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함정
악마 디펠로는 중급 악마치고 약한 편이었다. 몸을 쓰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 반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디펠로를 발견한 라그록스가 기뻐할 때는 어리둥절했었다. 중급 악마면서도 하급 악마 취급을 받아왔으니까.
그러나 라그록스는 그를 중하게 쓴다고 했다. 그리고 혈마석 두 개를 이식했다.
다른 악마들도 하나밖에 감당하지 못하던 혈마석을 두 개를 감당할 수 있는 육체는 처음이라며 혈마석 두 개를 이식했고, 그 뒤로 자신은 다른 중급 악마들을 눈 아래로 볼 정도로 강해졌다.
라그록스는 자신을 귀히 여겼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을 때 자신이 나섰다. 자신은 라그록스가 부리는 칼 중 하나로 그의 대계를 망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나섰다.
라그록스의 처벌자로 살아온 그에게 이번 일도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당한 이들이 많았지만, 자신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던 중에 그들의 행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다.
라그록스의 대계를 망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왔다.
대계의 한 축을 맡은 자를 구하고 적들을 처벌하기 위해 왔는데 오히려 자신이 위기에 몰렸다.
병사들을 집어 던지며 회복할 틈을 노리려고 했지만, 성기사와 사슬을 다루는 자가 곡예와 같은 실력으로 병사들을 살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혈마석이 뿜어내는 마력이 전신을 돌면서 상처가 낫고 힘을 회복하는 중에 한 놈이 측면으로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가장 까다로운 것은 성기사라 병사들을 던지는데 궁수가 솟구쳤다. 악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자. 과연 그 화살이 얼마나 독한지는 경험했다.
그런데 그자가 던진 병사들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솟구치는 모습에는 감탄이 절로 일었다. 허공에서 화살을 쏘는데 불길한 느낌에 옆에 말을 타고 있던 경기병을 낚아채 막으려고 했다.
일반 병사보다 갑옷이 튼튼하니 화살이 그 몸을 뚫고 들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화살은 병사의 몸에 적중한다 싶은 순간 뱀처럼 그 몸을 타고 넘어와 눈에 꽂혔다.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그리고 눈알이 얼어붙는 건가 싶었을 때 얼굴 반쪽이 통째로 얼었고, 그보다 끔찍한 고통이 안쪽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삭아 부스러지는 끔찍한 고통.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중에 화살이 연달아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갔던 자가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검에 베인 곳은 저주라도 걸린 것인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회복력과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놈들의 방심을 이끌어내서 하나라도 줄이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른 김에 뒤로 넘어졌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눈에 꽂혔던 화살을 뽑아 던지며 회복하려고 하는데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 화살이 배를 파고 드는 순간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신성력을 담은 화살. 그것은 뱃속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안을 헤집고 다녔다. 죽은 척하면서 회복을 도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제 살을 찢고 다급하게 화살을 잡아 꺼냈다.
에드는 신성 화살을 이기어시로 날리고는 곧장 에트리안의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마력의 총량이 늘었고, 재생의 반지 덕분에 마력이 충분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던 때와는 다르다.
막타만 날리면 되다 보니 마력이 넉넉했다.
악마의 뱃속을 휘저으며 혈마석 하나를 깨부순 상황. 이제 마력을 담아 에트리안의 검을 휘두른다. 그 검이 어찌나 빠른지 악마가 죽은 줄 알고 다가가던 덱스도 기세에 놀라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덱스는 신속의 검을 얻고 나서 이제는 에드와도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에드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이건 검이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저 검에 마력을 넣으면 검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만큼 그 일격을 보니 당분간 덤빌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산산이 조각나는 모습을 보고 덱스가 흠칫 몸을 떨었을 때 에드는 검을 내리고는 길게 숨을 토했다. 혈마석을 두 개나 가지고 있더니 맷집이 보통이 넘었다.
머리 반쪽을 얼리고 그 안에서 바스러지는 와중에도 죽지 않았고, 뱃속을 신성 화살로 휘저었음에도 살아남았다.
제 손으로 뱃속에서 화살을 꺼내고도 살아남을 정도라면 이건 좀비보다 질긴 놈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도 조각나 버린 상황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경험치가 들어오는데 과연 이 자들의 경험치는 중급 악마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온 경험치는 아마도 다음에 이 정도 수준의 악마를 잡는다면 레벨이 오를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에드는 흡족한 경험치에 만족하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자의 능력은 단순한 괴력이 아니었다. 마력을 이용해서 바닥에 균열을 일으킨 능력은 굉장했다.
그것 때문에 죽고 다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에드의 곁으로 다가온 아린이 악마의 조각에서 혈마석을 찾아냈다. 운이 좋았는지 검기에 잘리지 않았다.
인간이 혈마석을 지녔을 때는 죽지도 않는데 악마들은 혈마석에 마력을 공급 받을 뿐 죽일 수 있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었다.
아린이 혈마석을 쥔 채 기도를 올리며 다음 목적지를 찾는 사이에 에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악마가 만들어낸 균열의 범위가 반경 30미터는 되는 데다가 깊이도 10미터가 넘어가니 떨어질 때 죽지 않은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바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일단 구조부터 하죠.”
에드의 말에 브란트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깊이 10미터 아래에 떨어진 이들을 사슬로 엮어서 꺼냈고, 덱스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이들을 도와 움직였다.
부상자들은 병영 한곳의 연무장에 차례로 눕혔다. 신전에도 경기병이 달려갔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가운데 아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혈마석으로 다음 혈마석의 위치를 찾아낸 그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목표를 특정 지은 이상 놓칠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악마들도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자리를 잡고 일을 벌이고 있으니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번에도 전쟁과 연관되어 무슨 일인가를 벌이려고 했으니까.
아린의 옆에 서 있던 디에고가 입을 열었다.
“부상자들을 모아놓았다고 했어요.”
“여기서 악마의 시체를 지켜줘. 성화로 태워버려야 하니까.”
아무래도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긴 아린이 디에고에게 부탁하고는 부상자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서른 명이 넘는 부상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누워있었다.
아린이 기도하는 사이에 살아남은 이들을 구해서 모아놓은 에드는 그녀의 뒤편으로 악마의 시체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는 새삼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화로 태우기 전에 먼저 사람을 구하는 것. 그게 아린이었다.
그녀는 부상자들에게 다가오면서 신성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마다 신성력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고, 바닥에 눕혀 놓았던 이들에게 반응했다.
브란트가 빠르게 물러나는 것을 본 에드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보았다.
그녀는 신성력을 주위에 뿌려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무리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라고 해도 푸른 신성력이 주위를 휘감는데 시선이 안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타난 그녀는 부상자들의 부상 부위에 손을 올려 치료를 시작했다. 그녀의 회복 주문은 높은 신성력 덕분인지 어지간한 부상은 눈에 띄게 호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하나둘 병사들의 부상을 치료해준 아린은 모든 병사의 치료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 가쁜 전투를 치르고 난 뒤에 곧장 뒷수습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왜 성기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린은 살짝 숨을 내쉬고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이곳을 부탁해도 될까요?”
“악마의 피를 정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 가보도록 해요.”
아린이 악마의 시체에 다가갔을 때 디에고가 이미 악마들의 시체를 한곳에 모아놨다. 조각난 시체를 옮길 수는 없으니 파렐의 시체를 가져다 놓은 것.
아린이 그곳으로 다가가 기도를 올리자 성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디에고와 브란트가 멀찍이 떨어져서 그녀를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했고, 덱스도 한 방위를 맡아서 그녀를 지켜줬다.
성화가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몇몇 사망자가 나왔지만,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적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스트론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아마 저들은 오늘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아스트론 교단에 헌금을 가져다 바치리라.
성화로 악마들의 시체를 모두 태운 후에 아린의 몸을 휘감은 신성력은 더욱 진해졌다. 아린이 조용히 기도를 외우는 사이에 그녀를 휘감던 신성력이 점점 그녀의 몸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는 아린의 두눈에서 푸른 성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아론처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녀가 전보다 확실히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브란트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주인공 후보였던 그는 어떻게 해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걸까?
아린은 저렇게 제물을 바칠 때마다 강해지는데 그도 뭔가 강해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아직 그걸 찾지 못했다. 아직은 악마의 힘을 꺼내지 않고 봉인의 사슬을 이용해서 지원만 해주었지만, 저렇게 싸울 수 있는 것도 분명 한계에 부딪힐 테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기울 수밖에 없었는데 브란트도 강하게 만들어줄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원래대로 아칼란의 지원을 받아서 성장했다면 아칼란에 그 답이 있을 것도 같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헤나가 내리더니 에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았지만, 악마를 처참하게 도륙 낸 것은 에드라는 것을 보았기에 그녀는 에드가 귀족이 아님을 알면서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를 구출해준다는 약속을 지켜줬으니까.
에드는 헤나가 다가오고 나서야 콜린 공을 떠올렸다.
“콜린 공의 상세는 어떠십니까?”
“그것 때문에 아린 경의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병영에 이리 쉽게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을 알았기에 에드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제가 살펴볼게요.”
“다 함께 내성으로 가시면 어떨까요?”
헤나의 말에 에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하지만 아직 전장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떡이 되어 죽어버린 이들이 있었으니까.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호 기사가 나서서 마차를 구해왔다. 보급용 마차에 일행 모두가 올라탔다. 에드가 마부석에 앉자 디에고가 옆에 얼른 앉았다.
“혹시 또 느껴지는 게 있어?”
“아뇨.”
고개를 내저은 디에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힘껏 기지개를 켰다.
“아으. 밤이었으면 저도 도움이 됐을 텐데.”
에드는 손을 들어 디에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충분히 도움됐어.”
한 놈이 더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타임 어택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괜히 두 마리 모두 모였다면 상당히 애를 먹었으리라.
경험치가 늘어난 것도 좋고, 팀워크도 이 정도면 잘 맞았다. 다만 적들도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설마 혈마석 두 개를 이용해서 악마를 강화할 줄은 몰랐다.
테인이 얼른 이 혈마석에 대해서 알아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번에도 혈마석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 애를 먹었으니까.
크로셀의 인간들이 혈마석을 가지고 있을 때는 악마를 상대하기보다 더 까다로운 만큼 혈마석의 위치 파악이 우선되어야 했다.
앞장 서가는 마차를 따라서 내성까지 들어간 에드는 수호 기사에게 말해서 테인 일행도 불러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여관보다야 내성에서 지내는 것이 편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행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수호 기사가 사람을 여관으로 보내는 사이에 우리는 콜린 공의 침실까지 갈 수 있었다. 침실에 콜린 공을 눕힌 아린은 그에게 회복 주문을 걸어주고는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고 돌아섰다.
“단번에 고칠 수는 없겠어요. 안에 마기가 남아있어서 그걸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헤나는 그 말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얼마나 걸릴까요?”
아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제가 한다면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아린의 신성력을 생각하면 거의 사자 부활이라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그녀가 이틀이나 회복 주문을 걸어줘야 할 정도라면 콜린 공은 살아있는 것이 용한 상황이었다.
헤나가 그런 아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린이 놀라서 그녀를 부축할 때 헤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는 말했다.
“염치없는 것은 알지만, 부탁드릴게요. 아버지를 구해주세요.”
아린은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러니 일어나세요.”
헤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린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린의 신성력은 헤나가 알기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가히 신의 사자가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대한 신성력을 보여줬으니 그녀의 신분이 성기사 중에서도 특별한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고작 귀족의 딸인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말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귀족인 그녀는 아스트론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이 얼마나 콧대가 높고 한 번 부르기가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헤나는 다시 한번 아린의 손을 꼭 잡았다.
라그록스는 처벌자로 보낸 디펠로가 죽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으로 또 혈마석 세 개가 사라졌다.
라그록스는 토끼의 털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군.”
라그록스의 처음 계획은 어그러졌다. 하지만 계획이 어그러진 만큼 다른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은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었다.
아린이 혈마석을 통해서 다음 혈마석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만든 함정에 그녀가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못 느끼겠지만, 나중에 알아차렸을 때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강화된 혈마석은 단순히 악마들의 힘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