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보상
펠만 공의 사신으로 온 자는 풍채가 좋은 사내였다. 넉넉한 턱살을 실룩거리며 차를 마시던 사내, 레민은 콜린 부인을 찻잔 너머로 살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인인 그녀로 눈요기 한 레민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콜린 공은 안 나오시는 겁니까?”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요양 중입니다.”
“파렐 공자도 그리 말하더니 큰일이군요. 전하께 말씀드려 다음에 올 때는 몸에 좋은 것을 구해오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레민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파렐 공자가 약속한 병력 모집은 잘 되고 있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트라비아 왕국군이 달리아 왕국 방면에서 회군해서 오는 중이라 출병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전해야 해서요.”
“전하도록 할게요.”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만.”
콜린 부인이 잠시 주저하는 것을 보고 레민의 눈이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그런데 파렐 공자는 왜 안 나온 겁니까?”
콜린 부인이 주저할 때 뒤에 서 있던 에드가 대신 말을 꺼냈다.
“훈련 도중에 다쳐서 참석 못 하셨습니다.”
레민은 그제야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몸을 똑바로 했다.
“파렐 공자를 뵙고 가야겠군요.”
레민은 펠만 공의 측근 중 하나로 지금 귀족들을 독려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콜린 공도 없고, 파렐 공자도 볼 수 없다고 하니 뭔가 의심이 갔다.
레민이 표정을 굳힌 채 말하자 콜린 부인이 살짝 인상을 굳혔다. 귀부인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다.
그때 뒤에 있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무례하군요.”
레민의 시선이 에드를 향하자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는 성주 대리이십니다. 말을 가려 하시죠.”
레민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힌 채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파렐 공자와 이번 출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다쳤다고 하니 병문안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전하도록 한다고 했으니 그리 듣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병문안이 가능했다면 한번 보고 가라 했을 테니까요.”
레민은 뭔가 의심이 갔지만, 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시죠.”
레민은 그제야 이곳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사신이니 자신을 위협할 일은 없을 테지만, 여기서 자신이 선을 넘어서 좋은 꼴 보기에는 데리고 온 이들이 부족했다.
“그럼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일군을 맡아야 하니 실수 없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말은 협박을 은근히 남긴 레민은 곧장 수호 기사들과 함께 돌아갔다. 창가로 걸어간 에드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콜린 부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물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에드는 이번 일이 분명 악마랑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다고 믿었다. 만약에 사신으로 온 자가 악마와 연관이 있었다면 돌아가는 길에 쫓아가 머리에 화살을 꽂아줄 생각이었는데 악마와 연관은 없어 보여 그냥 보내주었다.
“콜린 공이 깨어나시면 정리해 주시겠죠.”
솔직히 편을 들라면 트라비아 왕국군 편을 들어주겠지만, 어찌 돌아가든 깊이 상관할 생각은 없었다. 가뜩이나 악마들 잡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 일에 방해만 안 되면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
저녁에 후안이 소환되어 나왔을 때 그 자리에는 에드와 테인, 디에고가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이렇게들 다 모여서?
테인이 웃으며 말했다.
“크리스탈 해골에 대해서 듣고 싶었거든.”
-그랬나? 하긴 고대 유물이 워낙 구경하기 힘들지.
디에고가 크리스탈 해골을 꺼내 들자 후안이 다가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사령군집체의 술식이 깨지면서 안에 있던 사령까지 싹 죽은 모양이군.
“그 안에 사령을 담아둘 수 있는 건가?”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지. 사령을 사용하는 강력한 사령술을 쓸 때 필요하거든.
사령술에 대해 몰랐는데 그 말을 들으니 사령술이 얼마나 무서운 술법인지 알 수 있었다.
디에고도 그걸 깨달았는지 물었다.
“그럼 그 연료가 된 사령은 어떻게 돼요?”
-어떻게 되긴. 사라지는 거지.
“성불도 아니고 그냥 사라진다고요?”
후안은 디에고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서 나도 사령술은 잘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미안해서. 하지만 적의 영혼으로는 사령술을 썼지. 그러나 일반 사령술사는 사령을 모으는 것에 한계가 있지만, 이건 다르다.
후안이 크리스탈 해골을 들어 보였다.
-사령술 중에는 사령을 투자하면 할수록 강한 위력을 내는 술법들이 있다. 그걸 쓰려면 이 크리스탈 해골이 필수다. 그렇기에 사령술사들에게 이 고대 유물은 전설로 전해졌지.
“대체 누구 손에 있었기에 전설로만 전해진 건지 모르겠군. 나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테인의 말에 후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대 유물들은 대부분 고대를 살아본 자들이 가지고 있지. 그나마 고대 유물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고대 유물을 지닌 자들이 죽으면서 나돌게 된 경우가 많지.
그제야 에드는 후안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을 수 있음을 알았다. 고대라고 부를 정도라면 적어도 천 년은 지났을 텐데 그 시대를 살았다는 말인가?
후안은 크리스탈 해골을 디에고에게 던져줬다.
-네 적의 영혼을 거둬라. 그리고 그걸로 네 적을 잡는다면 미안해할 것도 없을 테니.
디에고는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를 깨달은 탓이다.
-사령을 이용하는 술법은 지금 배우기에는 이르니 일단은 가지고 있어라. 그리고 적을 죽이고 그 사령을 취하게 되거든 안에 저장해 두고.
디에고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지금까지 에드의 손에 죽은 이들만 해도 수가 꽤 된다. 적으로 만났던 그들을 사령으로 거둬서 담아 놓았다면 제법 모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드는 고민하는 디에고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내 적의 영혼도 거기다 담아줘라.”
“진짜 여기다 담아도 될까요? 영혼을?”
“그래도 될 놈만 알려줄게.”
디에고는 그 말에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끔찍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에드에게 듣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적으로 만난 자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영혼을 거두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깨어난 콜린 공은 상황 설명을 듣고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니까 날 고문하던 그 자는 내 아들이 아니고, 악마였다 이 말인가?”
“예.”
“그리고 그 악마가 무리해서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거군.”
에드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상황을 파악한 콜린 공은 침대의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남부 귀족 연합의 수장인 펠만 공이 칭왕을 하고 왕국 건설을 외쳤을 때 수긍은 했지만,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마젤타 왕국에서 지원한다고 해도 먼저 적을 맞이하는 만큼 남부 귀족들은 큰 피해를 보게 될 터였다.
그런데도 진행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그 일에 악마가 연관되어 있다고 하니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인간들의 전쟁에 악마들이 끼어들었다. 자고로 악마가 끼어들었을 때 인간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없었다. 모든 일은 해가 됐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쟁에 그냥 나갔다면 아마 악마들에게 놀아나 큰 피해를 보게 되었을 터.
“악마의 수작에 놀아날 수는 없지. 일단 모은 병력으로 성을 지킨다. 그리고 내가 직접 펠만 공을 만나러 가겠다.”
에드는 그 말에 더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이방인에 불과하니까.
콜린 공은 에드와 아린을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귀족은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귀족이지. 그대들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게. 내 생명뿐만 아니라 그대는 이 성을 구해줬으니.”
사양하는 것은 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콜린 공과 이 성의 가치는 저희가 책정할 수 없겠죠. 그러니 스스로의 가치 만큼 챙겨주시면 됩니다.”
콜린 공의 시선이 에드를 향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콜린 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런가? 하긴 내 목숨과 이 성의 가치를 그대들이 책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콜린 공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성주의 자리라도 내주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 성을 내줘봤자 자네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그리고 병력을 모집하고 전쟁을 준비한다고 여유가 넉넉한 것도 아니니 급한 대로 지금 남아있는 골드를 내주도록 하지.”
콜린 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촛대를 잡아 꺾었다. 그러자 촛대가 옆으로 밀려나고 작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를 꺼낸 콜린 공은 그곳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손가락에 끼고는 다시 촛대를 돌려서 원래대로 돌렸다. 콜린 공은 의자를 치우고 그 밑에 깔아놓은 융단을 치우고 반지를 넣고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작은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고를 연 콜린 공은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서 에드에게 건넸다.
“지금 당장은 이것밖에 내줄 수 없군.”
딱 봐도 비상금으로 보이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에드가 손을 내밀어 그걸 받아들자 콜린 공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대들은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에드는 담담히 답했다.
“가까운 곳에 악마가 있다고 하니 우리는 그걸 저지하러 갈 겁니다.”
“그런가?”
콜린 공은 더 따지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머물러도 좋네. 그리고 언제든 돌아와도 환영해주지. 그대들은 이 도시를 구한 영웅들이니.”
“그리하겠습니다.”
굳이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말을 면전에서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일행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성을 떠났다. 그런데 교회에서 얻은 정보대로라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이 전장의 중심인 펠만 시였다.
펠만 공이 칭왕을 했으니 경계가 삼엄할 것이 분명한 곳.
혈마석을 지닌 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이번 일이 얼마나 꼬일 수 있는지 알려준 일이었지만, 일행은 그걸 알아도 멈출 수 없었다.
에드는 다크의 등에 타고 가면서 콜린 공이 준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서 반짝이는 것은 금패.
골드를 특별한 방식으로 작업한 것. 금패는 금화 다섯 개를 모은 것보다 작았지만, 가치는 달랐다. 이 하나가 1백 골드의 가치를 지닌 것.
그런 금패가 백 개가 들어있었다.
1만 골드.
역시 큰물에서 놀아야 큰돈을 벌 수 있다. 이만한 돈을 한 번에 벌다니.
앞으로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터.
성유물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살 수 있을 만큼 큰돈이다.
에드는 안장 옆에 걸어놓은 가방에 상자를 다시 집어넣었을 때 백마를 탄 아린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아린이 탄 말. 다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크고 튼튼한 말이었다.
아린이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입을 열었다.
“펠만 시에 악마가 있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요?”
에드는 아린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상관없잖아요. 우리는 악마와 연관된 자들을 처단할 뿐이니까.”
칭왕을 한 펠만 공이 머무는 펠만 시.
그곳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걱정이 앞섰는데 에드의 명쾌한 답을 들으니 그 고민이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린은 미소를 지은 채 전방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러네요. 상관없는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