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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악마 사냥꾼이 되었다-64화 (64/202)

#64

풍운

“하아. 이것 봐라?”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던 나신 여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눈동자가 유독 붉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여인이 거실로 나오자 거실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의 목을 졸라서 길게 혀를 내민 채 죽은 남녀가 방안 가운데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가슴은 뻥 뚫려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거실 바닥에 흥건했다.

여인은 나신의 몸으로 바닥에 흥건한 핏물 위에 섰다. 그리고 나직하게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하자 바닥에 흥건했던 핏물이 그녀의 발로 몰려들더니 발을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서 몸에서 핏빛 룬문자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아랫배까지 올라와 빛나는 룬문자들이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강하게 빛을 뿌리고 사라졌다. 여인은 신음을 흘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잠시 여운을 즐기다가 벗어놓은 옷을 걸쳤다.

“쓸만한 제자 하나 찾으려다가 아끼던 패밀리어를 잃었군.”

창문을 연 여인은 어두운 왕도를 살폈다. 조용히 진행되고 있지만, 소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오니 재미있는 일들이 많네.”

그녀는 열린 창문으로 훌쩍 몸을 날렸고,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밀리아는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검은 보따리 하나를 달랑 들고 걸어오는 에드를 보고 에밀리아는 말에서 내렸다.

에드는 그녀에게 보따리를 내밀며 말했다.

“카르엔의 수급입니다.”

에밀리아는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에드는 그런 그녀에게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마젤타 왕국의 특첩부대 켈베로스의 인물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카르엔과 남부의 펠만 공과 깊은 유착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사해 보세요.”

에밀리아는 에드가 한 말을 모두 기억에 꼭꼭 담아뒀다. 에드는 그녀를 지나쳐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타고는 고삐를 쥔 채 말했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당신과 함께하길.”

말을 마친 에드가 말머리를 돌려서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밀리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시선을 드니 에드는 이미 골목을 돌아서 사라진 후였다.

부탁만 들어주고 다른 말도 없이 자신의 앞길을 축원하고 사라져버렸다.

짧은 한숨을 내쉰 에밀리아는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펼쳐보았다. 그곳에 카르엔의 수급이 놓여 있었다.

트라비아 왕국의 대신이자 태자파의 수장, 남부 귀족의 실질적인 대표자.

그의 머리가 손에 들려 있었다.

에밀리아는 수급을 다시 보따리에 넣고 싸맨 후에 말의 안장에 걸었다.

“왕궁으로 돌아간다.”

“예.”

에밀리아는 이것으로 자신이 왕위에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느꼈다. 그리고 그 공의 대부분이 조금 전 먼저 말을 달려간 에드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과 함께 왕궁까지 가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할 때였다.

왕궁을 향해 말을 달리던 에밀리아는 왕도 수호대를 통솔하고 있는 왕궁 친위대 기사를 만나서는 명령을 내렸다. 카르엔을 사살했으니 그에 대한 수색을 멈추라는 명령을.

왕궁 친위대 기사가 사방으로 병사들을 보내 소식을 전하라 명하고는 에밀리아의 뒤로 따라붙었다. 수호 기사인 반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호위를 하겠다는 뜻.

그렇게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왕궁 친위대가 하나씩 돌아와서 합류했다. 그렇게 왕궁 친위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에밀리아는 왕궁으로 환궁할 수 있었다.

뒷짐을 진 밀러는 앞에 눕혀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수족처럼 일을 해오던 켈베로스의 요원들이었다.

안가에서 카르엔을 지키고 있던 자들.

왕궁 친위대와 근위병들이 나섰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국왕이 얼마나 각오를 한 것인지 왕도 수비대를 풀어서 왕도의 수색을 시작했다.

안가의 안전이야 확보했지만, 그건 이 정도 전시 태세에 맞춰서 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심복인 샤샤를 보내서 무리해서라도 왕도를 탈출할 방법을 찾으라고 했다.

그런데 샤샤는 잠시 후에 홀로 돌아왔고, 그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를 듣고 찾아온 곳은 그들이 왕도에서 쓰는 비밀 기지였다.

그들이 사들인 가게의 지하에 마련된 비밀 기지.

그곳에 도착한 밀러는 죽은 요원들을 볼 수 있었다.

“카르엔은 죽었다고?”

“예. 카르엔과 반데스. 둘 다 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습니다. 카르엔의 수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밀러는 죽은 요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이들은 단순한 특첩부대 요원들이 아니다. 마젤타 왕국이 가장 견제하고 있는 트라비아 왕국의 왕도에 파견된 만큼 켈베로스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들을 지닌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 된다.

“아칼란은 아니군.”

아칼란의 요원들이라면 이렇게 저항도 제대로 못 하고 죽었을 리가 없었다. 죽은 요원들의 시체 중에서 그나마 저항흔이 남아 있는 이는 단 하나다.

나머지는 상처의 크기로 봐서는 화살에 당했다. 은신하고 있는 상태에서 저항도 못 하고 죽은 거로 봐서는 이만한 궁술을 지닌 자가 아칼란에 있었다면 몰랐을 리가 없었다.

뛰어난 궁술. 그리고 궁술만 능한 게 아니다. 비도에 당한 후에 목이 잘린 이가 있었고, 세 명의 목은 너무나 매끄럽게 잘려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검기에 당한 것 같습니다.”

“펜드래건이라도 나타났다는 건가?”

“그는 그 시간에 궁에 있었습니다.”

밀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안가의 상황에 대해서 말해 봐.”

샤샤는 자신이 본 상황을 그대로 설명했다.

“저택 외부를 감시하던 이들은 감시하던 위치 그 자리에서 죽었고, 창문을 통해 외부를 감시하던 말튼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또 한 명이 죽었고, 세 명은 거실에서 대기하던 위치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외부를 감시하던 이들과 말튼은 화살에 죽었고, 한 명은 비도에 맞고 목이 베였고, 후에 세 명은 모조리 자신의 위치에서 검기에 목이 베였다?”

“예.”

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펜드래건은 활을 쓰지 않으니 다른 자다. 그리고 검기를 다룰만한 자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을 터. 장비의 힘일 수도 있겠군.”

검기를 다루는 무기는 많지 않다. 성유물이라면 한 개 정도고 유물급 장비도 셋을 넘기지 않는다.

“이 친구들은 묻어주고, 누구에게 당한 것인지 특정해. 이 친구들의 목숨값은 받아야지.”

카르엔의 죽음으로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지만, 이만한 특급 요원들은 길러내는 것만 해도 한 세월이고 한 명 한 명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밀러에게 있어 수족과 같은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모두 죽었다.

“그리고 본국에 지원 요청해라. 특무대가 필요하다.”

첩보 활동을 하는 요원이 아닌 척살의 임무를 맡을 이들이 필요하다.

적국의 왕도 내에서 작전을 펼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나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말을 달려 대신전까지 달려간 에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제를 만날 수 있었다. 베네딕토에게 인도했던 사제였기에 에드는 그를 따라 다시 베네딕토의 집무실로 갈 수 있었다.

아린은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고, 베네딕토는 찻잔에 차를 따르는 중이었다.

“고생했네. 이리와 앉게.”

에드가 자리에 가서 앉자 베네딕토는 그런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누가 따라붙거나 하지는 않았나?”

카르엔의 목을 치고 곧장 신전으로 왔다면 이번 일과 연관이 있음을 말해주는 꼴이 아닌가?

“따라붙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에드는 돌아오는 길에 죽은 이들에게서 화살과 비도까지 모두 회수해왔다. 괜히 현철로 만든 화살에 죽은 것이 알려지면 자신을 특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미행을 주의하지 않았을까?

에드의 감각에 걸리는 이들은 없었다. 에드의 감각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차피 숨기고자 해도 숨길 수 없음을 잘 알았다.

베네딕토가 찻잔을 밀어주었다.

에드는 찻잔을 받아서 후 불어서 식힌 후에 한 모금을 마셨다. 은은한 달콤함이 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베네딕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린이 걱정 많이 했네.”

“할아버지!”

어찌나 놀랐는지 대주교라고 부르지도 않고 사적 호칭까지 튀어나오는 모습에 에드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걱정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건 그들을 찾는 일이었죠.”

“알아요. 아는데···.”

아린도 에드가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도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싶은 강자.

하지만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눈먼 칼에 죽을 수 있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혹시라도 에드가 그런 일을 당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그런데 에드는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살짝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에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베네딕토를 돌아보았다.

“그 안가에 있던 자들은 마젤타 왕국의 특첩부대 켈베로스의 요원들이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에드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스트론의 눈을 피할 정도라면 보통 인물들은 아닐 거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됨으로써 많은 의문이 풀리게 된다.

베네딕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갚을 줄은 몰랐네.”

정보 단체에게 정보는 돈보다 귀히 쓰인다. 이 정도 하나를 가지고 저들이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할 터.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

“그래도 우리는 아직 친구인가?”

“그럼요.”

에드는 빚은 갚아도 이 인연은 쉬이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에드의 대답을 들은 베네딕토가 미소를 지은 채 찻잔을 집어 들며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이제 이 늙은이는 눈을 붙여야겠네. 날 밝을 때 언제든 찾아오게.”

축객령에 에드는 남은 차를 호록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시고 갑니다.”

에드와 아린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베네딕토는 책상으로 돌아가 펜을 들었다.

카르엔이 마젤타 왕국의 특첩부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 바. 그 부분에 대한 보고를 본단에 올려야 했다.

에드는 펜드래건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린이 말머리를 함께 하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말수가 없는 것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딘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야 아린도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언에 따라 퇴마행을 나선 성기사.

주어진 책무에 최선을 다하던 그녀는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을 따라 다니면서 더 그런 것 같기는 했는데 그게 어딘가 경직되어 보였었다.

그런데 이런 불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예전에 술을 마시다가 해롱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보이는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아린. 혹시 기다리면서 저주술사에 대해서 베네딕토 님에게 물어보셨습니까?”

“예?”

아린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에드가 던진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걱정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묻지 못했다.

“···미안해요. 지금 다시 돌아가서 물어볼까요?”

“날 밝은 다음에 보자고 했으니 날이 밝은 후에 가죠. 또 찾아갔다가는 저 욕 먹을 것 같네요. 예의를 아는 아린님을 또 홀렸다고.”

에드의 농담에 아린은 비식 미소를 흘렸다. 불퉁했던 그녀의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아 에드가 그녀의 옆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걸으며 말했다.

“날 밝은 다음에 같이 가죠.”

“좋아요.”

아린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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