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필리아
아스트론 교회에서 보고를 마친 아린은 ‘석양이 머무는 곳’을 찾았다.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7층짜리 탑은 성내에 그곳밖에 없으니 우뚝 솟은 모습이 자연스레 눈길을 끌었다.
오랜만에 밤에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
오늘은 테인이 말했던 프레티안을 마시고 쉴 계획이었다. 에드와 만나서 지금까지는 퇴마행만 해왔다. 매 순간순간이 성장하는 그런 좋은 시간이었지만, 사적인 얘기는 나눈 적이 없었다.
존경심마저 느껴지는 에드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악마 사냥에 임하는지.
술은 사람의 진심을 꺼내게 해준다. 그리고 그녀는 술이라면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신했다. 성기사단의 선배 기사들도 모두 쓰러트린 전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를 취하게 해서 진심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석양이 머무는 곳’에 도착하자 메이드 복을 입은 여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린님?”
“맞아요.”
“테인님이 기다리십니다. 따라오세요.”
여인을 따라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 아린은 테인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요정족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왔나?”
아린은 그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에드는요?”
“잠깐 볼 일이 있다고 나갔네.”
“볼 일이요?”
“오늘 영주성에서 셋째 부인이 만든 향수의 시향회가 있다고 했거든.”
아린이 놀라서 되묻기 전에 테인이 옆에 앉은 여인을 소개해줬다.
“이쪽은 메릴 그란트. 그란트 상단주의 첫째 부인이자 그란트 상단의 안주인. ‘석양이 머무는 곳’의 주인이기도 하네.”
아린은 에드가 이곳에 없는 것이 시향회를 보러 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향회라면 지체 높은 이들이 모일 곳. 그곳에 악마를 확인할 수 있는 자신을 두고 갔다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따져 물으려 할 때 그란트 상단주의 첫째 부인을 소개한 것은 그녀가 모르게 해달라는 뜻으로 보였기에 아린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스트론의 영광이 함께 하기를. 잠시 볼 일이 생각났어요. 술은 이따가 마시죠.”
지금 간다고 해서 영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이곳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마음을 졸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린이 뛰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메릴이 눈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무슨 볼일이 저리도 많으실까?”
테인은 그 물음에 미소를 지은 채 술잔을 들어 보였다.
“술은 더 없소?”
메릴은 그 물음에 손짓했고, 또 한 병의 프레티안이 나왔다.
전력을 다해서 활을 쏘지 않았다. 악마인데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덤터기를 쓸 테니까.
그래서 적당히 힘을 남기고 쏜 화살이었는데 화살이 2층을 넘어 연회장으로 진입한 순간 그란트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눈이 들리며 에드와 마주쳤다.
그리고 화살을 본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순간. 에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여자. 진짜 악마다.
그녀는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 살짝 몸을 틀어서 왼쪽 어깨를 내줬다. 왼쪽 어깨에 꽂힌 화살과 함께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그녀의 비명에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화살을 맞은 채로 그란트의 품으로 쓰러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살폈다.
“암습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귀족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그들을 지키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고, 암살자를 찾기 위해서 주위를 살폈다.
2층 복도로 나가는 문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에드는 모두의 시선이 주위를 향할 때 향수병을 가지고 나오고 있던 시종장과 쓰러진 여인이 눈을 마주치는 것을 보았다.
시종장이 손을 내밀어 향수병의 뚜껑을 열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저 향수병은 열려선 안 된다.
아직 자신을 찾지 못해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저들의 눈에 또 한발의 화살을 쏜다는 것은 위치를 알려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에드는 발각될 것을 각오하고 또 한 발의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 날린 화살은 향수병을 열려던 시종장의 목을 꿰뚫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 화살이었다.
“2층이다!”
귀족들을 지키던 기사 중 하나는 남고 하나씩은 뛰어 올라왔다. 열 명의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에드는 잠시 고민했다.
사람들 앞에서 필리아는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다면 분명 본 모습을 드러낼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화살을 한 방 맞으면서 상황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가 악마라는 것을 밝히지 못한다면 에드는 귀족들의 연회에 잠입해서 살인을 저지른 자라는 오명만 쓰고 끌려갈 판이다.
에드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달려오는 자들과 단번에 도약해서 2층 난간으로 뛰어오르는 이들을 보았다. 자신이 섬기는 귀족을 지키기 위한 그들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에드는 뛰어오른 이들을 향해서 화살을 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화살이라 그들도 검으로 화살을 받아낼 수 있었다. 다만 뛰어오르던 힘을 잃고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드는 그들이 떨어질 때 2층 난간을 향해 뛰었다. 의뭉스럽게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 꼴은 또 못 본다. 연회장의 샹들리에가 있는 곳까지 뛰어오른 에드의 시야에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에드는 허공에 뜬 채로 빙결의 화살집에서 꺼낸 화살을 그대로 쐈다. 그란트가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부인을 끌어안아 등으로 가렸다.
에드는 사실 그란트가 자발적으로 그녀를 막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그란트를 방패로 쓸 것까지는 염두에 뒀었지만.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화살을 쏘지 않았다. 20레벨이 되면서 얻은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의 소모가 꽤 크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휘파람을 불지 않아도 되는 화살 조종술. 무한정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쏘면 딱 2초 조종할 수 있었다. 2초가 지나면 그때부터는 새로 한 발 쏘는 게 좋을 정도로 마력의 소모가 심했다.
2초.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를 생각하면 2초 동안 화살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이점이 있었다.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장애물 뒤에 숨은 자라고 해도 예외가 없다.
에드는 그란트가 몸으로 가린 것을 보고 그의 어깨너머를 마치 뱀이 타고 넘어가듯 화살을 조종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란트 부인의 목을 노렸다.
그란트 부인이 그 와중에 팔을 들어 화살을 막았지만, 2초는 생각보다 길다. 샹들리에 위에 사뿐히 앉으면서 에드는 그 화살의 조종을 이어 갔다.
화살이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그란트 부인도 눈빛이 변했다. 이대로 간다면 목이 꿰뚫릴 판이다. 냉기를 머금은 화살촉을 본 그녀는 반대편 손을 들어 화살촉을 쥐었다.
끄그극.
화살촉 자체를 찌그러트리는 괴력.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 손만 검게 변했다. 관통력은 팔을 꿰뚫으면서 썼기에 악마의 손으로 돌아간 손바닥을 뚫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손이 변하는 모습이 그녀를 지키고자 했던 그란트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악마라는 것을 알고도 그녀의 곁에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란트 또한 악마 추종자일 뿐이다.
샹들리에에 매달린 에드를 향해 기사들이 소리쳤다.
“누구냐!”
“도망칠 곳은 없다! 내려와라!”
소리치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에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샹들리에 위에 섰다. 흔들리는 샹들리에 위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에드를 보고 영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내 연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뭣들 하는가! 저자를 내 앞에 끌고 와라!”
아메트의 외침에 병사들이 활을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에드는 그란트를 보았다.
과연 그는 자신의 부인이 악마라는 것을 알고도 그녀를 감쌀 것인가? 그렇다면 이곳에서 몸을 빼내야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 여자를 죽일 수 있다.
병사들이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 때 그란트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너, 넌 누구냐!”
그란트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깨에 화살을 꽂고 손목에 꽂힌 냉기의 화살 때문에 피부가 퍼렇게 죽어가는 셋째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고, 손목에 박힌 화살도 비틀어 꺾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행하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에드와 영주를 번갈아 보았다.
아메트는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과 에드, 그리고 그란트의 셋째 부인에게 향해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연회를 망친 자에게는 처벌을 내려야 하나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 또한 경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란트. 무슨 일인가?”
그란트가 자신의 셋째 부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손이 조금 전에 검게 변해서 화살을 막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악마의 손처럼.”
악마라는 말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했다. 귀족들은 문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고, 기사들도 그들을 호위하며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그란트 부인의 시선은 샹들리에 위에 서 있는 에드에게 향했다. 그녀는 교태 서린 눈빛으로 에드를 바라보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 목소리에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그들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필리아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생기를 빨아먹는 만큼 그녀는 순수한 전투력이 뛰어나기보다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을 주로 하는 악마다.
에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가슴에 차고 있는 목걸이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론이 준 증표가 그녀의 매혹을 견뎌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길게 끌고 갈 것도 없다.
매혹을 걸었을 때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악마였기에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리라.
에드가 샹들리에 위에서 화살을 쏘자 그란트 부인이 손을 들어서 화살을 잡아채려고 했다.
퍽!
처음에야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일부러 화살에 어깨를 내주기도 했겠지만, 전력을 다해서 쏜 화살은 그 속도와 담긴 힘이 다르다.
손으로 잡아채기는 했지만, 이미 화살촉이 미간을 때린 후다. 조금만 늦었다면 아마 머리가 꿰뚫렸을 공격.
고개가 뒤로 젖혀졌던 그녀의 몸에서 뭉클거리며 검은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에드는 그 모습에 화살을 시위에 걸고 마력을 집중했다.
본모습을 드러낸다면 이 한 방에 승부를 낸다. 냉기가 모여 새하얗게 빛나는 화살을 한껏 당긴 에드는 검은 기운 속에서 날아드는 꼬리를 보고 뒤로 훌쩍 뛰었다.
스걱.
그녀의 꼬리가 단번에 샹들리에의 줄을 끊어버렸다. 뒤로 뛰어 바닥에 내려서던 에드는 시위를 놓기보다는 그녀가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했다.
왜 샹들리에를 노린 거지?
그리고 떨어지는 샹들리에가 향수병을 덮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화살을 날렸다. 에드의 화살이 향수병에 꽂히며 주변을 얼려버렸다.
쩌저정!
거의 얼음 기둥이 생겨날 정도로 강렬한 냉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연회장의 불을 모두 꺼버렸다. 향수병을 깨트려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것 같았는데 향수병 자체가 얼어버려 그녀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냉기가 연회장을 휩쓰는 위력에 검은 연기가 모두 날아간 곳에 보라색 피부에 길게 찢어진 눈을 가진 악마가 서 있었다. 긴 꼬리를 가진 여인.
중급 악마 필리아가 에드가 얼려버린 향수병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10년을 준비한 계획이 이리도 허망하게 실패한다고?”
저게 뭔지 몰라도 저 향수병에 담긴 향수가 악마가 10년이나 공들였다는 것을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니었나 보다.
필리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지를 찢어 애완동물로 삼아주마!”
필리아는 자신의 마력을 모아 두 눈을 붉게 물들여 에드를 매혹하고자 했다. 목소리에는 저항할 수 있어도 매혹안과 마주치고는 견딜 수 있는 인간이 없다. 매혹안으로 매혹한 후에 스스로 팔다리를 자르게 만들 심산이었다.
퍼퍽.
그런데 갑자기 들리는 파육음과 함께 세상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끔찍한 고통.
“꺄아아악!”
두 발의 화살이 필리아의 두 눈이 있어야 할 곳에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