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책임
냉기에 의해서 연회장의 모든 불이 꺼진 상황에서 시뻘건 두 눈을 빛내면 맞춰달라는 말이라 동시에 두 발을 쏴서 눈을 맞췄다.
시뻘건 두 눈알의 빛이 사라진 것을 보고 에드는 빙결의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어둠 속이라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누가 필리아인지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꼬리는 이곳 연회장의 절반을 간격 안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에드도 지금 그녀의 간격 안에 있었고, 문까지 도망친 몇몇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녀의 간격 안에 있었다.
에드가 재차 화살을 쏘기 전에 비명을 지르던 필리아의 꼬리가 원을 그리며 연회장을 휩쓸었다. 그 꼬리가 휘두르는 간격에 있던 것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그란트와 상황파악을 위해 서 있던 영주를 비롯한 몇 명의 귀족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멀어서 손을 쓸 수 없었지만, 그란트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기에 그대로 달려가 그를 올려 차버렸다. 그란트의 몸이 허공으로 떴을 때 그가 있던 곳으로 꼬리가 날아들었다.
에드는 그를 차올리면서 그대로 뒤로 누워서 날아드는 꼬리를 피했다.
서걱.
뭔가 절단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드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뒤로 눕던 등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당겨놓았던 시위를 놓았다.
어둠 속에서 날아간 화살이 필리아의 무릎에 꽂혔다. 무릎을 뚫고 오금 뒤로 빠져나온 화살에서 시작된 냉기에 그녀의 무릎이 박살 났다.
에드는 등이 땅에 닿기 무섭게 뒤로 굴렀다. 마치 처음 그란트를 차올릴 때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하나 된 부드러운 뒤구르기였고, 에드가 있던 자리로 필리아의 꼬리가 떨어져 내렸다.
쾅!
연회장 바닥의 돌이 박살 나 비산하는 사이에 에드는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일곱 발의 화살이 날아드는 것을 느꼈는지 필리아가 양팔로 머리를 가렸다.
그렇게 여섯 발의 화살이 그녀의 양팔에 막혔을 때 마지막 한 발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돌아가 목 뒤 경추에 꽂혔다. 필리아의 약점인 곳.
관통이 있어서 굳이 약점이 아닌 곳이라고 해도 많이 맞추면 잡을 수 있겠지만, 굳이 약점이 있는데 안 맞출 이유도 없었다. 경추를 뚫고 목을 관통한 화살이 필리아의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필리아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이에 문까지 물러났던 귀족들이 문을 열어젖히자 복도의 불빛이 들어왔다. 그들은 긴 꼬리를 내린 악마의 시체의 두 눈과 목 뒤에 꽂힌 화살을 보고는 새삼 에드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곳. 검은 코트에 활을 든 그의 앞으로 화살에 맞아 죽은 악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주위로 끔찍한 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영주는 물론이고 가까이 있던 이들 대부분이 죽었다.
귀부인 몇은 까무러쳤고, 몇은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에드는 그사이 그란트에게 다가갔다. 그란트는 살아남기는 했지만, 넋을 잃은 상태였다.
에드는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해 그런 그란트의 턱을 잡아 들었다. 그란트의 공허한 눈동자를 바라본 에드는 그가 악마 추종자가 아니라 단순히 매혹에 빠졌던 것인지 필리아가 죽으니 정신을 차린 상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붉은빛이 보이지 않기에 에드는 그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렇다면 이제 필리아의 심장을 꺼내야 한다.
몸을 일으키던 에드는 뒤쪽에서 들리는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병사 하나를 대동한 채 아린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린?”
아린의 복장을 본 귀족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성기사신가?”
아린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녀의 눈에 푸른빛이 감돌자 귀족들이 뒤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신성력을 다루는 진짜 성기사는 귀족들이라고 해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런 성기사는 대륙을 아우르는 아스트론 교단에서도 굉장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악마에 관련된 일에서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것을 알았기에 귀족들은 괜히 엮여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슬그머니 물러나려 했다.
아린은 그런 귀족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악마가 등장한 만큼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악마 추종자가 있을 수 있다. 단 한 명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히 통제하라.”
아린을 데리고 왔던 병사가 그 말에 손짓하자 에드를 제압하기 위해서 연회장에 진입했던 이들이 이번에는 귀족들을 포위했다. 무기를 들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 뜻이 명백하자 귀족들을 지키던 기사들이 인상을 굳히며 그들과 대치했다.
아린은 그런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기를 내려라.”
“아무리 성기사라고 하나 이런 무례를 저질러도 되는 것이오?”
아린은 푸른빛이 감도는 눈으로 그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이곳에서 조사를 받고 끝내겠나? 아니면 성기사단의 가택 수색을 받겠나?”
기사의 뒤에 서 있던 귀족이 그 어깨에 손을 올려 말리고는 말했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길. 성실히 조사에 임할 테니 먼저 일을 보시게.”
아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횃불 하나를 들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벌어진 끔찍한 참상에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에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심장을 적출해서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테인님이 가르쳐 주셨죠.”
아린은 성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횃불 좀 들어주세요.”
에드가 횃불을 받아들고 옆에 서자 아린은 성검으로 필리아의 심장을 갈라서 끄집어냈다. 그걸 손에 쥐고 눈을 감은 그녀가 기도를 올리자 붉은빛이 아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아린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혈마석의 흔적을 감지하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번에는 거리가 조금 되네요.”
말을 타고 오 일을 달려온 거리보다 더 먼데도 느낄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이걸로 중급 악마를 셋이나 죽였는데 아직도 연결된 자가 있다니 정말 새로운 대악마가 등장하려나 보네요.”
“그러게요. 네프사엘보다 더 강한 권세를 이끄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린의 시선이 얼음 기둥과 그 안에 갇혀 있는 향수병을 향했다.
“정말로 향수로 뭔가 하려고 한 건가요?”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해서 일단 얼려버렸는데 10년짜리 계획이었다고 했어요. 분명 뭔가 있을 겁니다. 교단에서 연구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게요.”
아린이 검을 휘둘러 얼음 기둥을 잘라내 그 안에서 얼음 안에 든 향수병을 꺼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도 죽은 악마가 필리아인 것을 보면 10년 동안 공들인 향수라면 에드의 말처럼 분명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귀족들은 왜 남으라고 한 겁니까?”
“조사해봐야죠. 악마에게 매혹된 자가 있는지 확인만 할 거예요. 그리고 입단속도 해야 하고요.”
에드는 그 말에 대기하고 있는 귀족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기사들을 보았다. 만약 저들 중 악마 추종자가 있었다면 필리아를 공격할 때 분명 빈틈을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승부의 순간이 짧았다고 하나 분명 끼어든 이는 없었다.
아린은 푸른빛이 나는 눈으로 그란트를 먼저 확인하고는 연회장 밖에 모인 귀족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라고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가 악마에게 혹했는지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모든 귀족을 판별하고는 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녀의 푸른 눈빛을 마주한 이들이 알아서 숨을 죽였다.
“이번 퇴마행은 아스트론 교단의 예언에 관련된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괜히 입 밖으로 꺼낸다면 성기사단이 아니라 이단 심판관들이 찾아갈 테니 주의하십시오.”
영주가 죽은 일이니 왕국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어 알게 될 일이나 에드에 대한 소문은 불식시킬 생각이었다. 아스트론 교단의 이름을 댄 이상 저들은 이번 일을 일으킨 이가 아스트론 교단 사람으로 알 터.
그거면 되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들을 기다리게 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이미 악마 추종자가 없음은 확인했으니까.
귀족들이 기사들과 함께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는 연회장으로 달려오는 소년을 보았다. 기사 하나를 대동한 채 달려오는 소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소년은 연회장 문 안쪽을 살피더니 소리쳤다.
“아버지!”
영주의 시체를 껴안고 절규하는 모습을 본 에드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는 그란트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나 악마의 손에 죽은 이들의 가족들을 볼 때면 자신이 지금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인지 현실을 사는 것인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아린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에드를 돌아보았다.
“그만 물러나죠.”
“그러죠.”
둘이 영주 성을 나와서 걸어가는데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에드가 돌아보니 그란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했는지 안색은 파리했으나 눈빛은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에드와 눈이 마주친 그는 다가와 얼른 손을 잡으려 했다. 에드가 한 걸음 물러나지 않았다면 가능했으리라.
그란트는 에드가 물러난 것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금세 신색을 회복하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소. 당신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소.”
아내를 죽인 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은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필리아에게 매혹되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놀아났으나 그녀가 죽고 매혹이 풀려서인지 그는 대상단의 상주로 돌아와 있었다.
“내 보답을 하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으시오?”
“우리는 ‘석양이 머무는 곳’으로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란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럴 만도 하리라. 그곳은 그의 첫째 부인이 관리하는 곳이었고, 그는 비록 악마에게 매혹당했다고 하나 셋째 부인에게 빠져서 그녀를 등한시 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기억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니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먼저 가 계시오. 내 보답할 것을 준비하고 찾아가겠소.”
에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린과 함께 먼저 떠났다. 그가 찾아와 보답한다면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가진 돈이 넉넉하고, 돈 많은 물주와 함께 움직이지만, 그래도 돈은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아린이 에드와 단둘이 걸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란트는 왜 살린 거예요?”
아린은 연회장 내부를 봤고,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을 대충이나마 짐작했다. 그란트도 악마의 공격 거리 안에 있었는데 그만 살아남은 것에 관해 묻기에 에드는 간단히 답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니까요.”
구할 수 있기에 구했다. 그의 보답을 바라고 구한 것은 아니었기에 에드는 솔직히 답했고 아린은 그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배울 것이 많은 남자다.
그렇게 영주성을 벗어나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니 가슴이 온통 피로 물든 옷을 입은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 기사 하나와 병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에드와 아린이 멈춰서 기다리니 그들의 앞에 도착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초면에 반말. 귀족다웠다.
“그대가 연회장에서 악마를 죽였다고 들었다. 내 아버지. 아메트 공을 죽인 것이 그란트 부인이 맞는가?”
“맞습니다.”
영주인 아비가 죽었으니 저 소년이 영주다. 에드의 대답을 들은 소년 영주는 안도하는가 싶더니 뒤에 선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그란트를 잡아 와라.”
아, 이게 또 이렇게 돌아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