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새로운 인연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아 도움에 대해서 듣기 전에 일단은 먹이기로 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 가까운 식당에 가서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리소토를 시켜줬다.
왕도의 먹자골목이다 보니 다들 기본 이상의 맛은 보장하는 것 같았다. 에드는 아침을 먹고 나와서 간단히 차를 한 잔 시켜서 마시면서 메르헨이 밥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그마한 입에 한입 가득 넣고 입도 열지 않고 오물오물 먹으면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에드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신비술사. 가지고 있는 장비를 보면 초짜는 아닌 것 같은데 왕도에서 배를 곯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질문하고 싶어도 볼을 오물거리며 먹고 있어서 물을 수 없었다. 주변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먹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그래서 에드는 말없이 기다렸다. 일단 배는 채우고, 마음 같아서는 씻기고도 싶었지만,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니 꼭꼭 씹어먹어서인지 엄청 배고파하면서도 거의 한 시간을 들여서 앞에 있는 음식들을 모두 먹고 오렌지 주스를 쭉 들이켜 마무리를 했다.
아린처럼 전투적으로 먹는 것은 아니나 오래 오물오물 먹는 모습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식사를 마친 메르헨이 나른한 미소를 짓더니 의자에서 축 처졌다.
신비술사를 만나본 것은 시르케와 적으로 만났던 실비아가 전부다. 둘 다 바람 속성을 다루는 풍계 신비술사였는데 이 소녀는 어떤 신비술을 다루는 술사일까 궁금했다.
“이제 배가 조금 찼으면 이야기를 나눠볼까? 뭘 도와주면 돼?”
메르헨은 그제야 에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내젓고 입을 열었다.
“일행을 잃어버렸어. 찾는 걸 도와줘.”
신비술사 하나 길가다가 주웠나 싶었더니 일행이 있었나?
하긴 신비술사가 뭔가 어리숙하다 싶더라니 케어해주는 일행이 있나 보다.
에드는 그래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중앙 광장의 펜드래건 동상 아래에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다.
“언제?”
“사흘 전에.”
“그런데 못 만났어?”
“응.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아. 약속을 어길 인간은 아니니까.”
약속을 어기지 않을 이가 나오지 않았다. 이거 애만 두고 내뺀 건가? 아니면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문제는 에드도 왕도는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일행이 몇 명인데?”
“둘. 카일과 리프.”
“특이사항이 있어?”
“카일은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을 가지고 있어. 인간이야. 그리고 리프는 갈색 짧은 머리 난쟁이고. 여자야.”
인간과 난쟁이라 조합 자체는 확실히 눈에 띌 것 같았지만, 그들이 사흘 동안 이 신비술사를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뭘까?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에드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찾는 건 찾는 거고, 그 전에 좀 씻는 게 어때? 안 가렵냐?”
메르헨은 그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 정도야 연구하다 보면 한 달 동안 못 씻는 일도 있는데 뭘.”
이 더러운 소녀를 어찌하면 좋을까?
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에드는 메르헨을 데리고 나가는 길에 계산하면서 직원에게 길을 물었고, 그녀를 데리고 먹자골목을 떠나 호텔을 찾아갔다. 왕도에는 여관 수준이 아니라 5층짜리 호텔이 떡 하니 있었다.
에드는 그곳에 들어가 방을 하나 잡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후에 메르헨을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씻고 나와. 잠깐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에드가 그녀를 두고 잠시 나갔다 오려고 할 때 메르헨이 그의 망토 자락을 잡았다. 에드가 돌아보자 메르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깨진 안경알 너머로 불안한 눈빛을 보고 에드는 픽 웃음을 흘렸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씻고 나와. 대신 깨끗하게 안 씻고 나오면 그냥 간다.”
메르헨이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에드는 창가로 걸어갔다. 호텔은 중앙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왕도의 중앙 광장. 왕도 자체의 크기가 어마어마한데 그 중앙에 있는 광장이니 그 크기도 놀라울 정도로 컸다. .
에드의 시선은 중앙 광장 중앙에 세워진 두 개의 동상을 향했다.
하나는 초대 국왕의 동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트라비아 왕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대악마 리펠라스를 죽인 펜드래건의 동상이다.
그의 공은 왕국에서 기릴만하기는 했다. 그러니 부마까지 되었겠지.
생각해 보면 상급 악마만 해도 그리 강한데 대악마 정도 되면 얼마나 강할까? 그런 대악마를 죽인 펜드래건이니 공주를 줘서라도 붙들어야 했다.
그런 그를 기리기 위해서 중앙 광장에 동상까지 세워줬다.
전략 병기 수준의 인물에게 그 정도는 당연하리라.
에드가 그렇게 중앙 광장을 구경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머리에 수건을 올린 채 볼이 빨개진 메르헨이 밖으로 나왔다.
“깨끗하게 씻었어.”
“그럼 중앙 광장이 가까우니 한 번 갔다가 도움을 구할 곳으로 가보자.”
“좋아.”
에드는 메르헨과 함께 중앙 광장으로 가보았다. 호텔에서 멀지 않아 금세 도착할 수 있었는데 정말 가지각색의 인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른 곳은 모두 바삐 돌아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관광객이 많은 것 같았다.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여유가 있는 이들이 돌아다녔다.
그런 그들 사이를 지나가던 에드는 펜드래건의 동상 아래에 섰다. 높이만 족히 30미터는 되는 동상을 올려다보던 에드는 새삼 이 세계에서 펜드래건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에드는 잠시 그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인간 남자와 난쟁이 여자 조합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한 조합이라면 눈에 안 띌 리가 없었으니까.
“없네.”
“그러니까.”
“뭔가 너희들만의 표식 같은 것도 남겨 놓은 것이 없고?”
“없어.”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들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도움을 받아야겠다.
“따라와. 가볼 곳이 있어.”
다행이라면 중앙 광장에는 마차를 빌려주는 곳이 있어서 마차를 빌려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왕도는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돈이 많이 들지만, 돈만 있다면 여러 편의성이 제공되었다.
마차를 타고 펜드래건의 집으로 가달라는 말에 마부는 흔쾌히 마차를 몰았다. 아마도 펜드래건의 집을 멀리서라도 보려는 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차에 탄 메르헨은 달랐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혹시 펜드래건을 알아?”
“아니.”
메르헨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어렸지만, 에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마차가 펜드래건의 집 앞에 도착하자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에드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펜드래건의 집을 지키던 병사들이 에드의 얼굴을 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어?”
메르헨과 마부가 놀랄 때 에드가 입을 열었다.
“쭉 들어가시다가 교차로에서 우측으로 가주세요. 별채로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공손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메르헨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에드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펜드래건을 보고 싶은 거야?”
“궁금하기는 해. 자유 기사가 얼마나 강하기에 대악마를 사냥했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뭘 물을 건데?”
“그건 그를 만났을 때 물을 거야. 왜? 만나게 해줄 수 있어?”
에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나도 안 만나 봐서 몰라.”
“펜드래건을 만나보지도 않고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테인을 만나러 왔거든.”
“테인? 악마 연구가?”
“응.”
메르헨이 테인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고 에드는 그녀에게 뭔가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참았다. 마차는 금세 별채에 도착했고, 에드는 메르헨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에게 돈을 줘서 돌려보내는 사이에 집사장이 다가왔다.
“오늘 왕도를 구경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볼 일이 있어서요.”
원래라면 메르헨을 호텔에 두고 혼자 돌아와 정보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메르헨이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함께 데리고 오게 됐다.
“테인 님은 지금 연구실에 계십니다.”
“안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집사장을 따라 걸어가니 별채 지하로 향했다. 이 커다란 별채의 지하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대체 안에서 뭘 하길래 저만한 철문이 필요한가 싶었다.
집사장이 철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기관을 이용한 것인지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테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테인의 시선이 에드에게 향했다.
“응? 자네 일찍 돌아왔군.”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먼저 왔습니다.”
“그랬나? 그런데 뒤에는 누군가?”
에드는 그 말에 옆으로 물러났다. 메르헨은 앞으로 나서서 테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르헨 루실리아입니다.”
요것 봐라? 존대도 할 줄 아네?
테인은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실리아? 헬레나와 무슨 사이지?”
“저희 어머니세요.”
에드는 메르헨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 애가 뭐라고 하는 거지?
헬레나는 악마의 시대 1의 주인공이자 자신이 즐겨 플레이했던 신비술사다. 그녀의 딸이라고?
테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테인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말했다.
“머리카락과 눈을 보니 정말 헬레나를 닮았군. 그녀를 못 본 지도 15년이나 흘렀는데 이렇게 딸까지 낳았을 줄은 몰랐군. 허허허.”
테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메르헨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어머니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나? 헬레나가 요청한 정보는 넘겼지만, 그게 그리 큰 도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테인이 헬레나의 딸이라는 말에 기뻐하며 그녀를 응접실로 데리고 가면서 집사장에게 차를 내오라고 말했다. 테인은 메르헨에게 소파를 권하고는 물었다.
“그래. 왕도까지는 무슨 일로 온 건가?”
테인이 테이블에 있는 사탕이 든 유리 접시를 내밀자 메르헨은 그걸 얼른 까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답했다.
“1년 전쯤 어머니가 사라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찾으러 나와서 단서를 쫓다가 만난 일행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잃어버려서 곤란에 처했었어요.”
메르헨의 시선이 에드를 향했다.
“에드를 만나지 못했다면 큰일 났을 거예요.”
테인이 에드를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군. 그러고 보니 요즘 악마를 죽이고 다니는 신비술사에 대한 소문이 있던데 그게 자넨가?”
메르헨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길에 악마들이랑 엮였어요. 게다가 일행들을 돕다가 지금까지 한 열 마리 잡은 것 같아요.”
저번에 들었을 때는 일곱 마리라고 하더니 언제 또 세 마리를 더 잡은 걸까?
메르헨이 악마의 시대 2의 주인공으로 예상했던 이 중 하나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출신이 예사롭지 않았다. 악마의 시대 1 주인공인 헬레나의 딸이라니?
이거 진주인공인가?
새로운 인연이 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