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상실
아린의 기도로 후안의 몸이 푸른 성화에 휩싸였다. 상급 악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성화에도 한참 동안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 그의 몸을 태우던 푸른 성화는 하수도의 오수를 따라 흐르더니 하수도 전체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술법진을 넘어서 흘러나왔던 마기와 사령의 기운에 오염되었던 하수도 전체가 정화되고 있었다.
에드는 아린의 곁에 서서 푸른 성화에 휩싸인 후안을 바라보았다. 악마에게 천국으로 가라고 한다면 그건 죽은 자에게 하는 가장 심한 말일 수도 있었지만, 후안은 어째서인지 천국에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후안이 성화에 푸른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하나의 반지뿐이었다.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투박한 반지. 하지만 성화에도 끄떡없는 것을 보면 삿된 기운이 깃든 반지는 아닌 것 같았다.
후안이 사라지고 아린의 몸에서는 후광처럼 푸른 성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세 기대로 한참을 기도를 올리고 나서야 푸른 성광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에드가 얻은 경험치를 생각하면 아린도 굉장한 신성력을 얻었을 것 같았다.
에드는 스탯을 민첩에 투자하고는 반지를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검은색과 회색이 두 개의 뱀이 서로 똬리를 틀 듯 꼬여 있었다.
아린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기에 에드가 반지를 들어 보였다.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이죠?”
“예. 특별하지 않아요.”
에드는 그 말에 반지를 손에 꼭 쥐었다.
“그럼 이거 디에고에게 전해줘도 괜찮겠죠?”
아린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다만 이번에는 혈마석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네요.”
혈마석을 통해서 추적을 해왔는데 그 추적이 끊겼다. 후안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모든 마기와 사령의 기운이 집중된 혈마석을 공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린이 한숨을 내쉬기에 에드가 그녀를 달랬다.
“그래도 많은 정보를 얻었잖아요. 그자의 이름은 라그록스라는 것과 새로이 나타난 악마이면서 대악마에 버금가는 강함을 가졌다는 것도.”
“교단에 정보를 전해야겠어요.”
지금 당장은 추적을 위한 연결 고리가 끊어졌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이어질 것을 알았다. 교단의 힘이든 아니면 테인의 방식으로든 간에.
“일단 나가죠.”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하수도의 오수가 정화되어 더는 악취가 나지 않았다. 금세 더러워지겠지만,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는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며 걷는 느낌이었다.
아린과 함께 돌아온 ‘잠 못 드는 밤’에서 에드는 아린과 함께 소피아를 먼저 찾아갔다. 씻지도 않고 찾아온 에드와 아린을 보고 소피아의 눈에는 금세 습기가 차올라 또르륵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옆에 있던 디에고가 놀라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는 울음을 삼켰다.
“···그를 만났나요?”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아는 입술을 깨물고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린은 그녀의 시선에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직접 후안을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죽음과 관련이 있으니 쉽게 답하지 못했다. 후안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 그가 악마였다는 얘기를 해야 했고, 그럼 그 앞에서 성기사가 했을 일에 대해서 소피아가 짐작할 터였으니까.
에드는 그런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고 대신 말을 꺼냈다.
“그를 만났습니다.”
소피아의 시선이 에드에게로 향했다. 디에고도 뭔가를 느꼈는지 에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흐윽.”
소피아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런 소피아를 디에고가 안아주면서 에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가 도시를 구했다고요?”
디에고는 후안이 집을 떠났다고만 알고 있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에드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집을 떠났고, 어머니가 그때부터 병에 걸린 탓에 원망만 하고 있었다.
후안이 사라지고 빈민가의 사람들은 악착같이 그들 모자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런 후안이 도시를 구했다니?
에드는 그런 디에고에게 다가가 반지를 내밀었다.
“너를 부탁한다고 했다.”
에드의 손에 들린 반지를 보고 소피아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혼절한 그녀를 아린이 안아서 침대에 눕혔고, 디에고는 에드가 건넨 반지를 받아들었다.
“이건 아빠 반지인데···?”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희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다 믿지 못했던 디에고는 그제야 아빠의 죽음을 실감했다. 자신의 손 위에 올라온 차가운 반지가 전해주는 촉감에 디에고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디에고는 자신이 우는지도 모르는지 그저 반지가 잘 안 보인다고 여기고 오른손으로 자꾸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다시 반지를 움켜쥔 디에고가 고개를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후안이 사라지고 아빠의 자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에드. 형처럼 느껴지던 그의 얼굴을 본 디에고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무너진 표정으로 디에고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줄도 모른 채 눈물만 쏟는 모습을 보고 에드가 다가가 안아주었다.
에드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디에고가 입을 열었다.
“아빠, 아빠가···.”
에드는 그런 디에고의 등을 말없이 쓸어내렸다. 디에고는 그 손길에서 위로를 느꼈는지 겨우 입이 터졌다.
“나 아빠를 원망했는데, 매일 밤, 친구들이 나를 괴롭힐 때, 아픈 엄마가 밤에 잠도 못 자고 신음을 흘릴 때! 모두 아빠를 원망했는데!”
디에고의 외침이 더해질수록 그 작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악을 쓰듯 에드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디에고의 외침이 방을 울렸다.
에드는 말없이 그런 디에고의 등을 계속 쓸어내렸다. 그 울음 모두 토해내라는 듯 쓰다듬는 손길에 디에고가 에드의 등을 와락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으허엉. 아빠! 아빠!”
에드가 디에고를 꼭 끌어안은 채 그 오열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악을 쓰듯 오열하던 디에고가 진이 빠졌는지 그대로 쓰러졌다.
에드의 팔 힘으로 간신히 쓰러지지 않은 디에고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빠. 미안···해.”
에드는 디에고를 안아 올려 소파에 눕히고는 그 옆에 앉았다. 테인이 다가와서는 둘의 상태를 보더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에드는 디에고의 옆에 앉아서 울다 지쳐 쓰러져 버린 디에고의 머리를 넘겨주며 답했다.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테인은 그 말에 에드와 아린의 분위기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있겠네.”
테인이 밖으로 나가자 아린이 다가와서 디에고를 살폈다.
“그냥 지쳐서 잠든 것일 뿐이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디에고는 아린도 신성력으로 치유해줄 수 없는 몸이었다. 몸에 마기가 있어 강한 반발력이 생기니까.
에드는 아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교단에 보고해야 한다고 했으니 다녀오세요. 제가 여기 있을게요.”
“미안해요.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다녀와요.”
아린이 소피아를 한 번 더 살피고 밖으로 나가자 에드는 소파에 기대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밤이 다 지나가지도 않았다.
에드는 하늘에 걸린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의 시선이 소파에서 잠든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디에고를 향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끙끙거리는 디에고의 손을 잡아주고 그 머리를 쓸어 만져주자 디에고가 조금은 진정이 되는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아린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이곳에 도달했을 터였다. 테인이 함께 했을 테니 어떻게든 후안을 만났을 것이고, 그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면 디에고가 일행이 되었을 터였다. 아니면 늦어서 황폐화된 도시를 만났거나.
디에고는 죽었을 수도, 아니면 흑화되어서 적으로 만났을 지도 모를 분기점들이 있지 않았을까?
에드는 디에고의 손을 잡은 채로 소파 앞 바닥에 앉았다. 디에고는 그 손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꼭 쥐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렇게 손을 잡아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에드는 디에고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말없이 사라졌던 아빠가 돌아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디에고는 그런 아빠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이렇게 돌아올 거면서 왜 떠났느냐고, 타박하는 데도 아빠는 언제나처럼 미소 지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눈빛에 디에고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엄마를 찾았다. 그런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니 아빠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그 몸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놀라서 손을 뻗는데 덥석 잡히는 손이 있어 놓치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서 꼭 쥐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손은 아빠의 손과 달랐다. 험한 일을 하면서도 아빠는 엄마보다도 손이 부드러웠으니까.
이렇게 굳은살이 박인 손이 아니었다.
디에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떴다. 그런 디에고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눈빛. 이런 눈빛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 잠깐 당황스러웠다.
그때 꽉 쥔 왼손에 느껴지는 것이 있어 디에고는 몸을 일으키고는 왼손을 펴보려고 하는데 잘 펴지지 않았다.
에드가 그런 디에고의 왼손을 잡고는 살살 주무르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펴줬다. 쥐라도 난 것처럼 펴지지 않던 손가락이 펴지자 그 안에 많이 보았던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디에고는 그걸 본 순간 어젯밤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디에고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드니 에드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꿈··· 아니었어요?”
“아니야.”
“진짜 아빠가 죽었어요?”
에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고는 입술을 깨물고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물었다.
“진짜 아빠가 도시를 구했어요?”
“그래. 네 아빠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오늘 아침 해를 보지 못했을 거다.”
디에고는 에드의 말이 농담처럼 느껴졌지만, 그를 만나고 보인 행동들을 생각하면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아빠는 언제나 웃으며 사람들을 대했지만, 묘하게 사람들이 아빠를 어려워하던 것은 기억했다. 하지만 그런 아빠라고 해도 도시를 구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빈민가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던 에드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으리라.
디에고의 시선이 반지로 향했다. 언제나 아버지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 그 반지를 바라보던 디에고는 조심스럽게 왼손 검지에 반지를 넣어 보았다.
아빠가 끼던 반지라 클 거로 생각했는데 반지가 스르르 줄어들더니 검지에 꼭 맞게 되었다.
반지를 끼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갑작스러운 울림에 놀란 디에고가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은 한 번만 울리고 가라앉았다.
“으음.”
그때 소피아가 깨어나는지 신음이 들려오기에 디에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소파에서 한 걸음 내딛다가 휘청거렷다.
어째서인지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때 옆에서 에드가 받쳐줘서 넘어지는 꼴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디에고는 다리에 힘을 주고 소피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피아는 침대에서 누운 채로 눈을 떴는데 그 눈을 본 디에고는 흠칫 놀랐다.
병에 걸려 아파할 때도 저런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엄마.”
디에고의 부름에 소피아의 눈에 희미하지만, 생기가 돌아왔다. 소피아의 시선이 디에고를 향했다.
“디에고.”
디에고가 다가가 소피아의 손을 잡아주자 그녀는 손을 내밀어 디에고를 안아주었다.
소피아는 후안의 죽음을 들었을 때 세상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 더는 살 의욕조차 남지 않았는데 디에고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여자로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냈지만, 엄마로서 자신은 남아있다는 것을.
디에고는 자신을 안아주는 소피아의 손길에 오히려 의젓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오히려 소피아를 안아주었다. 소피아는 그 모습에 디에고에게서 후안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의젓하네. 우리 아들.”
디에고는 최대한 밝게 미소를 지으며 소피아에게 반지를 보여줬다.
“엄마. 이제 내가 아빠 몫까지 할게.”
소피아는 디에고의 검지에 낀 반지를 가만히 만져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고 했는데 다시 눈물이 났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 소피아를 디에고가 꼭 끌어안고 고개를 들어 엄마에게 자신의 눈물을 숨겼다.
디에고 모자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 일행 모두가 다 같이 모였다. 테인은 어제 아린이 교단에 보고하고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얘기를 모두 들었고, 에드도 밤새 씻지 못했다가 깨끗하게 씻고 한자리에 모였다.
소피아가 먼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에드가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은혜라고 한다면 이 도시 전체가 후안에게 입었습니다.”
소피아는 슬며시 미소를 지을 뿐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마 소피아는 대충은 후안에 대해 알고 있었으리라. 후안이 숨기려고 해도 은연중에 드러났을 테니까.
“기억하실지 모르시겠지만, 후안이 디에고를 저희에게 부탁했습니다.”
소피아는 아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안이 악마라면 디에고는 악마의 아들이다. 그런 이를 아린이 맡아준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진배없다고 여겼다.
그런 소피아의 시선에 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스트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일입니다. 디에고를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소피아는 그 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성기사가 아스트론의 이름을 걸었다는 것은 그 자신의 목숨보다 우선하는 약속이다.
그런 약속을 후안이 받아냈다.
후안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희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으면서도 저들이 예의상 해주는 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듣고 보니 정말로 후안은 이 도시를, 저들을, 그리고 가족을 위해 희생했음을 알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소피아는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후안의 마지막 부탁에 수긍했다.
“디에고를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