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방문객
구름 낀 하늘에 빛의 길이 열리면서 비추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맑아진 아린은 눈을 번쩍 떴다. 머리가 너무 맑아서 도저히 눈을 더 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을 뜬 아린은 잠시 낯선 천정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던 아린은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를 떠올려 보다가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꺄악!”
분명 세 번째 술잔을 비운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자신의 머리를 받쳐주던 굳은 살 가득 박힌 손길과 함께 들렸던 에드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귀엽네’라고 했던 말.
살면서 처음 들어 본 말이다. 신실한 아스트론의 성기사로 성기사단에서도 여자로 봐주는 이들은 없었다. 아버지 같은 마스터 팔라딘의 가르침 아래에서 그들은 동등한 아스트론의 검으로만 대했으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들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이불을 끌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언제 이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단 말인가? 이불로 몸을 가린 아린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에드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마물이라도 들이닥친 줄 알았네요. 깨셨으면 씻고 식사하러 내려오세요.”
“···예.”
에드가 물러가자 아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드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그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린은 고개를 들어 방을 돌아보았다. 방 한쪽에는 그녀의 장비들이 잘 손질되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씻을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배려를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 아린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가만히 물에 손을 담갔다. 물은 차갑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져 있어서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간단히 씻고 무장을 다시 착용하며 아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비를 손질하는 데도 상당한 공을 들인 기색이 역력했다.
기분이 좋아진 아린이 문을 열고 나오자 그곳에는 여전히 술판이 벌어진 채였다. 테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가 옆으로 꺾여 죽은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고, 그란트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술판을 정리하고 있는 하녀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에드뿐이었다.
아린은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맑은 하늘에 햇살을 보니 해가 이제 막 뜨고 있었다.
“지금까지 술 마신 거예요?”
“프레티안 패키지로 마셨습니다. 뜻밖에 프레티안 8년산이 입에 잘 맞네요. 가격도 적당하고.”
아린이 앞에 앉자 에드가 술상을 정리하던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아침 준비해 주세요.”
“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따뜻하게 데운 스프와 갓 구운 빵이 올라왔다. 아린은 산더미처럼 나온 빵을 보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에드가 시킨 거예요?”
“예. 넉넉하게 준비해 달라고 했죠.”
에드는 입이 짧지만, 아린은 굉장한 대식가였으니 빵은 이 정도 준비해야 다른 사람도 먹을 게 있었다.
스프 냄새를 맡고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 있던 테인이 깨어났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던 그란트도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은 그들은 스프를 들어서 술잔 비우듯 마시다가 둘 다 입천장을 데어서 바동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린이 한숨을 내쉬고 그 둘에게 신성 회복 주문을 걸어줬다.
“고맙습니다.”
미소를 지은 그란트와 테인이 정신을 차리고는 빵을 찢어 스프에 찍어 먹었다. 빵을 우물거리면서 테인이 물었다.
“그보다 소원은 뭐로 할 건가?”
에드는 그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걸어온 승부는 피하지 않던 기질이 있어서 대답했을 뿐이지 뭔가를 바라고 이긴 건 아니었다.
“글쎄요. 그저 술 마실 핑계였을 뿐이지 뭐 꼭 소원을 빌고 싶어서 이긴 건 아니라서요.”
그제야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것인지 깨달은 아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 잔에 알딸딸해졌을 때 내기를 걸었던 기억이 났다.
그저 에드의 과거가 궁금해서. 소원을 통해서 그의 과거에 대해서 듣고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자신이 패했다. 성기사들 중 누구도 자신과의 술 내기에서 당해내지 못했는데 에드에게 패했다.
그 독한 술을 마시고도 밤새 술을 마신 것을 보니 감히 술로는 대적할 이가 없을 것 같았다.
에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아린이 입에 물고 있던 빵을 꿀꺽 삼키고는 답했다.
“생각나면 언제든 말해요. 한번 말한 것은 지키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뇨. 꼭 지킬 거예요. 그러니 꼭 소원 비세요.”
에드는 아린이 열을 내는 모습에 속으로 웃었다. 어물쩍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니 과연 그녀답다 싶었다.
“생각나면 말하도록 하죠.”
아린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작정하고 빵을 먹어치웠다. 그러면서도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란트는 아침을 먹고는 영주와의 일을 해결한다고 나섰고, 일행은 교회로 향했다. 엔트 시의 교회에는 이미 아린이 가서 말을 다해놔서인지 다시 찾아가니 알렉 주임 사제가 그들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미 탁자 위에는 트라비아 왕국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확인해 보게.”
아린이 다가와서 지도를 확인하는 사이에 알렉 주임 사제와 테인이 인사를 나눴다. 새삼 테인이 얼마나 발이 넓은지 알 수 있었다.
하긴 아스트론 교단의 대주교와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니 알음알음 다 알고 있으리라.
에드는 그사이 그들이 살피는 지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지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아스트론 교단의 정보력이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수렵의 여신 다이아나의 신전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사냥꾼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신으로 그녀의 성유물을 탐내는 에드는 그 신전들의 위치를 눈에 담아뒀다.
언제고 찾아가서 그들 교단과도 인연을 만들어 둬야 성유물을 얻어낼 것 아닌가?
에드가 그 위치들을 눈에 담아두는 사이에 아린이 손으로 한 곳을 짚었다.
“마침 다음 방향은 수도 방향이네요. 목적지는 여기에요. 칼림 시.”
아린의 말처럼 엔트시에서 수도 방향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칼림 시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말을 타고 달려도 보름은 걸릴 거리.
테인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베른 시까지 사흘이면 가고 아인 강을 이용해서 이동하면 오 일이면 될 걸세. 시간은 반으로 줄일 수 있겠군.”
베른 시. 교역의 도시. 그 이름을 들으니 기억나는 녀석이 있었다.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여겼던 야만전사. 제라드가 떠올랐다.
아린을 만나서 그녀와 함께하고 있지만, 그 녀석은 잘 있으려나 싶었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메인 퀘스트를 따라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이라면 이번에 그란트 상단에서 마차를 하나 빌리기로 했네. 사두마차라 속도도 더 빨라질 거고, 더욱 안전할 걸세.”
아린이 그 말에 알렉 주임 사제를 돌아보았다.
“혹시 말씀드렸던 것 준비되었습니까?”
“준비했네. 마차는 가져왔나?”
“새로운 마차를 이용한다고 하니 그걸 이용하도록 하죠.”
테인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말들 하는 건가?”
아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마차에 축성해달라고 했어요. 악마는 막지 못하겠지만, 마물 정도는 쉽게 다가오지 못할 거예요.”
테인이 그 말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거 잘 됐군. 그런데 그거 돈이 많이 든다고 들었는데? 대주교급이나 하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에요. 다행히 알렉 사제님이 이쪽으로 경험이 많으셔서 축성진을 새겨 주실 겁니다. 매일 신성력을 주입해야 하지만 그건 제가 하면 될 일이니까요.”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아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마차를 그렇게 축성한다고 해도 마물과 악마가 찾아오면 나가서 싸울 거예요. 그건 테인님의 안전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이니까요.”
테인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펜드리건도 그 정도로는 안 해줬는데.”
에드는 테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픽 웃음을 흘렸다. 아린은 보통 전투가 시작되면 마차를 지키는 역할이었다. 그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차를 축성하려는 것이 빤히 눈에 보였으니까.
새로 받은 마차를 보고 에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란트. 정말 이런 걸 내주신다고요?”
“어떻소? 마음에 들지 않소? 내가 이거 타고 나타나면 수도의 내로라하는 상인들도 부러워했소.”
난쟁이가 솜씨를 부린 마차인데 크기도 크기이지만, 그 화려함에 기가 질릴 지경이다.
“내가 타던 거라 안락하기 그지없소. 장거리 여행에 특화되어 있거든.”
에드는 그 말에 조금 기대를 했다. 테인의 마차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현대의 안락함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승마보다는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 주임 사제는 축성진을 새기면서 아린의 신성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스터 팔라딘이 아끼는 성기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정도로 뛰어난 신성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덕분에 축성진의 위력도 생각 이상이 되었다. 이 정도 축성진이라면 마물은 근처에도 못 오고 악마도 도망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났다.
“아린 경. 신성력이 마스터 팔라딘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군.”
아린은 그 말에 축성진에 신성력을 주입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스터 팔라딘께서는 신성력도 신성력이지만, 전투술이 경지에 이른 분이시죠. 괜히 첫 번째 검이 아니세요.”
“그건 그렇지.”
마스터 팔라딘의 신성력에 버금갈 신성력을 어떻게 쌓았나 궁금했지만, 겸손하게 구는 그녀에게 더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축성진에 조금 더 신경을 쏟아 완성도를 높였다.
축성진이 완성되자 알렉 사제는 아린에게 신성력을 한계까지 주입해 보라고 말했다. 아린도 그 말에 전력을 다해서 신성력을 주입했다.
지금까지는 신성력을 전부 다 쏟아낸 적이 없었기에 그녀도 호기심이 일어 전력으로 주입했는데 그 빛이 어찌나 강한지 그걸 구경하던 모든 이들이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리고 완성된 축성진 덕분에 마차는 푸른빛을 휘감고 있었다. 그냥 봐도 화려하기 짝이 없던 마차가 신비로운 푸른빛에 둘러싸이자 시선을 강탈했다.
에드가 질린 표정으로 마차를 보았다. 이렇게 눈에 띄는 마차를 어떻게 타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걸 구경하던 그란트의 감상은 달랐다.
“이 정도면 왕족도 부러워하겠소. 이걸 팔 수만 있다면 왕국 최고의 상단이 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저 마차를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에드는 아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거 혹시 빛이 안 나게 못 만듭니까?”
아린이 알렉을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기능까지는 넣지 못했습니다.”
에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뒤로 물러났는데 어째서인지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만족해하고 있었다. 테인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걸 타고 다녀야 하려나 보다.
그냥도 화려한데 빛까지 번쩍번쩍 내뿜는 마차를.
마차에 축성하느라 밤이 되어서 하루 더 지내기로 하고 오늘도 술잔을 비우고 있는데 찾아온 이가 있었다.
“합석해도 될까?”
에드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제린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그란트에게서 1만 골드를 뜯어간 소년 영주.
무슨 할 말이 있어 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