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부탁
왕도의 중앙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객실 창가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짧은 금발에 훤칠한 키의 미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서 있었다.
“어쩐 일로 저를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저희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네.”
카르엔의 안색을 살피던 미남자가 자리를 권했다.
“서서 이야기하실 것 아니라면 앉으시죠.”
카르엔이 자리에 앉자 그의 뒤로 반데스가 섰다. 반데스는 처음 와보는 곳이었고, 상대도 처음 보는 자였다.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도 모르는 상대라는 것에 솔직히 섭섭한 마음이 깃든 반데스였지만, 자기 일에 충실했다.
“밀러. 도움이 필요하네.”
밀러라 불린 미남자는 미소를 지은 채 카르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르엔은 그 눈빛에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내가 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왕도에 소문이 파다한데 당연히 들었죠.”
“그럼 그자가 누구인지도 혹시 파악했나?”
밀러는 카르엔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말했다.
“예상가는 자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왜 찾으시는 겁니까?”
“왜 찾을 것 같나? 잡아서 갚아줘야 할 것 아닌가?”
밀러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했다.
“지금 그럴 시간이 없으실 텐데요?”
카르엔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왕궁에서 병력이 움직였습니다. 카르엔 대신의 저택으로 향했다고 하더군요.”
“뭐?”
“이렇게 나오신 걸 보면 아직 운이 다하진 않으셨나 봅니다.”
카르엔은 어이가 없었다. 왕궁에서 자신을 치려고 병력을 움직였다? 아무리 태자가 죽었다지만, 자신은 태자파의 수장이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스페르토의 지하 연구실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 남은 자들을 모두 처리했다. 자신의 정적이거나 죽여야 할 자들을 그의 연구에 쓰라고 내줬다.
훨씬 많은 자를 내줬었기에 사라진 자가 누구인지도 파악이 되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그저 남은 증거만 치우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문제가 발목을 잡는 건가?
왕이 무리해서까지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태자의 애도 기간에.
그러나 생각은 길지 않았다.
카르엔은 밀러에게 빠르게 말했다.
“도와주게.”
밀러는 그 말에 가만히 와인 잔을 들어 흔들었다. 자수정을 닮은 색의 와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밀러가 카르엔을 돌아보았다.
태자파의 수장으로 그를 포섭하기 위해 들어간 돈과 시간, 정보는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들이 만들어 끌어올린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르엔은 서로 돕는 관계였다고 생각할 테지만.
펜드래건을 잘 견제하고 있었고, 태자를 왕위 직전까지 끌고 갔기에 성공적인 투자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펜드래건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루 만에 끈 떨어진 연이 된 자다.
태자는 죽었고, 카르엔을 잡기 위해 왕궁의 병력이 움직였다.
카르엔에게 더 투자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야 했다. 그것이 마젤타 왕국의 특첩부대 켈베로스의 3대장 중 하나인 밀러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트라비아 왕국 관련 특첩부대의 대장으로서 카르엔의 탈출에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에 오면서 몸만 달랑 온 그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왕궁 내의 비밀이나 남부 귀족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놓은 그는 아직 살려둘 가치가 있었다.
“좋습니다. 대신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저희 명령을 따라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내 수호 기사도 함께 빠져나갔으면 하는데.”
“반데스 경 정도의 실력자라면 저희가 감사할 따름이죠.”
밀러가 손가락을 튕기자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호텔의 종업원처럼 입고 있던 그들은 카르엔과 반데스에게 후드가 달린 검은색 망토를 건넸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여행자용 망토였다.
“우선 그거로 갈아입으시죠.”
밀러는 카르엔과 반데스가 망토를 갈아입는 사이에 와인을 쭉 비우고는 말했다.
“뒤에 있는 저희 쪽 요원들이 안내해 줄 겁니다. 지금은 왕도의 문이 모두 닫혀 있으니 내일 문이 열릴 때까지 안가에 계십시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왕도를 빠져나가게 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카르엔과 반데스가 물러나자 밀러의 뒤편으로 여인 한 명이 조용히 나타났다.
“밀러님. 안가는 물론이고, 요원들의 목숨도 위험해 질 겁니다.”
“알아.”
밀러는 와인을 잔에 다시 따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래. 게다가 16년이나 공을 들인 인물인데 그냥 죽게 두면 아깝지.”
“주제넘었습니다.”
밀러는 그 말에 와인잔을 들어서 흔들어 보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음에도 언제든 말해. 내가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밀러는 와인을 쭉 비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태자의 죽음으로 인해 어수선하니 운이 따른다면 빠져나갈 수 있겠지.”
카르엔 대신의 방. 전에는 이곳 침대 앞에서 의자에 앉아 간단히 조사했지만, 지금은 병사들이 온갖 곳을 수색하면서 들러 엎은 소란의 한복판이었다.
에밀리아는 창가로 걸어가서 대저택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왕궁에서 나온 병사들이 대저택에 있던 사병들을 모두 제압해 묶어 놓은 후였다.
별채부터 시작해서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카르엔은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장을 데리고 왔습니다.”
에밀리아가 몸을 돌리니 카르엔 대신의 집사장이 끌려왔다. 그를 무릎 꿇리고 반이 그의 뒤에 서자 에밀리아가 침대 옆에 놓았던 의자를 다시 가져와 놓고는 그곳에 앉으며 물었다.
“카르엔이 보이지 않는군.”
밀실에서 결정되고 나서 왕궁 친위대의 기사 열 명과 근위병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그런 기습이었음에도 카르엔이 자리에 없었다.
부상을 회복하지 못해서 왕궁에 나오지도 않던 그가 하필이면 딱 그 순간에 자리에 없었다.
“대신께서는 저녁을 드시고 반데스 경과 함께 말을 타고 급히 어디론가 나가셨습니다.”
왕궁에 카르엔의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번 기습이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만큼 빠르게 움직였으니까.
에밀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반. 왕도 수비대에 연락해서 모든 왕도의 문을 막고 검문검색을 하라 일러.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예.”
집사장을 끌고 나가는 반을 보던 에밀리아는 다시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카르엔은 왕도 내에서는 이제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를 놓치면 남부의 귀족들과 힘을 합치게 된다.
왕국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카르엔은 가뜩이나 태자파의 수장이었으니 그들을 이끄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에밀리아의 시선이 그녀의 뒤편에 선 여인을 향했다.
“찾아요.”
“요원들을 풀었습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레이든 국왕이 내어준 아칼란 팀장 베리의 대답에 에밀리아는 습관적으로 수첩을 꺼내서 그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곧 수첩을 접고는 밖으로 나왔다.
“반. 명령은 전달했어?”
“예.”
“따라와.”
대저택 앞에 메어놓은 말 위에 오른 에밀리아는 뒤를 따라 나온 베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찾도록 해요. 애도 기간이라 소란을 피울 수 없으니 은밀하게 잡아야 해요. 생포가 힘들면 목만 취해와도 좋아요”
“그리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이에요.”
에밀리아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곧장 말을 달렸다. 그런 에밀리아의 뒤를 따르던 반이 물었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말했잖아. 도움을 청하러 간다고.”
그러니까 이 밤에 대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냐고 묻고 싶었지만, 반은 일단 참았다. 이리 급하게 말을 몰고 가는 것을 보니 금세 알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다.
그렇게 말을 달리던 에밀리아가 말을 멈춘 것은 펜드래건의 대저택 앞이었다. 병사들이 에밀리아를 보고는 앞을 막았다.
“멈추십시오.”
에밀리아는 말을 멈추고는 품에서 황금패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며 말했다.
“에밀리아 집행관이다.”
왕실에서 공무를 집행할 때 내주는 황금패를 확인한 병사가 물었다.
“집행관께서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볼 일이 있어서 왔다. 부마와 공주께서는 돌아오셨는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왕궁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보다.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곳에 손님으로 있는 자에게 볼일이 있다. 들어가도 되겠나?”
오늘 낮에 이미 왔다가 간 전적이 있는 데다가 왕실에서 만든 황금패를 보였으니 말릴 수 없었다. 꼭 막고자 한다면 펜드래건의 이름이 있으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손님을 찾아왔는데 얼굴을 붉혀서 좋을 것은 없었다.
문이 열리자 에밀리아가 반과 함께 말을 달렸다. 쭈욱 뻗은 대로를 따라 달리던 에밀리아는 본채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그렇게 달리던 에밀리아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스치듯 지나갔지만,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커다란 눈의 올빼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도에서 올빼미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나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에밀리아는 고개를 내젓고는 곧장 펜드래건의 본채로 향했다.
올빼미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음을 모르고.
저택에 도착한 에밀리아가 말에서 내릴 때 집사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에밀리아님. 늦은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에밀리아는 집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에드를 만나고 싶다. 어디에 있지?”
“안에 계시기는 합니다만 어쩐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집사는 뒤돌아 그녀를 안내했다. 집사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에밀리아는 지금 자신이 한 결정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응접실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준비를 마친 이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의 무기를 모두 챙긴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들은 집사의 안내로 나타난 에밀리아를 보고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에밀리아 조사관?”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왜 그를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이 사람의 눈빛 때문이다.
뭐든지 해낼 것만 같은 눈빛. 어떤 일이라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지금은 집행관입니다.”
“집행관이요?”
악마의 시대 1을 오랫동안 즐겼지만, 왕실에서 받는 직위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언급된 직위만 알다 보니 집행관이 뭐하는 직업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에드의 눈빛에 의아함이 어리는 것을 보고 에밀리아는 그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것에 작은 쾌감을 느꼈다.
“국왕 전하께서 가도 공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카르엔 대신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걸 집행하는 임시 직위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에드는 솔직히 에밀리아의 방문에 당황한 상태였다.
일행과 악마의 힘을 가진 저주술사에 대해 대비하는 중이었다. 디에고가 정신을 차리고 쥐의 사령이 역소환 당하기 전에 위치를 파악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나서.
펜드래건의 집으로 누군가 쳐들어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비술사라는 자들이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자들이라 오늘은 이곳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날이 밝는 대로 대신전을 찾아가 그들의 도움으로 저주술사를 찾을 생각이었다. 악마의 힘을 다루는 자를 찾는 데는 신전의 도움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 여겼으니까.
그래서 무장을 한 채 대기 중이었는데 에밀리아가 찾아왔다.
“고마워요. 그보다 제가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예요.”
오늘 낮에 체포하러 왔다가 조사만 하고 간 에밀리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세실리아랑 언니 동생하는 사이만 아니면 듣지도 않고 거절했을 텐데.
“부탁할 일이 무슨 일입니까?”
에밀리아는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카르엔 대신의 체포 또는 사살을 도와주세요.”
이건 생각도 못 했던 부탁이다. 그녀가 지금 그 일을 집행한다고 들었는데 그 일에 왜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명령을 받고 곧장 급습했는데 그의 운이 다하지 않았는지 오늘 저녁 출타했다더군요. 왕도의 문을 막고 그를 추적하라고 명했지만, 그를 놓칠경우 남부 귀족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라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에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넓은 왕도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일을 자신이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아칼란이 도울 텐데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겁니까?”
아칼란의 눈과 귀라면 왕도 내에서 그의 행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냥 느낌이에요. 카르엔을 놓치지 않으려면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어요.”
신기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게 그녀는 일단 왕족이다. 왕위 계승 서열이 꽤 밀린다고 하지만, 세실리아는 분명히 왕위를 잇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카르엔 대신을 체포 또는 사살하는 공을 세운다면 에밀리아는 왕위에 성큼 다가간다.
그런 에밀리아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죽여도 된다면 돕겠습니다.”
에밀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웃는 건 처음 봤다.
“고마워요.”
에드는 이상하게 등 뒤에서 아린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