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저주술사
에드가 메르헨과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아린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에고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엉덩이를 반쯤 들었을 때 에드가 그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집에 있어. 어디 가는 줄 알고 엉덩이를 떼는 거냐?”
“아, 그게···.”
에드는 디에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메르헨과 아린이 뒤를 따라 나왔을 때 테인이 잠깐 에드를 따로 불렀다.
“왜 그러세요?”
테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어떤 말이요?”
“카르엔 대신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일세. 태자파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왕국의 실세 중 하나야. 2왕자가 죽으면서 2왕자파가 힘을 잃은 지금 왕국의 실세 중의 실세지. 그리고 부마이자 왕국 제일검이라고 불리는 펜드래건을 견제하고 있는 자일세.”
“그래서요?”
“자네가 실수한다면 그자가 명분을 쥐게 되네.”
“그걸로 펜드래건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아마 자네가 이곳에 온 것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네.”
“그러니까 이미 이곳을 염탐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사실 악마를 잡고 살 때는 다른 것 볼 것 없이 악마만 죽이면 됐는데 이놈의 정치판에 엮이니까 보통 일이 아니더군. 펜드래건은 가능한 신경 안 쓰려고 하는데 그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끌어내리려고 온갖 협잡질을 하니까 말일세.”
에드는 테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러니까 카르엔 대신에게 걸리지 말라는 말이군요.”
“미안하네. 어지간한 귀족이라면 펜드래건의 이름으로 해결을 볼 수 있지만, 그자만큼은 안 되네.”
에드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지만, 훨씬 더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판인가 보다.
에드는 아린과 메르헨을 찾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기에 에드가 메르헨을 돌아보았다.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어?”
“난 목숨을 걸 수 있어.”
그렇게 쉽게 걸 목숨이 아닐 텐데.
“그 정도 각오면 됐어. 일단은 내가 먼저 가서 정보를 모아올게. 카르엔이라는 인간이 트라비아 왕국 내의 거물이라고 하니 증거도 없이 들이닥치면 안 될 놈 같아.”
메르헨이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혼자 간다고?”
“그래.”
“내 일인데?”
에드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메르헨은 다른 이에게 호의를 받아본 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이번 도움에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번에는 내가 도울 테니 나중에는 네가 날 도와라.”
메르헨은 그 말에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기에 에드는 미소를 지은 채 아린을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아린은 정보를 모아오는 일이라면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면 뭐든 말해요. 베네딕토 대주교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은밀히 처리해야 하는 일에 베네딕토 대주교가 끼게 되면 이제 왕국과 교단의 싸움이 된다. 그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소란이 일어날 판이다.
“필요하면 말할게요.”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르헨을 돌아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죠.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눴는데.”
아린도 헬레나의 딸이라는 메르헨에 대한 관심이 컸다. 둘을 안으로 들여보낸 에드는 테인을 만나 카르엔 대신의 저택 위치를 파악한 후에 장비들을 맡기고 조용히 집을 떠났다.
그림자 망토 덕분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저택을 나온 에드는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빙결의 활과 빙결의 화살집, 무한의 화살집도 두고 나왔다.
간단한 장비만 착용한 에드는 기척도 없이 거리를 달려나갔다. 사실 에드는 말을 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체력도 어지간한 말의 체력에 버금갈 정도.
단지 그거 할 시간에 다른 수련을 하고 장비를 수리하는 것이 이득이기에 마차와 말을 탈 뿐이었다.
그런 에드가 그림자 망토를 얻은 덕분에 기척조차 사라진 채 말보다 빨리 달리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니 그를 발견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에드는 그렇게 카르엔의 대저택에 도착했다. 카르엔의 가문 문장이 떡하니 대문에 박힌 곳이었다. 방패 위로 가시나무가 타고 오르는 문양.
에드는 문양을 확인하고는 대저택 주위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다른 곳에 비해서 경계가 삼엄하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죄를 짓고 사는 놈이 많다. 이 삼엄한 경비를 보니 보통 죄를 지은 놈이 아닌가 보다.
에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눴기에 하늘에는 달과 별들만 떠 있었다. 몇 조각의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던 에드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구름 하나가 달빛을 가리는 순간 경비들의 사각을 달려서 그대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벽을 타 넘었다. 벽의 높이가 5미터에 달했지만, 벽을 한 번 밟고 그 끝에 손가락을 건 순간 부드럽게 넘어가 소리도 없이 바닥에 내려섰다.
에드는 벽의 그림자에 숨어 대저택을 살펴보았다. 펜드래건의 대저택도 놀라울 정도로 컸는데 이 저택도 만만치 않았다. 축구장보다 넓은 정원에는 조경을 잘해놓았다.
게다가 정원 곳곳에 램프를 켜놓았다.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곳에 램프를 켜 놓는 것은 경계를 위함인지 아니면 허영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에드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주위의 기척을 느끼기 시작했다. 레벨이 오를수록 감각이 예민해진 덕분인지 경비병들이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 것부터 그들의 발자국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에드는 그림자에 숨은 채 대저택을 보면서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카일과 리프를 찾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에드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카일과 리프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은 카르엔 대신이 동생의 소식이나 그 당시의 일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찾아왔나 보다.
겁도 없는 인간들.
카르엔 대신이 남부 귀족 연합을 와해시킨 장본인이라면 그런 그가 과연 잔당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일을 살려뒀을까?
사흘간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보면 여기 어딘가 잡혀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이 잡혀간 곳을 알만한 이가 누가 있을까?
가장 쉬운 답은 카르엔 대신이지만 위험 부담이 제법 크다.
에드는 망토에 달린 후드를 눌러쓰고, 별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쉽게 가는 길이 있지만, 그 길을 갈 수 없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수색.
별채부터 하나씩 뒤져볼 생각으로 별채 쪽으로 다가간 에드는 창문이 열린 곳을 확인했다. 별채 뒤편 부엌으로 이어지는 곳의 창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는 기척을 살피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는 별채 안으로 들어가서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림자처럼 이동하던 에드는 이상함을 느꼈다. 꽤 늦은 시간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인기척이 없을 수가 있나?
마치 사람 하나 없는 것 같은 기이한 적막이 흐르는 곳.
테인이 사는 별채에 비해서 크기가 부족함이 없는 곳에 사람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하인과 하녀가 있다면 에드의 기감을 벗어날 수 없다.
이만한 저택의 하인과 하녀라면 밤에도 깨어있는 이들이 있을 법도 한데 느껴지지 않았다.
이 큰 별채에 사람이 없다?
에드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별채의 방을 뒤진 결과 진짜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에드는 이 기이한 별채의 지하로 내려가는 곳을 찾았다.
집의 구조 자체는 테인의 별채와 비슷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에드는 계단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굳혔다.
이거 딱 봐도 위험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카르엔은 트라비아 왕국의 대신이다. 대신의 별채에 거하는 자는 어떤 자일까?
펜드래건이 테인에게 별채를 내주었듯 이곳을 누군가에게 내주었다면 이곳에 있는 자 또한 평범한 자 일리가 없다. 에드는 그걸 깨닫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본채에 누군가를 가두기보다는 이렇게 지하가 잘 되어 있는 곳에 가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에드는 품에서 현철 비도 한 자루를 꺼내 왼손에 든 채로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계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 봐라?”
누군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는 것을 막으려면 방비를 해놨을 텐데 이곳은 그런 것이 없다. 그것은 주인의 자신감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에드는 조용히 문으로 다가가 열어 보았다.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해서 문을 연 에드는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안쪽에서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아아아악! 살려줘!”
“아는 것은 다 말했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끄아아악!”
에드는 자신이 연 문을 바라보았다. 이 문이 이 정도로 방음 효과가 좋았나?
에드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에드는 그곳에서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의 돌계단. 그 아래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에드는 긴장한 채 돌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에 내려가니 좌우로 길게 늘어선 쇠창살로 막아 놓은 감옥들이 있었다. 에드는 그곳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들의 행색을 보니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피부가 흘러내리는가 하면, 어떤 이는 구속이 되어 있는 몸을 벽에 다 비벼서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를 입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따로 고문 도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쇠사슬에 묶어만 놓았을 뿐이다.
그들은 에드의 등장에도 그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며 자신의 몸을 학대할 뿐이었다. 약에 취한 이들인가?
에드는 끔찍한 감옥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카일이 잡혀 온 지는 고작 사흘. 만약 이곳에 있다면 저 정도로 끔찍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던 중에 에드는 거의 끝에 도달해서야 사슬에 묶여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어금니를 깨물고 있는 사내는 땀을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드는 그 감옥 앞에 서서 물었다.
“카일?”
에드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끔찍한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에드를 향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뭔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또 뭐냐? 이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이스페르토.”
에드는 그가 카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르헨이 보내서 왔다.”
“메르헨? 그게 누구지?”
힘겨워 죽으려고 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카일을 보던 에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에트리안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마력이 주입된 에트리안의 검이 단번에 쇠창살을 갈랐고, 에드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에드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환각이 보이나?”
카일은 그 말에 낮게 웃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새로운 저주라도 내려보려고?”
에드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카일이 지금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에드는 고민하지 않고 아론에게 받은 목걸이를 풀어 카일에게 걸어주었다.
카일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푸른 빛을 뿜어내자 걸려있던 저주가 풀렸는지 카일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커헉!”
하지만 걸렸던 저주가 풀리면서 생긴 반동 때문인지 카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에드는 그런 카일의 목에서 목걸이를 다시 빼서 목에 걸며 말했다.
“카일. 메르헨이 보내서 찾으러 왔다.”
카일은 고개를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저주로 인해 환각 속에 있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카일은 이것도 환각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에드는 그런 카일의 뺨을 후려쳤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저주를 당한 시간이 짧았던 것인지 몸에는 크게 이상이 없어 보였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카일이 고개가 홱 돌아갔다가 돌아왔을 때 에드가 물었다.
“정신 차려. 리프라는 난쟁이 도둑과 함께라고 들었는데 왜 혼자 있는 거지?”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충격에 카일은 입안이 터져 핏물을 뱉어내고는 에드를 돌아보았다. 정신을 차렸는지 그의 에메랄드 눈빛이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메르헨은? 괜찮나?”
“굶어 죽을 뻔했지.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은 동료 덕분에.”
카일은 그 말에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그녀가 왔다면 이곳은 불바다가 되었을 테고, 우리는 수배자가 됐겠지.”
“넌 이미 수배자 아닌가?”
카일은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메르헨의 걱정이 커. 정신 차려라. 리프도 구해서 나가자.”
카일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거렸다. 에드가 그런 그의 팔을 잡아주고 감옥을 나왔을 때 계단을 내려오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에 초췌한 안색의 사내는 에드가 카일을 부축해 오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일당이 있을 줄 알았지.”
카일은 그를 보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주술사다! 눈을 마주치면 안 돼.”
카일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난 저주술사는 이마에 비도가 박힌 채 쓰러지고 있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