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톰
일행의 선두에서 말을 탄 에드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서는 아린이 말을 타고 있는데 마치 그림의 한 장면 같았다.
워낙에 미인인 데다가 요즘에는 은은한 후광이 비쳐서 자체 발광하는 중이다. 에드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불쑥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아린이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았다. 에드는 그 눈빛에 담담히 말을 이었다.
“브란트 형님을 일행으로 받아줘서요.”
아린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엠마 때문이에요. 그렇게 반듯하게 자란 아이의 아버지라면 믿어도 될 것 같아서요.”
에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아린도 감각이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엠마와 브란트의 대화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다 들릴 정도였다.
디에고를 일행으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은 유해진 그녀의 기준 덕분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에드가 받아들이기로 했잖아요.”
그 말이 묘하게 가슴을 간질였다.
“절 그렇게 믿어줘서 고맙다고 한 거예요.”
아린은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뭐가요?”
“낮에 쉬어야 하잖아요.”
에드는 사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만 눈을 붙이면 피로가 오지 않을 정도의 체력이었다. 필요할 때는 며칠 정도 밤을 새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의 체력.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올라간 체력 덕분이다.
“이따가 덱스와 교대하기로 했어요.”
마차 지붕에 간단한 차양막을 만들고 그 아래에서 덱스는 잠을 자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낮과 밤이 바뀌어 생활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마을을 떠나면서 두 필의 말을 구해서 덱스와 에드가 번갈아 가면서 말을 타고 한 마리는 아린이 계속 타기로 했다. 아린이 낮에 일행의 안전을 책임지니 그녀에게 말 한 마리를 배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브란트를 일행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마차에서 아린도 내렸다. 브란트를 온전히 믿기 전에는 테인과 둘이 둘 수 없었지만, 이제 일행으로 받아들였으니 믿고 맡기기로 했다.
브란트와 엠마, 테인과 디에고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중이다.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기는 하겠죠.”
아린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서 쉬고 있을 브란트의 능력은 직접 겪어 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테인이야 악마의 힘으로 악마를 찢어 죽일 수 있다면 더 좋아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에드를 믿고 있기에 그녀도 브란트의 합류를 인정했을 뿐이다. 아린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에드가 물었다.
“지금까지는 혈마석이 최소 동급에서 상급의 존재에게 인도해 줬는데 이번에도 그럴까요?”
아린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급 악마에서 상급 악마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힘의 강도까지는 구분할 수 없어서 모르겠어요. 하지만 상급 악마의 개체 수를 생각하면 상급 악마일 가능성은 작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특히나 계보에 없는 상급 악마는 찾기가 더 힘들다. 상급 악마 정도 되면 스스로 숨기고 사람들 사이에 숨어 지내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다.
후안이 작정하고 인간 사이에 숨어 버리니 그를 찾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린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급 악마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는 하죠.”
처음 후안을 만났을 때와 지금의 우리 전력은 또 달라졌다. 레벨도 올랐고, 장비도 크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행이 늘었다.
그 전력도 쟁쟁한 이들이.
“손발을 맞춰볼 만한 녀석이었으면 좋겠네요.”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은 오는데 직접 싸워보며 손발을 맞춰보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하급 악마는 개개인이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인물들이 모여 있다 보니 어떻게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연구해보기 위해서라도 손발을 맞출 기회가 오는 것이 좋았다.
아린은 에드의 말에 새삼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에드의 말처럼 중급 악마 이상의 적을 만나러 가는 데도 걱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있으면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좋겠네요.”
밤이 되기 전에 야영할 곳을 찾고,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을 준비하는 것은 더그가 하지만, 이제는 그를 돕는 일손이 둘이나 생겼다.
디에고와 엠마가 두 팔 걷어붙이고 그를 도와주는데 더그의 요리 솜씨에 반한 엠마는 요즘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우는 중이었다.
야영지에서 먹는 음식들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더그의 손을 거치면 마법처럼 맛이 좋아져서 그걸 배우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다.
그리고 덱스는 오늘 말을 타고 온 것 때문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중이었다. 처음 말을 탔으니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아린이 말 타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전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덱스가 말을 타는 법은 왜 이리 젬병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아린은 마차에 들어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중이었고, 테인은 브란트를 옆에 데려다 놓고 뭔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악마 연구가인 테인에게 배운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에드는 일행을 돌아보다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해가 저물어가는 중이라 마물이 판치고 다니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느껴지는 기척에 에드는 덱스에게 눈짓했다.
덱스가 입 모양으로 ‘왜?’냐고 물을 때 에드는 조용히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집중하며 활의 시위를 당겼다.
다가오던 기척은 단 하나. 그런데 은밀하기 짝이 없다. 나뭇가지를 밟고 다가오는 야수 같은데 가만두면 디에고나 엠마가 위험할 것 같아 잡기로 했다.
에드가 활의 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전과는 비할 데 없이 빠르게 날아갔다. 야수는 그 와중에 뭔가 느꼈는지 몸을 틀고 있었지만, 이기어시로 날린 화살은 이미 방향을 틀어 그 머리를 꿰었다.
작지만 들어오는 경험치에 에드가 그쪽으로 가서 나무에서 떨어진 녀석을 보았다.
몸길이가 대충 2미터가 넘는 재규어였다. 표범속에 속하는 녀석으로 덩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정도 녀석이 나무 위에서 덮쳤다면 앗하는 사이에 물려갈 수도 있었다.
에드가 재규어를 어깨에 걸친 채 가지고 돌아오자 더그가 식칼을 뽑아 들며 물었다.
“오늘은 고기 좀 구울까요?”
에드는 뜻하지 않았던 사냥이라 어깨를 으쓱이고 재규어를 내려놓았다. 그때 디에고가 다가오며 물었다.
“저기 그 전에 사령 소환 먼저 해도 될까요?”
에드는 그 말에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쥐의 사령을 얻었는데 벌써 하나 더 둘 수 있을 정도라고?
대체 저 씨앗의 성장 속도는 왜 이리 비정상적인 걸까?
“가능하겠어?”
“예. 아빠도 다음 사령에 대해서 고민해보자고 하셨거든요.”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해봐.”
사령 소환은 에드도 아직 잘 모르는 영역이다 보니 호기심이 동했다.
디에고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살짝 얼굴을 붉혔다. 특히나 엠마의 시선에 헛기침까지 한 디에고는 품에서 오브를 꺼내 들었다.
뼈로 만들어진 오브는 저주술사 이스페르토를 죽이고 주워왔던 물건이었다.
디에고가 그걸 들고 눈을 감자 신비로운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디에고는 그 상태 그대로 죽은 재규어의 이마에 가져다 대고 낮게 중얼거리는데 에드도 알아듣지 못했다.
후안에게 배우는 건 하루에 길어야 몇 분 되지도 않는데 벌써 저렇게 사령술을 익힌 것을 보면 정말 타고난 사령술사인가 보다.
디에고가 주문을 외우자 재규어를 닮은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디에고는 왼손을 내밀어 그런 재규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재규어는 디에고의 손길이 닿자 가만히 눈을 떠서 눈 맞춤을 했다. 둘이서 잠시 그렇게 눈 맞춤을 하더니 곧 재규어가 눈을 내리깔고 디에고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재규어의 사령 이마에 룬문자로 이뤄진 술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과 함께 사라진 재규어는 디에고의 옆에 다시 나타났다.
2미터에 달하는 몸길이를 지닌 재규어가 옆에 나타나자 디에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사령이라고는 제리 밖에 구하지 않았었는데 이만큼 큰 녀석을 사령으로 두는 것이 가능할까 확신이 서지 않았었다.
특히나 엠마가 보고 있는 데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티 나지 않게 노력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령을 얻자 엠마가 눈을 반짝였다.
“디에고! 대단해!”
엠마의 칭찬에 디에고가 살짝 턱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령술사라고 얘기했잖아.”
“말은 들었지만, 사령술이 이렇게 대단한 건지 몰랐지.”
엠마가 본 디에고의 사령이라고 해봐야 손바닥에 올라오는 크기의 제리뿐이었다. 그래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2미터나 되는 사령과 계약하는 모습을 보니 대단해 보였다.
디에고는 인심 쓰듯이 물었다.
“혹시 지어 주고 싶은 이름 있어?”
엠마가 그 말에 성큼 디에고에게 다가갔다.
“정말? 내가 지어줘도 돼?”
“물론이지.”
디에고는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에 입술을 씰룩이며 답했다. 엠마가 웃으며 물었다.
“톰이라고 지어도 될까?”
디에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규어의 사령 이름을 짓는데 무슨 사내아이 같은 이름을. 대체 어떤 놈의 이름인지 질투가 났다.
“톰? 그 흔해 빠진 이름은 누구···.”
“외할아버지 성함이거든. 날 되게 예뻐해 주셨는데···. 그런데 뭐라고?”
“···어쩐지 이름이 친숙하고, 부르기도 편하고, 착착 감긴다 했네. 톰! 좋다! 톰! 넌 이제부터 톰이다.”
에드는 둘이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2미터짜리 재규어의 이름이 톰이 되는 웃기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톰과 제리인가?”
디에고는 엠마가 의심의 눈초리로 째려보는 동안 얼른 제리를 소환해 톰의 머리 위에 올려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엠마는 디에고가 노력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귀엽네.”
엠마는 누가 귀엽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던 일행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지하 동굴의 넓은 공동에 나타난 핏빛 갑주의 사내는 뿔이 부러진 커다란 토끼를 타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의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핏빛 갑주의 사내는 토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육망성이 그려진 원탁에 앉아있던 여섯 명의 남녀를 바라보던 사내가 토끼에서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로브를 눌러쓰고 있던 이들 중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혹시 라그록스인가?”
핏빛 갑주의 사내는 성큼성큼 원탁으로 다가가 양 주먹으로 원탁을 짚은 채 그곳에 모인 이들을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맞아. 내가 라그록스다.”
라그록스임을 인정하는 대답에 모인 여섯 명이 모두 긴장했다. 라그록스는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희 크로셀의 힘이 필요해서 왔다.”
노인이 로브 안쪽에서 오브를 꺼내 드는 순간 그 머리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수평으로 잘려나간 노인의 머리가 떨어져 내릴 때 다른 다섯 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엇으로 노인의 머리를 날려버린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라그록스는 원탁으로 붉은색의 보석을 던져놓으며 말했다.
“공짜로 빌리겠다는 것은 아냐.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는 힘을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