, 디에고는 아침이 되기 무섭게 펠만 시를 조사하기 위해 떠났다.
덱스는 홀로 호텔의 뒤편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에드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여겼는데 다시 만난 그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다시 붙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어느 정도 어울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했다.
그래서 호텔 뒤에 나와서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유물급 장비를 통해서 강해졌지만, 그걸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으니까. 지금까지는 오롯이 자신의 재능에 기대왔다면 지금은 수련이 필요할 때였다.
자신보다 더 대단한 장비를 가진 에드도 꾸준히 수련하더니 더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 자신도 수련에 매진한다.
원하는 싸움을 마음껏 하게 해준다고 하더니 악마와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소국이지만 국왕까지 죽이자고 한다. 그러자면 목숨이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할 만한 싸움이 계속 일어날 터였다.
적어도 죽을 때까지 싸우다 죽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어설픈 곳에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싸우다 죽는다면 자신에게 걸맞은 곳에서 죽고 싶었다.
그러자면 자신은 더 강해져야 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호텔 점원이 다가왔다.
“마실 것을 준비했습니다.”
마침 목이 마르든 참이라 고개를 돌리던 덱스가 점원이 음료수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깐만.”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덱스는 음료수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난 음료수를 시킨 적이 없는데?”
“지배인님께서 서비스로 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덱스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점원을 향해 촥 뿌렸다. 그런데 점원이 고개를 옆으로 틀면서 음료수를 피했다.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어제 에드가 경고하지 않았다면 무심코 받아들였을지 모르겠으나 이 점원은 걸음걸이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덱스가 검을 휘둘러 그 목을 베어가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스걱.
상대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덱스는 아칼란의 단검인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호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자신만 노린 것이 아닐 터.
단번에 계단을 올라가던 덱스는 브란트의 방문이 부서지며 튀어나온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브란트가 방문 밖으로 나오며 덱스를 확인했다. 서로 눈을 마주친 후에 브란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고, 덱스는 테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테인의 방에도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테인의 앞에 서 있는 더그의 검날을 따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새끼들 미쳤네.”
대낮에 호텔에서 습격을 가하다니. 병사들이 이렇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간 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덱스는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창가로 걸어갔다. 호텔 뒤쪽의 시체를 보고 점원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 소란을 듣고 병사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덱스가 테인을 돌아보자 그도 한숨을 내쉬었다. 트라비아 왕국 내에서라면 펜드래건의 입김이 있으니 위험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펜드래건의 입김이 안 통한다.
게다가 호텔 점원으로 변장한 전 아칼란 요원들이 죽은 순간에 맞춰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덫일 가능성이 크다.
테인은 병사들이 올라오기 전에 브란트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는 엠마 옆에 서 있는 브란트를 보고 빠르게 말했다.
“엠마와 함께 몸을 피하게.”
“엠마와 저, 둘만 말입니까?”
“우리를 습격한 자들과 병사들이 한 패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네. 자네와 엠마는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 아린을 만나게. 아린이라면 자네를 지켜줄 수 있을 걸세.”
브란트는 병사들이 뛰쳐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브란트는 엠마를 옆구리에 끼고는 창밖으로 몸을 빼냈다. 악마의 힘을 쓰지 않아도 병사들 정도는 충분히 따돌릴 수 있는 실력이 있으니 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덱스가 테인의 뒤를 따라왔다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잡혀가서 좋을 꼴 보기 힘들 것 같은데?”
병사들이 계단을 올라와 복도에 나타나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테인은 양손을 들며 낮게 속삭였다.
“저들이 병사로 변장한 이상 이들을 죽이게 되면 아무리 아린과 에드라고 해도 빼내 줄 수 없을 걸세. 그러니 일단은 순순히 잡혀가도록 하지.”
덱스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짓고는 다가오는 병사들이 겨누는 창끝을 바라보며 순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그들의 사이로 다른 복장을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복도에 죽어있는 시체를 보고는 말없이 다가와 시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인이 머물던 방의 시체까지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왕도 치안대장 빌리안입니다. 호텔 점원 셋이 살해당한 사건의 용의자로 당신들을 체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