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시향회
마차의 덜컹거림 속에서 더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엔트시가 보입니다.”
그 말에 에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깨에 기대서자고 있던 아린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다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서 입가를 닦고 있었다.
“일어들 났는가?”
에드는 마차의 창밖을 살폈다. 길게 이어진 성벽이 눈에 들어왔고, 해가 꽤 기울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
“그래도 해지기 전에 들어왔으니 다행이지. 네프사엘이 아무리 자네의 밤잠을 방해하고 싶어도 성벽을 넘어서 마수나 악마를 보내는 것은 힘든 일일 테니 오늘은 편히 쉴 수 있겠군.”
“자고 일어나서 쉴 필요는 없겠네요. 우선은 그란트 상단을 찾아가 보죠.”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상단주와 셋째 부인은 오늘 영주성에 들어갔다는군.”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아낸다는 것은 알았지만, 계속 마차에서 함께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내는가 궁금했다. 영주 성에 들어가 있다면 지금 당장은 만나기 힘들 것 같았다.
지금 에드의 능력이라면 영주의 눈 밖에 난다고 해도 충분히 몸을 빼낼 수 있다. 아니, 작정한다면 영주도 죽이고 앞을 막는 자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평생 쫓기게 될지도 모른다.
영주를 죽이게 되면 왕국에서 현상금을 걸고 죽을 때까지 쫓아올 테지만, 귀찮음을 감수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렇게 사람을 죽일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기에 이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중이다.
테인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러니 오늘은 쉬도록 하세. 영주 성에 들어가면 못 들어갈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귀족들을 불러서 연회를 열었다고 하니 괜히 그들의 눈에 띄어 봐야 좋을 것 없지 않겠나?”
“그렇죠.”
귀족들이라는 족속들에 대해서는 이제 알 만큼 알았다. 그들은 가능한 피해야 할 존재들이다.
“엔트 시는 그란트 상단이 운용한다고 해도 될 만큼 그들의 영향력이 짙은 곳이지. 향수를 주력으로 만들지만, 그들은 술과 담배도 잘 만든다네. 난 그중에 프레안 꽃향기가 나는 프레티안이라는 술을 좋아하네.”
그러고 보니 엔트 시는 악마의 시대 1을 하는 동안 들르지 않는 곳이지만, 프레티안이라는 술에 대해서는 나온다. 펜드리건도 테인 덕분에 맛을 들인 술.
사실 현실에서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샴페인 정도만 즐겼는데 이곳에 오니 즐길 거라고는 몇 개 없어 술도 즐기게 되었다.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린이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그럼 저는 교회에 들러 네프사엘의 일에 대해 보고하고 가도록 할게요. 어디로 갈 생각이죠?”
“‘석양이 머무는 곳’으로 오게. 엔트 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걸세.”
“그렇게 할게요.”
엔트 시의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서 아린은 잠시 일행을 떠났다.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성 안에서 그녀가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
마차가 멈춘 곳에서 내린 에드는 그곳에서 7층 탑을 보았다. 술집치고는 너무 공을 들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귀족들도 애용하는 곳이네. 가지.”
테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보통 여관과는 달랐다. 메이드 복을 입은 여인이 다가왔는데 영주성에서 볼 수 있는 하녀의 복장을 세련되게 만들었다.
메이드 카페에서나 보았던 짧은 치마의 하녀 복장에 에드는 픽 웃음을 흘렸다.
“층을 오를수록 비싸다네.”
그리 말하고 테인은 거침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긴 에드는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해서야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성벽 너머 저 멀리 들판에 기울어져 가는 석양이 눈에 들어왔다.
7층에 자리를 잡은 테인에게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푸른 드레스에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다가와 테인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테인이 그녀의 왼손에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이오. 그란트 부인.”
초록색의 눈에 뾰족한 귀. 요정과 결혼한 건가?
그란트라는 자는 부인이 셋이나 된다고 했는데? 보통 놈이 아닌가 보다.
“이곳까지는 어쩐 일인가요? 혹 악마의 흔적이라도 찾은 건가요?”
그란트 부인의 물음에 테인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흔적을 찾고 있을 뿐이오. 부인은 어째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소?”
“독수공방하니 마음에 평안을 찾아서 그런가 봐요.”
요정족 농담인가? 요정들은 기본적으로 20대의 몸으로 장수한다. 빠르게 성장해서 20대의 몸으로 200년을 넘게 사는 것이 요정족이라는 설정이다.
원래 늙지도 않는 이가 저런 농담을 하다니 잠시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는데 여인의 시선이 에드에게 향했다.
“언제 소개해줄 생각이죠?”
테인은 그 말에 에드를 소개했다.
“이쪽은 에드라는 친구요. 악마 사냥꾼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이지.”
에드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메릴 그란트에요. 그란트의 첫 번째 부인이죠.”
메릴이 왼손을 내밀며 하는 인사에 에드는 멀뚱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어쩌라고? 테인이 입 맞춘 곳에 지금 자신보고 입을 맞추라는 건 아니겠지?
“장난은 그만 치시오.”
메릴은 그 말에 맑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리를 권했다.
“편히 앉아요.”
테인과 에드가 창가 자리에 앉자 메릴도 한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손짓했다. 메이드복을 입은 직원이 보라색 자기 병에 담긴 술을 가지고 왔다.
테인이 그걸 보고는 흐뭇해했다.
“프레티안 17년 산이군.”
“반가운 손님이 왔으니 좋은 술을 내와야죠.”
메릴이 직접 술병의 마개를 여니 향긋한 꽃향기가 장내에 퍼졌다. 주향이 이렇게 좋은 것은 또 오랜만이다.
그녀가 술잔에 술을 채워서 건네주자 에드는 그 향을 음미하고는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찌르르 울리는 짜릿함과 함께 전해주는 향.
메릴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술을 먹고 연인끼리 입을 맞추면 그 향에 취한다고 하죠.”
에드는 그녀의 입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을 보고는 감탄했다. 자신의 입에서도 같은 향이 나고 있었다.
서로 술에 취하고 꽃향기에 취하게 만들려는 술인가?
에드는 말없이 술잔을 더 내밀었고, 메릴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채워줬다. 안주도 없이 술잔을 비우는 데도 만족스러웠다.
괜히 안주를 먹으면 오히려 술맛에 방해가 될 정도로 좋은 술이었다.
에드가 술을 비우는 사이에 테인이 술잔을 만지며 물었다.
“그란트가 셋째 부인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메릴이 픽 웃음을 흘렸다.
“당신의 귀는 여전히 밝군요.”
“어떤 여인이오?”
“붉은 머리에 정열적인 여인이죠. 향수 제조의 조예가 깊어서 그란트가 얻은 부인인데 최근에 그녀와 새로운 향수를 개발한다고 거의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조향사란 말이오?”
“예. 신제품 개발이 성공해서 영주님이 인근의 귀족을 초대해 제품을 선보이는 날이에요.”
에드는 그 말에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릴이 그를 돌아보자 에드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잠시 볼 일이 생각나서요.”
에드가 테인과 눈을 마주치자 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난 여기서 술 마시고 있을 테니 볼 일 보고 오게.”
“그럼.”
에드가 메릴에게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 떠났다. 밖으로 나온 에드는 영주성을 바라보았다.
악마로 의심받는 이가 만든 향수. 그리고 오늘 펼쳐진다는 시향회.
냄새가 났다.
에드는 곧장 영주성으로 향했다. 석양이 지면서 어두워지는 거리의 건물 그림자 속으로 에드가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검은 가죽 코트를 걸치고 있는 데다가 민첩이 높아서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달린 에드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영주성의 성벽을 찾아서 벽에 등을 기댔다.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아서 석양의 그림자에 숨은 에드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에드는 잠시 영주성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영주 중에는 대저택에서 사는 자도 있고, 이렇게 따로 성벽을 두르고 성에 사는 이들도 있다.
보통 성에 사는 이들은 영주 중에서 특별히 까다로운 자들이다. 혈통을 중시하고 귀족이 아닌 자들은 한없이 깔보는 자들.
에드는 잠시 그곳에서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석양이 길게 드리워지며 하늘을 불태우다가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며 짙은 어둠이 깔렸다.
에드는 땅을 박차고 올라 성벽에 튀어나온 돌에 손가락을 걸치고 확 잡아당기며 뛰어올라 단숨에 성벽 위로 올랐다. 에드는 그곳에서 자세를 낮춰 주위를 돌아보았다.
성벽을 따라서 횃불을 들고 순찰을 도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횃불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이 안으로 잠입하기 좋은 때였다.
에드는 주저하지 않고 성벽에서 뛰어내려 훈련장을 지나갔다. 그리고 영주성의 벽에 등을 기댄 채 귀를 기울였다.
성의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오늘 귀족들을 불러 시향회를 한다면 저들이 있을 곳은 연회장. 에드는 성을 돌아보다가 연회장을 살필 수 있는 곳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드가 2층의 열린 창문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 복도의 벽에 붙어서 귀를 기울였다. 감각은 레벨이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오르고 있었다.
더 먼 곳을 볼 수 있었고, 더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됐다. 감각을 일깨운 에드는 가장 소란스러운 곳을 찾았다.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에드는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 복도로 가는 문을 발견했지만, 그 앞에는 한 명의 병사가 서 있었다. 에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복도의 그림자에서 튀어나가 병사에게 도달하는데 필요한 것은 단 두 걸음. 그렇게 도달한 에드는 병사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릴 때 이미 그의 턱을 후려치고 있었다.
턱이 흔들리고 눈이 풀린 채 쓰러지는 병사를 붙잡아 소리를 내지 않고 복도 구석에 숨겨 놓은 후에 에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회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복도. 에드는 그곳에서 모인 이들을 살펴보았다.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고 하더니 남자들은 한쪽에 모여서 술과 함께 시가를 피우고 있었고, 한쪽에는 여자들이 모여서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직 시향회를 시작하지 않았는지 분위기는 좋았다.
에드는 경계 상태를 살폈다. 연회장 입구에 서 있는 것은 기사들이었고, 경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귀족 뒤편에 두 명씩 서 있었다.
시골 기사 수준이라고 해도 기사의 수가 스무 명은 모인 곳.
에드는 귀를 기울여 그들의 얘기에 집중했다. 저들 중에 분명 그란트와 그의 셋째 부인이 있을 테니까.
시가를 피우는 남자들의 이야기 중심에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란트라고 부르는 남자.
부인을 셋이나 뒀다고 하는 남자라서 뭐가 특별한가 싶었는데 웃는 얼굴상의 중년인일 뿐 특별히 뭔가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란트를 확인한 에드는 악마로 의심받는 그란트 부인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붉은색의 머리라는 것을 기억한 에드는 여인들이 모인 곳을 살피다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고운 목선을 드러낸 채 귀부인들의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는 여자.
작은 손짓 하나, 눈빛 하나에도 교태가 어려 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매혹하고 있는 여인.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매혹의 악마 필리아.
중급 악마로 사람들을 매혹해서 그 생명력를 갈취하는 악마다.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찌할까 고민할 때 그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샴페인 잔을 가볍게 티스푼으로 두드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란트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희 상단에서 출시할 신제품 프레아스의 시향회를 위해 흔쾌히 연회장을 빌려주신 아메트 공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란트가 한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메트 공이라고 불리는 귀족. 그의 얼굴을 보니 얼마나 완고한 귀족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귀족이 연회장을 빌려준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프레안 꽃과 총 서른여섯 가지 꽃의 향을 농축해 만든 이번 신제품 프레아스를 참가해 주신 귀빈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란트가 손짓하자 그의 셋째 부인이 다가가 옆에 섰다. 연회장의 입구에서 기사 둘을 대동한 채 시종장이 쟁반 위에 크리스탈 작은 병을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찰랑이는 호박색 액체를 보고 에드는 잠시 고민했다.
저 여자가 정말 필리아고 그녀가 저 향수를 만들었다면 분명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이 시향회를 막지 못하면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에드는 가만히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아린을 데리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에드는 한껏 시위를 당긴 채 그란트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시종장이 들고 오는 향수병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시향회를 하는 곳에서 시가를 피웠다. 시가의 향조차 누를 만큼 강한 향이라는 걸까?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걸까?
그란트 부인의 눈에 깃든 욕망을 읽은 에드는 자신의 감에 따라 그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