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연
헬레나는 화염계 신비술사였다. 메르헨도 그녀의 딸이라면 아마도 화염계 신비술사일 터.
화염계 신비술사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고, 헬레나의 특기는 고속 캐스팅이었다. 마지막에는 거의 용언 마법처럼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도 대악마를 잡을 때 개고생하지만.
그런 그녀의 딸이라고 하니 메르헨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에드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테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헬레나가 왜 사라진 지도 알려주지 않았나?”
“예. 아무런 말씀도, 편지도 없었어요.”
“그녀만 한 이가 그냥 사라질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헬레나다. 악마의 시대 1에서 대악마를 잡았던 만큼 그녀는 신비술사의 정점에 서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물론 그녀 혼자서 대악마를 잡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명실상부 신비술사의 정점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니 에드도 궁금할 지경이다.
“그래서 엄마를 찾아 나왔어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와중에 카일과 리프도 만났고요.”
그 말을 들으니 살짝 걱정되기는 했다. 이 신비술사는 어려서부터 최정상의 신비술사에게 신비술을 배우면서 자랐다. 한 달씩 연구했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일상적인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뭔가 어수룩해 보이는 메르헨이었다. 먹자골목에서 군침을 흘리던 거지 소녀꼴을 하고 있던 것을 보면 그녀는 분명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일행은 과연 그녀를 위한 일행이었을까?
헬레나의 딸인 그녀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기량에 그녀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평범한 신비술사였다면 이런 욕심까지는 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헬레나의 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욕심이 고개를 쳐드는 자신만 봐도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
그래도 일단은 그들을 찾아봐야겠다. 그들이 왜 메르헨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를.
“그래. 카일과 리프를 잃어버렸다고 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카일은 만나야 할 이가 있다고 했어요. 리프는 그를 따라갔고, 마침 저는 왕도에 온 김에 구할 물건이 있어서 그걸 사러 갔다가 돈주머니를 잃어버렸어요.”
그 와중에 소매치기까지 당했던 건가?
어떤 간 큰 놈인지 몰라도 메르헨이 누군지 알았다면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감히 신비술사를 소매치기하다니.
“그래서 물건도 못 사고 카일과 리프를 찾아보았지만, 그들은 찾을 수 없었어요. 에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쓰레기를 뒤적거렸을지도 몰라요.”
테인이 그런 메르헨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메르헨은 싱긋 웃으며 사탕을 녹여 먹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에드를 만났고, 덕분에 이렇게 테인님도 만났으니까요.”
에드는 그 말을 듣고 픽 웃음을 흘렸다.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데 상당히 긍정적이다.
테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카일과 리프라는 친구가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는 얘기했나?”
메르헨은 뭔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답했다.
“카일은 지금까지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 중이었어요. 동생이 노예로 팔려갔다고, 그 뒤를 쫓는 중이라고 했어요. 악마를 상대하는 일도 아니고, 정보만 구하는 일이라 내가 같이 갈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메르헨은 사탕을 하나 더 까서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우움. 왕도에서는 저도 구해야 할 물건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서로 볼 일만 보고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못 만났지만.”
“다른 단서는 없나? 카일이라는 친구가 누구에게 정보를 구하러 가는지 말했다거나.”
메르헨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카일은 그런 세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아요.”
에드는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메르헨은 왜 카일과 함께 하는 거야?”
자신의 작은 욕망을 숨긴 채 묻는 물음에 메르헨은 픽 웃음을 흘렸다.
“처음 집을 나와서 어머니의 흔적을 뒤쫓던 중에 악마 하나를 잡다가 크게 다쳤어. 경험이 부족해서 죽은 줄 알고 있다가 반격에 당했거든. 그때 카일과 리프가 나를 도와줬어. 그래서 같이하게 됐지.”
카일과 리프에게 구함을 받은 건가?
그들과 함께 하는 이유를 알았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함께 하는 일행이라면 자신이 끼어들 수는 없었다. 자신도 메르헨에게 작은 도움을 줬다지만, 그건 훗날을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테인은 거기까지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지. 카일은 혹시 귀족인가?”
“몰락 귀족이라 그 이름도 거의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성이 뭔가?”
“데스토. 카일 폰 데스토가 풀 네임이라고 했어요.”
테인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데스토 공의 아들이었나?”
에드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데스토 공이 누군데요?”
테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답했다.
“3년 전인가? 남부 귀족 연합의 수장이었는데 당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규합했지. 그리고 그들은 남쪽의 마젤타 왕국과 내통했지. 그게 밝혀지고 당시 일에 연관된 귀족들은 모두 죽었고, 그 가족은 노예가 되었지.”
“그런데 카일은 어떻게 노예가 안 된 겁니까?”
“자세한 것은 모르지. 하지만 당시에 그 자리에 없어서 화를 피했나 본데 살아남았으면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것이지 뭐하러 왕도까지 왔지?”
메르헨은 입에 남아있던 사탕을 꿀꺽 삼키고 다음 사탕을 집어 들며 답했다.
“동생을 판 노예 상인을 만나서 얻은 정보대로라면 왕도에 있는 귀족의 대리인이 사 갔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단 왕도까지 찾아온 거예요.”
메르헨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카일은 동생 일에는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자기 목숨 거는 거야 상관없다. 다만 다른 이들까지 위험하게 해서야 되겠나?
테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건 내가 사람을 풀어서 알아보겠네. 왕도 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오늘 안에 결과를 알 수 있을 걸세.”
메르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테인은 손녀를 보는 것처럼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보다 안경을 새로 맞춰야겠네. 왕도에 잘 아는 안경점이 있으니 그쪽에다 요청해서 새로 맞춰주지.”
메르헨이 깨진 안경을 벗어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안경 렌즈만 교체할 수 있을까요? 이거 어머니가 준 거라서.”
“귀중한 물건이었군. 당연히 되지. 걱정하지 말게나.”
테인이 에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 디에고는 어떻게 할 건가?”
“사람 하나 보내주세요. 오늘은 엄마와 좋은 추억 보내라고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왔다고.”
원래 디에고와 소피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게 할 생각이었는데 진짜로 일이 생겨버렸으니 할 말도 있었다. 테인이 집사장을 돌아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을 전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리라.
“그럼 자네도 시간이 있으니 연구소에 함께 가세.”
테인은 안경을 집사장에게 맡기고는 그들을 데리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서 나는 것은 보기와 다르게 짙은 책 냄새였다.
좌우로 늘어선 유리병에는 용액에 담긴 눈알부터 손톱, 내장 등 온갖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악마의 부산물 같았다.
그 모습을 돌아보면서 메르헨은 신기하다는 듯 보라색 빛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았네요. 악마에 관한 연구만큼은 테인님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하셨거든요.”
“허허허. 그 다혈질 신비술사가 딸을 낳은 것도 신기한데 내 칭찬까지 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메르헨은 눈알이 담긴 병을 가볍게 두드리며 답했다.
“이거 말라이의 눈인가요?”
눈알이 여덟 개로 나뉘어 있는 기이한 눈알이었는데 보는 순간 바로 알아봤나 보다. 에드는 굳이 저런 것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더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안쪽에 걸려있는 물건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건 대체 뭘 만드는 겁니까?”
중세 연금술사들이나 썼을 법한 유리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그 위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이 매달려 있고, 다른 쪽에는 척 보기에도 끔찍해 보이는 걸쭉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뭔가 뒤섞이고 있는 것을 보고 에드가 돌아보자 메르헨이 그걸 보면서 감탄했다.
“안달레이의 심장에 메스토의 날개를 끓인 액체, 그리고 뭘 더 섞는 거죠?”
“그걸 한 번에 알아보다니 헬레나는 신비술만 연구하던 것이 아니었군.”
테인은 앞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떤 악마도 죽일 수 있는 극독을 개발하는 중이네. 이게 완성된다면 악마는 더는 설 자리가 없게 될 걸세.”
에드는 그 말에 테인을 돌아보았다. 대악마를 죽이는 데 일조한 인간이 지금 모든 악마를 죽일 수 있는 극독을 개발하는 중이다?
테인의 악마에 대한 증오는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악마는 이 인간을 적으로 둔 것에 대해서 평생 후회하게 되리라.
메르헨도 감탄하면서 테인과 그 성분을 주제로 토론하는 걸 보고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신비술사 중에도 악마에 저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면 헬레나의 영향이 큰 것이리라.
자신들이 얻은 신비를 마스터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는 이들 중에서 악마를 잡는 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게임의 마법사들처럼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거의 일인전승 수준으로 밖에 전해지지 않는 데다가 비인부전이라 전수해줄 만한 이들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냥 자신들이 연구하던 신비를 품고 죽어버리는 것이 신비술사들이니까.
악마를 잡는 신비술사.
테인과 죽이 맞아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탐이 난다.
저녁이 되자 대신전을 갔던 아린이 돌아왔고, 인형극부터 시작해서 왕도 구경을 한창 즐기고 온 디에고와 소피아도 돌아왔다.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테인은 메르헨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3영웅 중 하나인 헬레나의 딸 메르헨이라고 하네. 에드가 왕도에서 만나 데리고 왔네.”
디에고가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사실 후안이 디에고에게 3영웅에 얘기를 해주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디에고는 그들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누나. 난 디에고라고 해요.”
“반가워.”
메르헨은 디에고를 가만히 살피더니 그의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너, 사령술사구나?”
“예?”
디에고가 무슨 소린가 싶어서 바라보자 메르헨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사령술은 사실 신비의 일종이야. 다만 그 힘을 제대로 다루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해. 사령술사들이 사라진 이유는 사령에게 먹힌 경우가 많아. 조심해. 강한 힘을 다루려면 강한 정신이 필요하니까. 신비술의 기초이자 가장 핵심이야.”
디에고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에드를 돌아보았다. 에드는 메르헨이 그걸 알아봤다는 것에 더 놀랐다.
“형.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사령술사라는 말이지.”
“진짜요?”
디에고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테인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보다 카일과 리프의 마지막 행적지를 찾아냈네.”
“거기가 어디예요?”
메르헨이 돌아보자 테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답했다.
“카르엔 대신의 저택으로 갔다고 하더군.”
테인이 주의하면서 말을 이었다.
“데스토 공 사건을 밝혀낸 대신이야.”
에드와 메르헨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무래도 카일과 리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메르헨이 뭔가를 주저할 때 에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해? 친구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러 가야지.”
메르헨은 그 말에 뭔가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