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신종 악마
디에고의 말을 들은 순간 아린은 고민하지 않고 방패를 앞으로 내민 채 돌진했다. 푸른 신성력을 품은 방패를 내민 채 돌진하는 아린의 좌우로 덱스와 브란트가 움직였다.
삼방에서 적을 압박하는 것은 이미 해왔던 일. 하지만 이번에는 뒤에 에드가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아린은 뒤를 고민하지 않고 돌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아린을 보고 파렐은 코웃음을 쳤다.
뒤에 선 꼬마가 외친 소리를 듣고 보니 저들도 이제는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악마를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도 저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다.
파렐이 양손을 펼치자 그를 중심으로 불꽃의 바퀴가 나타나 회전했다. 불을 다루는 파렐이 일으킨 불꽃의 바퀴는 그 자체로도 강했는데 혈마석의 마기가 더해지니 몇 배나 강해졌다.
그때 아린의 방패가 불꽃의 바퀴에 부딪혔다.
원래라면 불꽃의 바퀴에 부딪혀 튕겨 나가야 했으나 아린의 방패에 맺힌 푸른 신성력은 그 불꽃을 받아내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불꽃의 바퀴를 아린이 막는 사이에 좌측에서 달려오던 덱스가 허공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데 그게 어찌나 빠른지 고개를 급히 틀었음에도 뺨이 길게 갈라졌다.
게다가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몸을 돌리면서 반대편 검도 휘둘렀다.
손을 들어서 놈을 쳐냈지만, 손바닥이 길게 갈라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반대편에서 사슬이 날아들었다. 불꽃의 바퀴로 성기사를 막는 중이라 입을 벌려 불꽃의 화살을 만들어 날렸다. 그런데 날아들던 사슬이 뱀의 머리처럼 움직여 불꽃의 화살을 모조리 튕겨냈다.
그리고 날아든 사슬에 결국 손을 들어 쳐내야만 했다. 간단히 쳐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사슬이 손목을 휘감자 그 순간에 혈마석의 마기가 뿜어져 나오던 것이 멈췄다.
이건 상상도 못 했던 것.
혈마석의 힘이 잠깐이지만 멈춘 순간 불꽃의 바퀴가 힘을 잃었고, 아린이 성큼 다가오며 방패로 가슴을 후려쳤다. 혈마석이 없이는 감당하기 힘든 신성력이었다. 단번에 가슴에 쩍쩍 균열이 갔고, 그녀가 휘두른 검이 그려낸 궤적을 따라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단단하고 질긴 악마의 가죽도 종잇장처럼 베어내는 성검이라니.
그때 등 뒤로 다가온 쌍검의 사내가 등을 베었다. 꼬리를 휘둘렀지만, 이미 상대는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감히!”
비록 혈마석의 힘이 묶였다고 하나 자신 또한 어엿한 중급 악마다. 고작 이 정도에 당하지는 않는다.
파렐의 전신에서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폭풍과 같아 근처의 모두를 뒤덮는 가공할 불꽃이었다.
가공할 불꽃이 터지는 순간 아린이 성검을 거꾸로 바닥에 꽂았다. 그녀의 성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신성력이 파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고, 밥그릇을 뒤집어엎어 놓은 것처럼 나타났다.
파렐이 오히려 신성력의 반구에 갇힌 것 같은 상황. 그래서 그가 터트린 가공할 폭발은 신성 보호막에 막혔다. 혈마석의 힘이 함께 할 때라면 단번에 부숴버렸을 위력이었지만, 지금은 신성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힘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탈력감이 전해질 때 신성 보호막을 가르고 들어오는 화살이 있었다. 안과 밖이 뒤집혀서 그런지 날아 들어오는 화살은 단번에 보호막을 뚫고 들어와 몸을 파고들었다.
세 발의 화살.
한 발의 화살이 심장의 가죽을 가볍게 뚫고 들어와 심장에 박혔고, 한 발의 화살은 배에 박혔으며 한 발은 이마에 꽂혔다.
“끄아아아악!”
심장에 박힌 화살은 신성력으로 심장을 태웠고, 배에 박힌 화살은 혈마석에 정확히 꽂혔다. 그 강대한 혈마석이 사멸하고 있었다.
두개골까지 관통한 화살이 뇌를 갉아내는 것에 생각이 단편적으로 끊겼지만, 한가지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은 신성력에 불태워졌고, 혈마석은 사멸했다. 이래서야 재생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파렐의 의식이 온전히 사라졌다.
쓰러진 파렐을 바라보면서 아린이 신성 보호막을 거두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서 신성 보호막을 두르고 있던 아린을 지나치며 에드가 말했다.
“죽었어요.”
아린이 신성 보호막을 거두자 에드는 쓰러진 파렐의 시신에 다가가 화살들을 차례로 뽑았다. 악마를 잡아먹는다는 아펠라의 이빨은 악마의 단단한 두개골도 간단히 뚫어버릴 정도로 단단했다.
신성 화살이야 이미 그 위력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얻은 시트라의 화살은 또 달랐다. 악마의 배에 박힌 화살은 그 부위를 완전히 사멸시켰다.
가루가 되어버린 배의 안쪽에는 혈마석의 조각도 눈에 들어왔다. 에드가 화살을 모두 회수한 채 돌아섰다.
세 명이 중급 악마 하나를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협력이 잘 되어 중급 악마 정도는 어렵지 않게 잡을 것 같았다.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아마도 저번 싸움으로 어느 정도 중급 악마가 혈마석으로 강화되었을 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달은 것 같았다. 덕분에 손쉽게 놈을 제압할 수 있었다.
“형!”
디에고의 외침에 아린이 고개를 돌렸다. 감각을 교란하던 자가 죽었으니 이제 명확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에드도 아린이 바라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점으로 보이던 자가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에드는 그 자의 움직임이 빠르다는 것보다 놀란 것은 디에고가 저렇게 멀리서도 감지했다는 점이었다.
에드는 빠르게 다가오는 자를 향해 인사차 화살을 날렸다. 일단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에드가 날린 화살이 섬전처럼 날아가 달려오는 자를 향해 날아들었는데 그 화살이 너무나 손쉽게 잡혀버렸다. 그걸 보고 알았다.
지금 죽은 놈은 딱 보니 불꽃의 힘을 다루는 마법사 계열인 것 같았지만, 지금 오는 놈은 달랐다.
“디에고! 이리 와!”
에드의 외침에 디에고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병영의 벽을 밟고 솟구친 자는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그 진동에 병사들이 놀라서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고, 말도 기겁하며 앞발을 쳐들었다.
아린이 일행의 앞에서 방패를 들고 성검을 거둔 채 손을 뻗자 날아온 해머가 손에 잡혔다. 아린이 악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해요.”
디에고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혈마석을 두 개 가졌나 본데요?”
혈마석이 한 몸에 두 개를 심을 수 있는 거였나?
그래서 그런지 상대에게 느껴지는 격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데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저 헐크도 뺨을 후려갈길 근육질의 몸. 건방지게 히어로 랜딩을 한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치 파악은?”
“안 돼요. 그냥 몸 전체에서 힘이 휘돌고 있어요.”
두 개의 혈마석을 지닌 자. 녀석은 죽어버린 파렐을 보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 늦었나?”
혈마석이 두 개라고 해도 그 힘을 억제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때려잡을 수 있다. 에드는 놈의 힘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 입을 놀리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놈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발을 들어 올렸다. 단순히 발을 굴리는 거라면 저렇게 높이 발을 들어 올릴 리가 없으니 에드는 화살을 날렸다.
견제 수준으로 쏜 화살이었는데 놈은 그 화살을 손으로 잡으며 그대로 발을 굴렀다.
꾸웅!
역시나 단순한 발굴림이 아니다. 그자가 내리친 발을 중심으로 대지가 쩌저적 갈라졌고, 그 틈으로 병사들이 떨어지면서 난리가 났다.
손으로 에드의 화살도 잡았지만, 냉기가 그의 팔뚝까지 얼려버렸다.
견제용으로 쏜 거라 그 정도로는 악마의 팔뚝 안까지 얼리지 못했는지 놈은 가볍게 손으로 툭툭 털어서 팔뚝의 얼음을 부숴버렸다.
갈라진 땅으로 떨어진 이들과 매달린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병사들이 소란스러울 때 아린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던진 해머가 날아들자 악마는 오히려 마주 달려들면서 몸을 틀었다.
신장 3미터에 근육 덩어리로 가슴둘레가 못해도 3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움직임이 민첩하기 짝이 없다.
민첩함만으로 따진다면 에드에는 못 미쳐도 신속의 검을 쓰는 덱스에 필적할 만했다. 그런 근육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힘은 그를 덤프 트럭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위협적으로 보였다.
아무리 아린이라고 해도 저 덩치의 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덱스와 브란트가 뒤를 따라 움직일 때 아린의 방패 위로 악마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아린은 날아드는 주먹을 보고 오히려 자세를 더욱 낮추고 파고들었다.
악마의 주먹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면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끊어져 흩날렸고, 아린은 방패를 어깨에 대고 그대로 악마의 허벅지를 들이 받았다.
근력 전체를 따진다면 아무리 아린이라고 해도 저 악마를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다리 하나를 상대한다면 다르다. 그렇게 다리를 후려쳐 들리게 한 후에 아린은 발을 강하게 딛고 그대로 상대를 위로 던져버렸다.
직선으로 달려오던 악마의 다리를 후려치고는 들어서 어깨 위로 던져버리니 거구의 악마가 높이 떠올랐다. 균형을 잃고 떠오른 놈을 향해 브란트의 사슬이 날아들었다.
브란트가 던진 두 개의 사슬이 악마를 엮었다. 발을 땅에 딛지 못한 악마가 아무리 근육질이라고 해도 힘을 쓰지 못했다.
브란트는 악마의 힘을 끌어내지 않은 채 사슬을 이용해서 상대를 엮었다.
과연 사슬의 힘이 작용한 건지 악마의 몸을 두르고 있던 강철 같은 근육이 풍선에 바람 빠지듯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줄어든 탓에 놈은 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사슬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근육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놈에게 에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허공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채는 것을 보면 확실히 반사신경도 뛰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드도 작정하고 냉기를 모았다.
쩌저적!
양팔이 통째로 얼어붙은 놈이 머리 위를 지나가 바닥에 내려섰을 때 어느새 다가간 덱스가 그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출혈의 검으로 베고 지나가니 다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깊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나올 때 에드가 다시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날아오자 몸을 피한 악마가 내려선 곳은 병사들의 틈이었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집어서 던지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무슨 돌멩이처럼 날아왔다.
에드가 그것을 피하니 바닥에 떨어진 병사의 몸이 계란이 바닥에 깨지듯 박살 나서 흩뿌려졌다.
아린이 그 모습을 보고 이를 뿌득 갈고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날아오는 병사들을 보고는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방패를 이용해 그들을 위로 튕겨 날려 보냈다.
악마가 던진 힘의 방향을 틀어 위로 날려버린 이들이 떨어질 때 브란트의 사슬이 그들을 휘감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은 것은 덱스와 에드, 디에고 뿐인데 대낮이라 디에고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에드는 덱스와 눈빛을 교환했고, 덱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측면으로 돌아서 악마를 노리기 시작했고, 에드는 놈의 시선을 확실히 끌기로 했다.
병사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는 악마를 향해 달리던 에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병사를 보고는 성큼 뛰어올라 그를 밟고 재차 도약했다.
두 명의 병사를 징검다리 밟듯 밟고 뛰어오른 에드가 쏘아낸 시트라의 화살에 악마는 경기병을 잡아 끌어와 자신의 앞을 막았다.
이기어시로 병사를 타 넘어 휘어져 들어간 시트라의 화살이 악마의 눈에 꽂혔다.
“끄아아악!”
악마의 얼굴 반쪽이 얼어붙었고, 그 얼음 안쪽에서 악마의 얼굴이 괴사되어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악마를 향해 에드의 화살들이 연달아 날아가 꽂혔고, 덱스의 검이 몸에 상처를 남기자 놈이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을 보면서 에드는 다시 신성 화살과 아펠라의 이빨로 만든 화살을 뽑아 시위에 걸었다.
이 새끼가 경험치가 안 들어왔는데 어디서 약을 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