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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악마 사냥꾼이 되었다-29화 (29/202)

#29

그란트

저택으로 돌아간 그란트는 상단의 창고로 향했다. 목숨 빚을 지었으니 제대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상단의 창고 문을 연 그란트는 자신이 찾던 물건 옆에 놓인 꽃을 보았다.

크리스탈로 만든 프레안 꽃의 장식품이었다.

유달리 프레안 꽃을 좋아했던 자신의 셋째 아내 리아에게 주기로 하고 난쟁이 세공사에게 특별히 주문했던 장식품이었다. 그란트가 그 장식품을 손에 쥐었다.

“하아.”

새로운 향수 개발을 위해서 조향사를 찾던 중에 그녀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그녀를 본 순간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부인이 둘이 있음에도 그녀에게 청혼했고, 데리고 왔다.

꿈만 같았던 순간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눈앞에서 악마로 변한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이 한낱 악마의 매혹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논 악마라는 것들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그 악마는 자신을 죽이고자 했다. 그 사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영주처럼 허리가 반으로 잘려 죽었으리라.

그란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고, 그의 손안에서 크리스탈 장식품은 산산이 조각났다. 손바닥을 파고든 조각에 이를 뿌득 간 그란트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철철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증오가 일어났다.

악마가 판을 친다고 하지만 실제로 악마를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교단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악마들을 잡아들이다 보니 그들도 최대한 몸을 사렸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악마의 손에 놀아나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저열한 악마들은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될 종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란트는 창고에 쌓여있는 상자를 옆으로 치우고, 바닥을 덮은 가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꺼내서 바닥에 난 구멍에 넣고 돌렸다.

이곳은 그란트 상단이 모은 진귀한 물건을 모아놓는 곳. 열쇠로 열지 않는다면 온갖 함정이 튀어나와 죽임을 당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란트는 자신이 만났던 이를 떠올렸다. 가죽 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는 악마를 상대하면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자신을 매혹시킨 악마에게 원한이 있는 것이든 아니면 모든 악마에게 원한이 있는 것인지 몰라도 그에게 도움이 될 물건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물건이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림자 망토.

검은 망토로 여행용으로 쓰기에도 적당한데 이걸 걸치고 있으면 기척을 감출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서 사막을 넘을 때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유물급 장비이나 자신보다 그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란트가 그림자 망토를 잘 접어 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첫째 아내인 메릴을 만나는 것은 주저되었으나 만나야만 했다. 그녀에게 이번 일의 전모를 알리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둘째 부인을 얻을 때도 웃으며 그러하라고 얘기해 주었던 그란트 상단의 진정한 안주인.

그녀가 중심을 잡아줘서 상단이 이만큼 컸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둘을 아끼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창고를 나온 그란트는 앞에 선 기사와 그 뒤에 선 병사들을 보았다.

“헤럴드 경? 무슨 일이시오?”

영주의 기사인 그가 이곳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묻자 헤럴드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죄인을 포박해라.”

병사들이 창으로 겨눈 채 밧줄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란트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왜, 왜 이러시는 거요?”

“영주님이 내리신 명령이다. 아메트 공 살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압송해오라고 하셨다.”

평상시에 아메트 공에게 들인 돈이 많았던 그란트는 헤럴드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임무만 수행하는 중이었다.

저항한다면 목이 베일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포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란트는 순순히 포박을 받았다.

“돌아간다.”

계획이 틀어졌다.

악마 필리아를 죽였으니 ‘석양이 머무는 곳’으로 가서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는데 새로이 영주가 된 소년 영주 제린에게 붙들렸다.

증언을 위해 남아달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란트를 그냥 죽이게 두기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렸다는 것도 있지만, 그의 보상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린도 어쩐 일인지 같이 남아있어 줬다.

연회장은 정리 중이라 그들이 모인 곳은 성의 대전이었다. 영주성은 오래된 곳인 만큼 대전의 분위기 자체가 딱딱하고 굳어 보였다.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니 그렇게 폐쇄적이겠지.

영주 성이 있는 곳은 그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귀족이라는 말이었으니 그들의 딱딱함이 이해가 갔다.

제린은 비통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귀족의 가르침을 따라서 자랐다고 하나 부모가 한 자리에서 죽었으니 비통함을 숨기기 어려우리라.

나이도 고작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니까.

그때 대전의 입구로 들어서는 이들이 보였다.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굴비처럼 엮여 오는 그란트였다.

기사는 그란트를 무릎 꿇리고, 그 옆에 섰다. 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란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란트. 그대가 오늘 연회를 계획했다고 들었다. 맞는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셋째 부인을 데리고 왔다. 맞는가?”

“맞습니다.”

“그 셋째 부인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 인정하는가?”

그란트는 황급히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악마였습니다. 저 또한 악마에게 매혹이 되었을 뿐입니다.”

제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리게만 보였지만 그 눈빛은 귀족 그 자체였다.

“그대가 악마에게 매혹되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그대가 악마에게 매혹되었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서 그대의 책임이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나는 오늘 부모님을 한 자리에서 잃었다!”

마지막 외침의 절절함에 그란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악마에게 놀아났다고 하나 그 부모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영주성으로 그 악마를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란트가 고개를 숙이자 제린이 입을 열었다.

“귀족 살해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다. 알고 있는가?”

그란트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선처를 바랄 뿐이었다.

에드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란트도 할 말이 많겠으나 부모가 한날한시에 죽은 눈 돌아간 어린 영주 앞에서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체념한 듯 보였다.

믿었던 부인이 악마였고, 그녀의 손에 죽을 뻔했던 그가 이제는 귀족 살해의 죄로 죽게 생겼으니 오늘 하루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하다 할만했다.

아린은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한숨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제린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오?”

제린의 물음에 아린이 계단을 내려가 대전의 중앙에 있는 그란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제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악마 필리아는 사람을 매혹해 조종하는 것으로 유명한 악마입니다. 그녀에게 매혹되어 부모를 죽인 자 또한 있으니 그녀의 매혹은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불가항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제린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럼 내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질 자가 없단 말인가!”

“책임질 자는 이미 악마 사냥꾼 에드의 손에 죽었습니다.”

애먼 사람 잡지 말라는 아린의 경고 서린 목소리에 제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정 책임져야 할 악마가 죽었으나 아메트 공의 죽음에 대해서 그란트 상단주도 완전히 책임을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으니 배상금을 받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린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린이 그가 할 말은 잊은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영주의 자리에 오른 만큼 무엇이 영지를 위한 것인지 염두에 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린은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리다고하나 상황 판단은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란트의 목을 벤다면 자신의 분노를 풀 수 있을지 모르나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특히나 이번 시향회에 온 귀족들은 아버지인 아메트의 이름을 보고 온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 이중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배상금을 받는 것이 좋다.

제린은 천천히 눈을 떠 그란트를 바라보았다.

“아스트론 교단에서 나온 성기사 아린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단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내 뜻대로 그대를 죽일 수는 없겠군. 배상금 1만 골드로 그대의 죄를 사해주겠다.”

에드가 놀란 눈으로 제린을 돌아보았다. 이 꼬마 미친 거 아닌가?

지금까지 고생고생해서 만진 돈도 이백 골드를 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1만 골드라니?

그란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크나큰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제린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아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뒤돌아 대전을 나갔다. 대전을 나가기 전 걸음을 멈춘 제린이 고개만 돌린 채 말했다.

“사흘 안에 배상금을 내지 않는다면 그란트 상단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제린이 물러나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그란트의 밧줄을 직접 풀어주며 말했다.

“다행일세.”

그란트는 헤럴드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자리에서 화를 내봐야 앙금만 남는다. 이럴 때 웃어 넘겨야 상대는 더 미안함을 느끼는 법.

“아닙니다. 험한 꼴 보이지 않게 해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 살펴가시오.”

헤럴드가 물러나자 그란트는 다리가 풀리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 하루 생사를 몇 번이나 오가니 아무리 대상단의 상단주라고 해도 다리가 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에드는 그를 부축하는 아린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에드는 나설 구실이 없었다.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할 수도 없었으니까.

비슷한 주장이었지만, 주장하는 이가 성기사이니 말에 담긴 공신력이 다르다. 제린이 한발 뒤로 물러난 것도 아스트론 교단의 체면을 본 것도 있으니까.

그녀 덕분에 자신이 살린 이가 살아남았다. 반드시 살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란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 손을 넣어 검은 망토를 꺼내더니 에드의 앞으로 다가와서 내밀었다. 에드는 검은 망토를 내려다보다가 그란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드님의 이름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악마를 사냥하신다고 들었는데 이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림자 망토라는 것으로 착용자의 기척을 감출 수 있고, 체온을 유지 시켜주는 유물입니다. 은인께서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착용자의 기척을 죽여준다? 민첩 스탯이 있기에 저것이 없어도 기척을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저게 더해지면 더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에서 여행하다 보니 체온 유지 기능이 있다는 편의성이 가장 탐났다.

에드가 망토를 받아서 휙 돌려 어깨에 걸쳤다. 서늘하던 공기가 이걸 걸친 것만으로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유물급 장비라면 그게 무엇이든 100골드는 될 텐데 이런 것을 발차기 한 번으로 얻었으니 만족스러웠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손은 어쩌다 그린 된 것입니까?”

인제 보니 손에서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아린도 그걸 확인하고는 그 손을 잡아 박혀있는 유리 조각을 빼내고는 가만히 손을 잡고 있으니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손을 감싸니 피가 멎고 피부에 새살이 돋았다.

그란트도 지금까지 아스트론 교단에 수많은 돈을 기부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왔지만, 이렇게 뛰어난 신성력을 지닌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새삼 이들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이들이니 악마를 잡고 다니는 것이겠지.

둘의 능력을 본 순간 결심했다. 자신이 악마에게 느끼는 증오를 직접 풀 방법은 없으나 이 둘이라면 가능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악마들을 상대하겠다. 돈이라는 힘으로. 그리고 그 선두에 이 둘이 서 있게 되리라.

그란트는 결심을 굳힌 눈빛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님. 제가 돕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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