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플래그
에드는 아론을 돌아보았다. 그는 죽은 이들의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부서진 혈마석 조각에서 일어난 핏빛 기운이 그의 푸른 신성력에 산화되어 사라졌다.
아론이 다시 눈을 뜨고 에드를 돌아보는데 대오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탈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에 에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물었다.
“아론.”
“예?”
“아론 맞습니까?”
아론은 그 물음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맞습니다.”
라그록스의 현신에 반응해서 아스트론이 아론의 몸을 빌린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놀랐네요. 어쨌든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한 겁니까?”
아론의 눈동자 색 자체가 푸르게 변했다. 신성력을 머금고 있어 그냥 푸른 것이 아니라 신비롭기까지 해 보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거지꼴을 한 상태이지만 뭔가 인세를 초월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에드도 그가 아론이 아니라 다른 존재인지 의심했던 것이고.
아론은 그 물음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그냥 ‘볼’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눈이 변했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여행한 것뿐인데 아론은 대체 무슨 기연을 얻은 걸까?
“덕분에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대악마가 직접 온 것이 아니라 현신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중급 악마는 아득히 넘어선 것 같았다. 상급 악마였던 후안이 보여주었던 것에 비하면 부족했을지 몰라도 만만한 놈은 아니었는데 아론이 뿜어낸 신성력의 파도에 휩쓸린 것만으로 제구실을 못 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면 아린보다도 강한 것이 아닐까?
신성력을 전투에 사용하는 아린과 신성력의 본질에 맞춰 사용하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이런 능력은 악마의 시대 1에서 펜드래건과 함께 했던 마틴 대주교도 펼치지 못한 힘이었다.
이것이 재능인가?
아론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문제는 라그록스가 아론을 명확하게 인지했을 거라는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그 수준이 다르게 그를 노릴 것이 뻔했다.
설득하려는 것이든 아니면 그를 죽이려는 것이든.
“오늘 밤은 자기 그른 것 같은데 이동할까요?”
“형! 저 진짜 졸리거든요. 머리만 대면 잘 것 같아요. 오늘은 계획대로 여기서 쉬죠. 꼬리도 잘라냈는데.”
에드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피곤하냐?”
디에고가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저랑 아론 사제님 들고 뛰신 형만큼 피곤하냐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진짜 힘들어서 그래요.”
에드는 너무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했나 싶었다. 자신이야 이렇게 뛰어다녀도 상관없지만, 아론이나 디에고는 다르니까.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자.”
두 명이 죽어 나갔지만, 기도하면서 다 태워버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서 쉬고 가도 안 될 것은 없었다.
“그럼 다시 불 피우죠.”
아론이 얼른 불을 피울 준비를 하는 동안 디에고는 동굴로 가지고 들어갔던 새를 가져와 손질을 마저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에드는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갔다.
레벨이 오르는 데 필요 경험치가 압도적으로 늘어나서 당분간 레벨을 못 올릴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아서 레벨이 올랐으니 스탯을 투자해야 했다.
고민하지 않고 민첩에 투자했다. 레벨이 오르기 힘든 만큼 올랐을 때 투자하는 스탯 하나하나의 효과가 남달랐다. 지금도 민첩을 하나 올렸을 뿐인데 그 효과가 그대로 전해졌다.
이래서 레벨이 깡패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지금이라면 아까 마지막에 튀어나온 라그록스의 그림자도 쪼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놈의 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때 디에고가 굽는 새가 풍기는 향이 사색을 방해했다. 아무리 에드가 체력이 높다고 해도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
셋이서 고작 새 두 마리를 나눠 먹는 것은 아쉬웠지만, 에드나 아론이나 과식은 하지 않았기에 둘이서 한 마리를 먹고, 디에고 홀로 한 마리를 잡아 뜯었다.
간단히 배를 채운 에드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 ‘보는’ 것 말인데 혹시 신성 주문입니까?”
아론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보이던 것이라서.”
아론의 대답을 듣고 에드가 입맛을 다셨다. 신성 주문이라면 아린에게 배우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냥 재능이자 능력인 건가?
아론을 영입해야 하는 건가?
흔적을 쫓아가던 말콤과 알론은 갑자기 느껴지는 신성력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팔콘의 추적을 따라 움직이던 둘은 그 신성력을 느끼기 무섭게 치고 나갔다. 추적은 흔적을 쫓아 움직이는 것이지만, 이렇게 강대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그들이 찾고 있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찾아가야 할 일이다.
이만한 신성력은 그들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을뿐더러 이만한 신성력을 가진 이가 있다고 해도 이걸 방출하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으니까.
이만한 신성력을 지닌 이가 위험에 처했다면 반드시 구해야 할 일이다.
“흔적은 계속 쫓아가 주게. 일단 가볼 곳이 있으니.”
말콤과 알론은 신성력이 느껴진 곳을 향해 달려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선배. 저만한 신성력이면 거의 마스터 팔라딘 수준 아닙니까?”
“마스터 팔라딘께서는 저리 신성력을 낭비하지 않으시겠지.”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 신성력이면 거의 교단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겠는데요?”
“그건 그렇지.”
말콤은 아론이라는 사제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후배인 아린의 오빠이면서 나중에 본단에서 중히 쓸 인물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신성력은 느끼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서 달리던 말콤과 알론은 곧 저 멀리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거 뭐 해 먹고 있나 본데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만한 신성력이 분출될만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곳에서 뭔가를 해먹고 있다?
“속도를 내보지.”
말콤과 알론 모두 전력을 다해서 나무를 박차기 시작했다.
간단히 배를 채우고 나서 동굴 앞의 바위에 앉아 있던 에드는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에드는 천천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크로셀의 잔당이 남았나 싶었지만, 제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악마의 힘을 다루는 자였다면 벌써 알아냈을 터.
에드는 화살을 시위에 걸어만 놓은 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공터에 나타난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인간들. 아린처럼 임무를 맡고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서 하늘색 망토에 아스트론의 증표가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성기사임을 드러내고 다니는 성기사.
그들은 난장판이 된 공터에 내려서서는 한 명은 에드를 경계했고, 다른 한 명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선배. 여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성화가 일어났었는데요?”
“성화?”
단순히 신성력을 방출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삿된 힘을 태워버렸다는 건가?
“성기사 말콤이라고 하오. 이곳에서 신성력이 크게 일어났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소?”
에드가 굳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었다. 동굴에서 소란을 듣고 나온 아론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담담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으니까.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아론이라고 합니다.”
말콤의 옆에 있던 이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기를. 성기사 알론입니다. 아론 사제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을 위해 파견된 성기사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아론이 설명하려고 할 때 잠을 자던 디에고가 하품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런 디에고를 본 순간 알론이 검을 뽑아 들었고, 말콤도 인상을 굳혔다.
디에고가 흠칫 굳는 사이에 에드는 그의 앞을 막았다.
아론이 그런 디에고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검을 거두시죠. 알론 경.”
“악마의 힘을 품은 자입니다. 아론 사제. 이쪽으로 오시죠.”
아론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저를 구해준 이입니다. 검을 거두시죠.”
알론이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악마의 힘을 품고 있는 자는 즉결 처형이거나 아니면 잡아다가 이단심문관에게 맡긴다. 그런데 아론이 그를 막아서고 있으니 아론도 잡아가야 하나 싶었다.
그때 말콤이 손을 들어 알론을 막았다. 알론이 돌아보자 말콤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알론은 검을 거두었고, 그제야 아론의 뒤에서 활을 겨누었던 에드가 활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알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성기사에게 활을 겨눈 건가? 악마의 힘을 지닌 자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이단심문관을 만나서 해명해야 할 판에?
에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에고의 씨앗이 발아하고 그 힘이 쑥쑥 크는 만큼 성기사 정도만 되어도 디에고가 악마의 힘을 품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귀찮게 되었다.
그래도 아론이 막아서 성기사 둘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아무리 성기사라고 해도 디에고를 해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말콤은 더는 따지지 않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그쪽 이름을 듣지 못했소만.”
“에드.”
에드의 짧은 대답을 들은 말콤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뒤에 있던 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드면 악마 사냥꾼?”
“그렇게도 불리죠.”
“아린과 함께 퇴마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에드는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퇴마행을 하고 있었는데 아론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하러 왔습니다.”
말콤의 시선이 아론을 향했고,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 아마 크로셀에게 끌려갔을 겁니다. 여섯째가 저를 잡아가는 중이었고, 넷째와 일곱째까지 합류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론의 설명을 들은 말콤과 알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작 크로셀의 손가락 중 하나에게 성기사 존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성기사 존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자가 셋이나 모였다면 자신 둘로는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서 아론을 구하고 지켜낸 것을 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강대한 신성력을 느꼈는데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있겠소?”
아론이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신성력을 일으켰었습니다.”
“아론 사제가 일으킨 거란 말입니까?”
“예.”
아론이 거짓말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말콤은 에드와 디에고를 한 번씩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적들의 움직임이 본단의 예상을 뛰어넘었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저희가 왔으니 본단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말콤의 시선은 에드에게도 향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보답하겠소.”
에드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론은 잠시 말콤과 알론을 바라보다가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단에서 귀한 걸음 했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죠. 동생이 보고 싶지만, 지금은 만날 때가 아닌가 봅니다.”
어? 그런 식으로 플래그 세우면 안 되지!
에드는 아론이 뭔가 더 말하려고 할 때 그의 입을 틀어막고는 말콤을 바라보았다.
“성기사 두 명이 호위의 전부입니까?”
알론이 말콤의 뒤에서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둘이면 차고 넘칩니다.”
에드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냐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에드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린 알론을 말콤이 막고는 굳은 눈빛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본단에 가기 전에 전력을 충원하시죠. 크로셀의 뒤에 있는 자 중 라그록스가 현신한 상태로 아론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올 텐데 고작 이 인원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에드도 언제까지고 아론을 데리고 이동할 수는 없다.
아린에게 간다면 그를 데리고 갔다가 가까운 신전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간이 큰 크로셀이라고 해도 신전을 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저들에게만 맡기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에드는 말콤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말했다.
“다음 신전까지는 저와 디에고가 함께 하죠.”
어떻게 구한 아론인데 이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말콤이 그 말에 디에고를 바라보고는 인상을 굳힌 채 말했다.
“우리는 성기사들이오. 도움을 받았으니 눈앞에서 악마의 힘을 지닌 이를 보고도 눈감아 주는 일은 할 수 있으나 일행이 될 수는 없소.”
계속 고집을 부리면 검이라도 뽑겠다는 태도에 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엑스트라들 주제에 주조연급 아론을 위험하게 만들겠다는 건가?
아론이 그런 에드를 향해 다가와 두 손을 잡고는 말했다.
“저도 이제 그리 쉽게 잡혀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은 마세요.”
원래 저런 말을 할 때가 더욱 위험한 법. 하지만 아론이 보고 있는 데서 성기사 둘을 죽여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에드의 시선은 다시 말콤에게 향했다.
“지원 요청은 꼭 하세요.”
말콤도 그 말에는 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느끼기에도 아론의 신성력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수준이니까. 성기사를 더 지원받더라도 말이다.
“그리하겠소.”
성기사 둘은 아론을 데리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렇게 멀어지는 이들을 보면서 디에고가 물었다.
“그냥 저렇게 보낼 거예요?”
“아니. 몰래 따라가야지. 적어도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론의 말이 플래그를 세웠다는 것은 경험치들이 그를 향해 몰려올 거란 얘기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