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다크
코룬 가의 돼지가 나타나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에드는 싸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디에고가 옆으로 말을 몰아오더니 속삭였다.
“형. 저기 돼지한테서 악마의 힘이 느껴져요.”
에드는 그 말에 코룬 가의 돼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코룬 가의 돼지가 대도를 휘두르며 소리치는데 그 눈이 붉게 물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는 그걸 확인한 순간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마침 멜트 공도 참지 못하고 삿대질하는 중이었다.
코룬 가의 돼지가 뒤로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쯧. 돼지 새끼가 왜 악마랑 붙어먹어서.”
저들의 연애사에 개입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거늘. 괜히 악마랑 붙어먹어서 손을 쓰게 만든단 말인가?
말콤과 알론도 놀란 표정으로 에드를 돌아보았다. 설마하니 귀족의 이마에 화살을 꽂을 줄은 몰랐다.
귀족들과 문제가 생길까봐 중간에서 아론을 잘 막아주었던 에드가 그럴 줄은 몰랐기에 더 당황했다.
“소영주님!”
브란이 말에서 뛰어내려 프롤을 끌어안고는 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대번에 인상이 굳어졌다. 프롤은 숨이 끊어졌다.
브란이 벌떡 일어나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카앙!
그러나 무기를 뽑기 무섭게 날아든 화살에 검을 놓쳐야 했다. 에드는 아론을 말의 목에 기대게 하고는 브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희 소영주는 악마의 힘을 품고 있었다. 종속자는 안 되는 것 같고, 대충 추종자쯤 되나 본데 너는 돌아가 영주에게 고해라. 내가 곧 찾아간다고.”
“소영주님을 죽이고 그 무슨 망발이냐!”
에드는 아론의 등에 활을 기대고는 브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악마의 힘을 품고 있는 것은 아스트론 교단에서 바로 알아낼 수 있고. 그 힘을 영주도 취했다면 날 만나게 될 거야.”
브란은 에드의 뒤편에 서 있는 성기사들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분명 할 말이 있었다.
끼어들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도 악마에 관련된 일이라면 아스트론 교단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일이다. 이단 심문관이 파견되면 그때는 아무리 날고 기는 귀족이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저리 당당하게 나서는 것을 보면 정말로 프롤이 악마의 힘에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드는 말에서 내려 태연하게 걸어왔다. 활까지 어깨에 걸치고 다가오는 모습에 브란은 주먹을 쥐었지만, 에드는 태연히 다가와 프롤의 이마에 박힌 화살을 뽑아서 가볍게 털었다.
화살에 박힌 핏물이 바닥에 길게 뿌려지는 것을 보며 브란은 치를 떨었다.
기사로서 소영주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지키지 못했으니 코룬 가로 돌아간다고 해도 좋은 꼴을 보기는 힘들 판이다.
에드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이 자의 시체는 교단에서 회수하죠.”
악마의 종속자나 추종자라면 분명 악마와 관련된 만큼 아스트론 교단에서 조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게 사실로 드러났을 때는 가문을 향한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간다.
그때는 이단 심문관이 나서게 되니 강도 높은 조사가 이뤄지리라.
전투 수사들이 다가와 시신을 회수하는 사이에 멜트 공이 소리쳤다.
“모두 포위해라!”
멜트 공의 한 마디에 그를 따라 나왔던 이들이 브란과 그를 따라온 경기병들을 포위했다. 브란이 그 모습에 멜트 공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코룬 가가 악마와 연관이 되어 있고, 그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그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는 그대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다. 코룬 가가 악마와 어떤 연관도 없다면 그대들에게 보상할 테니 그리 알고 구금되어 기다려라.”
멜트 공의 말에 브란은 이를 악물었지만, 그들을 포위한 이들이 훨씬 많았다. 프롤과 함께 이곳을 찾아온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으나 영지전을 벌이러 온 것도 아니고 명분을 가지고 따지러 온 것이니 그 인원이 많을 수 없었다.
“멜트 공!”
멜트 공은 브란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한 채 소리쳤다.
“설령 코룬 가가 악마와 어떤 연이 없다 해도 감히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가 내 딸을 탐했으니 그 죄는 코룬 가에 물을 것이다!”
에드는 그런 멜트 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태세 전환이 보통이 아니다.
하긴 자신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일을 오히려 크게 만들고, 장차 코룬 가가 악마와 연관이 되어 있자면 이 일을 빌미로 크게 뜯어낼 수 있으리라. 어쩌면 영지를 집어삼킬지도 모를 일이다.
세라가 혼인은 한 상태에서 그쪽 가문 사람들이 싹 죽으면 영지를 상속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아스트론 교단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리라.
에드가 짐작한 것을 말콤과 알론도 짐작했지만, 악마와 관련된 일은 그들도 본단에 보고해야 할 상황이다.
진짜로 이단 심문관을 파견해야 할 일이니 그들도 멜트 공의 속셈을 알면서도 탓하지 않았다.
“옳은 판단이오. 본단에 보고를 올리면 이단 심문관이 파견될 것이니 그동안 증거를 인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오. 교단에 공의 도움도 보고하겠소.”
멜트 공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을 때 세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멜트 공은 세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탓하기만 했는데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룬 시는 멜트 시에 비하면 부유한 곳이라 그곳과 사돈을 맺은 것은 잘한 일이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악마에 관련된 자들이다.
나중에라도 그것이 밝혀졌다면 아마도 세라까지 이단 심문을 받아야 했으리라. 이단 심문이 얼마나 잔혹한지 잘 알기에 이번 일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 이 애비가 잘못해서 큰 일을 치를 뻔했구나.”
“판을, 판을 용서해주세요.”
멜트 공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불같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멜트 공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판은 저택에서 근신하라. 악마에게 홀린 코룬 가에서 세라를 구해온 공을 인정해서 뇌옥에 가두지 않는 것이니 감사하고 근신하라.”
그 말에 세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칼 같은 아버지 성격에 바로 참수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전에서 깨어난 아론은 목 뒤를 잡고 좌우로 흔들며 의아해했다.
“에드 님. 이상하게 뒷목이 아픕니다.”
“신성 주문으로 회복이 안 됩니까?”
“그러게요. 금세 나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계속 통증이 느껴집니다.”
에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겁니까?”
“아까요?”
“세라 양과 기사 판에 대해서 멜트 공이 처벌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해결 방안이 있을 것 같아서 막으려고 했죠.”
“해결 방안이요?”
“세라 양이 수녀가 되면 아스트론 교단의 사람이 되니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
에드는 아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 그 상황에서 그리 말하는 것은 오히려 아스트론 교단이 귀족의 일에 깊이 관여하는 바이니 그리 말하는 것 자체가 교단과 귀족 간에 골이 깊어질 일입니다.”
“아! 그런 겁니까?”
“아스트론 교단에서 지내왔다고 해도 주임 사제를 지냈던 분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귀족들이 명분을 따지고 교단에 항의하면 난처해지는 것은 교단입니다.”
아론은 그 말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드는 그런 아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린도 처음에는 뭣도 모르는 성기사여서 한창 가르쳤는데 이 오빠란 인간도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정해 주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그래도 사람을 구해야겠다면 명분에도 문제가 없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스트론 교단에서도 아론을 중히 쓸 테니까.
하지만 이런 풋풋한 면이 귀엽게도 느껴졌다. 베네딕토처럼 노회한 대주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기는 하지만 이런 순수함은 없으니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코룬 가의 소영주가 세라 양을 되찾으려고 왔는데 보니까 악마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혼인은 애초에 없던 일이 될 것 같더군요.”
“코룬 가에 악마의 추종자가 있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론이 깨어나면 제가 가볼 생각이었습니다.”
“어디를요?”
“코룬 시로요.”
“가서 뭐하시려고요?”
에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론은 그 눈빛을 보고 대충 이해한 듯했다.
“이단 심문관에 맡기지 않으시고요?”
이단 심문관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는 하다. 다만 그들이 움직이면 코룬 가에서 악마의 힘을 얻은 이만이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싹 잡아다가 고문으로 실토하게 할 텐데 그렇게 하면 더 많은 피가 흐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경험치가 있을지 모른다. 프롤은 보잘것없는 경험치를 줬지만, 또 모를 일이다.
“그보다 아론. 이곳은 신전이고 멜트 시도 그 규모가 크니 전처럼 크로셀이 노리지 못할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죠.”
신전은 자체적인 경비도 뛰어날뿐더러 신전이 있는 규모의 도시는 도시 경비도 남다르다. 이 중의 경비를 뚫고 아론을 노리는 것은 아무리 크로셀이라고 해도 상당히 무리해야 한다.
특히나 크로셀은 손가락을 다섯이나 잃었고, 사도도 하나가 죽었다.
여섯 사도와 열 개의 손가락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거의 삼 할의 전력을 잃었다. 그러니 쉽게 노리지 못하리라.
“마침 아린도 소식을 듣고 다음 목적지를 전해왔으니 이제 그만 떠나려고 합니다.”
“아린이 소식을 전했나요?”
“예. 다음 목적지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에드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 떠날 생각입니다.”
아론은 그 말에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곧 미소를 짓고는 말을 삼켰다.
“이렇게 헤어지다니 아쉽군요.”
“그리 아쉬워할 건 없습니다. 우린 아마 또 만나게 될 테니까요.”
“예?”
이런 귀한 ‘눈’을 가진 사제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본단으로 돌아가거든 대주교들을 만나 현실적인 가르침을 받으면 조금 쓸만해 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일행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신전에서 하룻밤을 보낸 에드는 신전에서 내준 말을 얻어 타고 디에고와 함께 새벽 일찍 출발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때 출발해야 밤이 깊기 전에 코룬 시에 도달할 수 있을 터. 에드와 디에고가 서둘러 성문에 도달했을 때 성문 앞에는 한 마리 말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세라가 서 있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던가?
에드가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그녀가 모자를 벗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세라는 고개를 들고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일찍 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영주의 영애라 그런지 용케도 신전의 소식을 들었나 보다. 에드는 그 말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특별히 도움을 주려고 한 건 아닙니다.”
진짜다. 사실 아론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브란을 통해서 돌려보냈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는 도움을 받았고, 도움을 받으면 보답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보답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
“제가 지금 가진 것 중 가장 쓸만한 것이라면 아버지가 구해주신 이 보마에요. 혈통이 뛰어난 말로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도 거뜬하다고 알려진 마젤타 왕국의 말이에요.”
기동력의 중요성을 이번에 절실히 느낀 에드는 그녀가 가리킨 말을 보았다. 검은 털이 윤기가 흐르는 것이 보통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보마를 받아주세요.”
에드는 신전에서 내준 말에서 내려 그녀의 옆에 선 흑마에 다가갔다. 군마에 어울릴 정도로 우람한 덩치와 탄탄한 근육.
게다가 커다란 눈을 마주치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까지 숱한 말들을 이동 수단으로만 이용했는데 이 녀석은 뭔가 달랐다.
에드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그건 새 주인이 지어줘야죠.”
에드는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이제 ‘다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