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펠메스의 가호
아린이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고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다가 그곳에 몰린 이들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늦어서 미안하군. 손님들에게 폐를 끼쳤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너무 일을 크게 벌인 것은 아닌가 싶네요.”
펜드래건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왕궁이라도 쳐들어가야지. 그게 동료지.”
펜드래건의 말에 에드는 씨익 웃었다. 펜드래건은 그런 캐릭터였다. 동료를 위해서라면 왕궁이라도 때려부수는.
그런 그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일이었다.
미안한 것은 그들이 펜드래건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습격이 있어 그의 정예병들이 죽었다는 점이었다.
펜드래건은 디에고를 한팔로 안아 들어 올리고는 세실리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아젤트 공에게 다가갔다.
“내 동료들이 악마의 종속자를 처단했네. 그 와중에 자네에게 재산상 손실을 일으켰으니 얼마든지 청구하게. 내가 배상하지.”
“아닙니다. 악마에 관련된 일인 줄 알았다면 병사에게 말해서 도움을 줬을 텐데요. 악마 종속자를 잡는 데 고작 담벼락 하나 무너진 것이라면 싸게 먹혔네요.”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다. 병사야 아무리 많아 봤자 저주술사에게 걸리면 그냥 꼭두각시밖에 안 됐을 텐데.
“그럼 마차 하나만 내주게. 저 시신은 우리가 거둬갈 테니.”
아젤타 공이 손짓하자 금세 마차가 준비되었다. 마차에 머리 없는 시신을 싣고 나자 펜드래건이 아젤타 공을 향해 미소 지은 채 말을 건넸다.
“우리는 돌아가도록 하겠네. 자고 일어났는데 아깝다는 생각 들면 연락하게. 이건 농담 아니야.”
펜드래건은 그리 말하고는 디에고를 안은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디에고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무리해서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펜드래건의 품에 안긴 채 잠든 디에고를 바라보던 에드는 어째 아들과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드래건과 세실리아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는데 저들이 아이를 낳았다면 딱 저 나이였을 거라서 그런지 대하는 느낌이 다르다.
반쯤 혼절한 디에고를 굳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직접 안아주었으니까.
펜드래건은 그렇게 왼팔로 디에고를 안은 채 아젤타 공의 집을 나와 대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의 등을 보여주던 펜드래건은 대저택 앞에 벌어진 끔찍한 참상을 보고는 인상을 굳혔다. 그는 디에고를 안은 채 응급치료를 마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대신전에 기별을 넣었으니 곧 사제들이 올 것이다. 조금만 참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병사들의 대답을 들은 펜드래건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극도로 분노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수하가 다친 것에 대한 분노.
이름 모를 저주술사가 만약 지금의 펜드래건을 만났다면 곱게 죽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체들을 수습하고 있는 병사들까지 만난 펜드래건의 망토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이기 시작했다.
“시신들을 수습해라. 그들의 장례는 대신전에서 치를 것이니.”
대신전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귀족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였으나 펜드래건은 거침없었다. 저 성격에 안 들어주면 대신전도 들러 엎겠지?
그렇게 펜드래건은 거실까지 들어갔고, 테인을 보살피던 소피아가 디에고를 발견하고 달려오자 그녀에게 디에고를 돌려주었다.
“디에고.”
디에고가 깨어나지 못하자 소피아의 눈에 당혹이 서렸다. 그 모습에 펜드래건이 담담히 답했다.
“무리해서 그런 것이니 걱정할 건 없소. 에드와 아린이 늦지 않게 구했으니 걱정은 접어두시오.”
소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와 아린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내젓고는 답했다.
“디에고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그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을 겁니다.”
소피아는 그 말에 디에고를 끌어안은 채 내려다보며 답했다.
“디에고는 어려서부터 똑똑했어요.”
펜드래건은 주위를 돌아보고는 다가오는 집사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디에고와 소피아를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
“예.”
펜드래건은 망토를 벗고는 직접 시체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에드와 아린도 돕고 나섰고,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덱스도 도왔다.
왕도 수호대원들의 시체를 모두 저택 밖으로 빼내는 사이에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왕도 수호대 복장을 한 이들의 선두에 선 이가 말에서 내려서 펜드래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마. 죄송합니다.”
“수호대장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 이들의 죽음은 저 악마 종속자에 의한 것이었으니.”
악마 계약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사람들에게는 악마 종속자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갔다.
“저희가 시신을 수습해도 되겠습니까?”
“부탁하네. 내 대신전에 일러 이들의 장례식을 치를 터이니 가족들에게 연락해주도록 하고. 그 가족들에 대한 포상은 내가 직접 할 테니 신경 써주게.”
“감사합니다.”
수호대장이 손짓하자 그를 따라온 수호대원들이 마차에 시체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시체의 끔찍한 상태에 헛구역질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시신들을 수습해서 떠났다.
수호대원들이 떠나고나서야 펜드래건은 여인의 시신에 관심을 보였다. 마차에 올라선 펜드래건은 무심한 눈으로 여인의 옷을 탈탈 벗겼다.
그리고 여인의 복부에 나 있는 핏빛 룬문자의 원을 보고는 세실리아를 불렀다.
“세실리아. 와서 이것 좀 봐봐.”
세실리아도 마차에 올라 여인의 복부에 남아있는 핏빛 룬문자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자 맞네요. 실력이 대단했나 본데요?”
“그래. 그것도 상급 악마 이상. 어쩌면 대악마 급과 계약한 것을 보면 이름 없는 인간은 아니겠어.”
펜드래건이 에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
“못 들었습니다.”
에드의 대답에 펜드래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보통 이런 종자들은 주저리주저리 떠들게 마련인데 의외군.”
“아, 뭐라고 자기소개 하기에 화살부터 날렸습니다.”
펜드래건은 그 말에 에드를 빤히 돌아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화끈하군.”
펜드래건은 그리 말하고는 여인의 짐들을 뒤적였다.
“다른 특별한 점은 없었나?”
“저주술사였습니다.”
“저주술사라···.”
그때 안쪽에서 머리에 붕대를 싸맨 테인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카르엔 대신이 데리고 있던 이스페르토라는 자의 스승일 거라고 보고 있네.”
“영감. 내가 그런 잡배까지 일일이 기억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
테인은 그 말에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답했다.
“솔직히 이스페르토라는 자야 나도 잘 모르네. 그런데 저주술사 중에 악마와 계약할 만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걸세.”
테인은 그리 말하고는 여인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확인했다.
“흐음. 펠메스의 가호?”
펠메스라면 바람의 신. 어쩐지 망토 주제에 에드의 화살 궤도를 틀어 내더라니, 유명한 물건이었나 보다.
“에스피안. 아직도 살아있었나?”
“아는 인간이야?”
펜드래건의 물음에 테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30년 전쯤 활동하던 저주술사였네. 그때 성기사 하나 죽이고 척살령이 내려져서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있었군.”
“성기사를 죽이고도 살아남았다고?”
펜드래건도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래서 유명했지. 나도 죽은 줄 알았었네.”
거기까지 말한 테인은 머리가 어지러운지 비틀거렸다. 에드가 옆에 있다가 부축해주자 테인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펠메스의 가호. 이거 성유물인데 펠메스 교단에 돌려주면 고마워하겠군.”
에드는 그 말에 테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성유물이면 당연히 챙겨야지.
문제는 에드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눈먼 화살을 튕겨 내준다는 것은 좋은 기능이지만, 에드의 감각은 눈먼 화살이 아니라 눈이 달린 화살도 피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번에 레벨이 오르면서 민첩을 투자한 결과 화살 같은 건 맞으라고 고사를 지내도 맞지 않을 것 같았다.
갈색의 망토에 성유물.
신전에 반납하기보다 필요한 이가 쓰는 게 좋다.
“반납이야 천천히 해도 되겠죠. 잃어버린지 삼십 년도 더 된 물건이면.”
테인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겠군. 누구 줄 생각인가?”
“디에고요.”
조금 커 보이기는 하지만 그거야 접어서 걸치더라도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테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일세. 펠메스 교단에서도 악마를 잡는 데 쓰인다면 불만을 품지는 못하겠지.”
펠메스 교단에서야 다른 생각을 가지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걸 챙긴 걸 어찌 안단 말인가?
펜드래건은 그 말을 듣고는 물었다.
“혹시 에스피안과 함께 하는 패거리가 있소?”
“아니. 홀로 움직이는 것으로 아네. 제자를 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으니까.”
“아쉽군.”
펜드래건이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패거리가 있었다면 가서 머리를 쪼갰을 분위기다.
“죽은 이들을 애도해야겠군. 술 한 잔으로 털어버리러 가세.”
집사와 하녀들이 그사이 바삐 움직였는지 핏자국은 남아 있어도 부서진 집기들은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일행이 모두 응접실에 모이자 집사가 술병과 잔을 내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크리스탈 잔이 주어졌는데 펜드래건과 세실리아는 약간 일그러진 주석잔을 들고 있었다. 악마의 시대 1에서 펜드래건이 노상 가지고 다니던 술잔이었다.
저 술잔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추억 돋는 술잔에 독한 위스키를 담은 펜드래건이 가볍게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복수는 끝났다. 복수의 대행자에게 영광이 있으라.”
펜드래건은 그리 말하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모두가 그를 따라 술잔을 비우자 펜드래건이 에드를 바라보았다.
“떠나는 건가?”
하여간 눈치는 백단이다.
“예.”
펜드래건의 시선이 테인에게 향했다.
“영감도 따라갈 거지?”
“솔직히 왕도의 생활은 내게 안 맞아. 죽기 전에 마지막을 불사르고 싶네.”
“영감 답네.”
펜드래건은 다시 채워진 잔을 들며 말했다.
“미안하군. 손님에게 집의 안전을 맡긴 꼴이야.”
“저희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펜드래건은 에드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 떠나는 건가?”
에드는 아린을 한 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대신전에 들러서 몇 가지 알아보고 떠날 생각입니다.”
혈마석을 통해서 라그록스의 흔적을 찾은 이상 펜드래건의 집에서 뭉개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 악마를 잡는 길을 지체할 수는 없지. 모두 수고했으니 잔을 비우고 쉬도록 하지.”
모두 단숨에 잔을 비웠고,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
작은 신전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일반 불과 다르게 핏빛 불길이 하늘까지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불길을 등진 사내가 서 있었다.
핏빛 갑주를 입은 사내는 커다란 토끼 한 마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황소만 한 토끼는 이마에 뿔까지 나 있었는데 지금 그 뿔이 반만 남고 부러진 상황에서 사내에게 깔려있었다.
사내는 부러트린 토끼의 뿔로 토끼의 등에다 술법진을 그리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 죽었군.”
세상에 뿌려 놓은 혈마석의 주인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고 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슬쩍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짜증 나는 데?”
혈마석의 주인들이 죽으면서 자신의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아스트론의 종이 계속 이렇게 훼방을 놓는다면 슬슬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우선은 할 일부터.”
사내는 손에 들린 뿔로 토끼 등에 다시 술법진을 이어서 그리며 콧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