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칼란의 의뢰
소나는 닫힌 문 앞에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유. 내가 진짜 참는다.”
어제 미인계를 쓰다가 어이없이 차인 후로 기가 막혀 돌아간 후로 그의 행적을 조사했다. 환락가를 갔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암상을 찾아갔다.
암상을 찾아간 것에 그치지 않고 암상과 함께 움직였다. 암상이 용병을 고용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가 어제 새벽에 돌아왔다고 들었다.
아인 강에서 상선을 털어먹는 수적들이 나타나 암상의 상선을 털었다고 하더니 그들을 해결하는 자리에 꼈나 보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했다.
식당으로 내려가서 음식과 술을 시키고 기다리던 그녀는 에드를 점심까지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점심이 되어서야 내려온 에드는 술을 세 병째 비운 소나를 보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가죽 코트를 입은 에드가 그녀의 앞에 앉으며 물었다.
“뭔 대낮부터 술이야?”
“아침부터 마셨거등요?”
혀가 살짝 꼬부라진 소나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에드는 다음부터는 마력이 바닥나도록 활을 쏘지 말아야겠다고 여겼다.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적을 제압해야 했다. 중급 악마라서 고생한 거지 하급 악마라면 어렵지 않게 잡을 자신도 있었다.
에드는 술병을 집어 들고는 물었다.
“그런데 날 왜 찾아온 거야?”
에드의 물음에 소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그랬더라아?”
아칼란의 팀장급 요원인데 뭐가 이리 허술한지 모르겠다. 에드는 술병을 병째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소나가 뺨을 가볍게 두드리는가 싶더니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살짝 돌렸다.
“으흐흐흥!”
에드는 앞에서 갑자기 묘한 콧소리를 내는 소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소나는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는 에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대낮까지 잠을 자고 그래요?”
“피곤하면 잘 수도 있지. 출근할 것도 아닌데.”
“출근?”
“됐고. 왜 찾아왔냐고.”
소나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새침하게 앉아서 에드를 바라보았다.
“암상의 의뢰는 잘 해결했나요?”
술 먹고 맹하게 구는 구석이 있어서 잊고 있었다. 그녀가 아칼란의 팀장급 요원이라는 것을.
“잘 해결했지.”
“수적 잡는데 악마 사냥꾼이 왜 필요했는 데요?”
자세한 내막은 잘 몰랐나 보다. 암상과 의뢰의 비밀 유지를 하기로 한 것도 아니었기에 왜 자신이 필요했는지 알려줬다.
“수적이 악마와 악마 추종자들로 이뤄져 있었거든.”
“뭐?”
놀라서 반말로 내뱉는 소나에게 에드는 담담히 말했다.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다 잡았어.”
“역시 악마 사냥꾼이네. 이걸로 23마리째인가?”
“맞아.”
소나는 새삼 에드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전설이 된 이들을 제외하고 이만큼이나 홀로 악마를 사냥한 이가 있었던가?
성기사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기사라고 해도 이 짧은 시간에 이만한 수를 잡아내지는 못한다. 악마 사냥꾼 에드의 활동 시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반말이야?”
“싫어?”
에드는 픽 웃음을 흘렸다.
“언제쯤 대답할 거야?”
“암상의 의뢰를 받았다는 건 보수만 적당하면 일을 해주는 거지?”
“악마를 잡는 일이니까 한 것일 뿐이야. 아무나 죽여주고 그러지 않아.”
“그러니까 악마는 잡는다는 거잖아.”
에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는 걸 듣자니 악마를 잡으라는 의뢰를 내겠다는 것 같은데 아칼란은 암상과 다르다. 악마를 잡는다는 대의를 따르는 그들은 각종 교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단순히 악마를 잡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에드가 의심쩍게 바라보자 소나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악마를 하나 잡아야 해. 인간형으로 변한 녀석인데 놈을 잡아 줘.”
“성기사들에게 부탁하지?”
소나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흔들렸다. 확실하게 뭔가 숨기고 있었다.
“보수 얘기부터 할까? 보수는 유물급 장비. 또는 그에 준하는 골드를 준비해줄 수 있어.”
말을 돌리는 소나를 보고 에드는 잠시 고민했다. 아칼란과는 어떻게든 엮이게 될 텐데 굳이 그들과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좋아. 유물급 장비로 받도록 하지. 필요한 것은 단검이야. 대신 선불로.”
“좋아. 대신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해.”
어차피 암상도 감시자를 붙였다. 이쪽은 아예 유물급 장비를 하나 준다는 데 그 정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나가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갈까?”
“미쳤어?”
마력을 바닥까지 쓰고 아직 전부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당장 사냥은 무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쉬고 싶었지만, 그렇게 오래는 아니어도 하루는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불로 받고 움직인다고 했잖아. 내일까지 준비해 와.”
유물급 단검들은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어떤 것을 구해올지 기대가 됐기에 에드는 소나가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장비를 챙겼다.
여관을 나온 에드는 어차피 오늘 하루 쉬기로 했기에 제라드가 말했던 물푸레나무 여관을 찾아갔다. 점심시간인데도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라드를 볼 수 있었다. 악마의 시대 1에서 야만 전사의 피를 이은 사내가 틈만 나면 부르던 노래였다.
그래서 귀에 익은 노래였다.
에드가 안으로 들어서자 제라드가 테이블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손을 크게 흔들고 테이블들을 겅중겅중 밟으며 뛰어왔다.
다른 사람의 테이블을 밟고 오는 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화를 내는 이들이 없었다. 보통 이 정도면 주먹질이 오고가야 하는 데도 말이다.
그렇게 앞에 내려선 제라드가 씨익 웃었다.
“정말 왔군!”
“오늘 밖에 시간이 안 나서.”
“크하하하하. 잘 왔네! 이쪽으로 오게.”
제라드가 어깨동무를 한 채로 끌고 가기에 에드는 그 손을 가볍게 쳐내고는 물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리 열정적으로 널 보는 거야?”
“내가 오늘 여기 술값 다 낸다고 했거든.”
에드는 제라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골든벨을 울렸다는 건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녀석이?
한심함에 빠르게 손절 해야 하나 고민이 들 때 제라드는 에드를 이미 자신의 자리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낯익은 이들이 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하멜과 시르케가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적당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르케가 에드를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님!”
에드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겁니까?”
“제라드가 술 산다고 가자고 해서 새벽부터 와서 마시는 중이었죠.”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보니 이 요정들도 말술인가 보다.
하멜이 술병을 들어 권하기에 에드는 술잔을 하나 잡아서 옆으로 털어내고 술을 받았다. 하멜은 그 모습에 드물게 눈웃음을 짓고는 술을 따라 주었다.
술을 받은 에드가 잔을 단숨에 비우자 옆에 앉은 제라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역시 화끈하군.”
에드는 마셨던 술이 위장까지 불을 지르듯 내려갔다가 코로 찡하고 올라오는 기운에 씨익 웃었다. 체력 수치를 올려두지 않았다면 한 잔 마시고 고꾸라질 정도로 독한 독주였다.
그제야 에드는 테이블에 놓인 술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 인간들. 말술 정도가 아니다.
독주를 이렇게 많이 비울 줄이야.
제라드가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기에 그걸 받아서 또 단숨에 비우고는 물었다.
“다리는 어때?”
제라드가 자신의 다리를 탁 소리가 나게 두드리며 답했다.
“멀쩡해.”
확실히 야만 전사들의 회복력은 괴물 같았다. 에드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포드는?”
“보수를 받고는 어딜 급히 가더군. 바로 말 타고 떠나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
“그래?”
금패 용병. 그 실력은 직접 봐서 안다. 친분을 쌓아놓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잔의 술잔을 비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부분의 얘기는 제라드가 주도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저 북방의 섬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작년에 배가 난파되어서 로젠타로 대륙에 어떻게 흘러들어왔는지 얘기를 주절주절 떠들었다.
대충 에드가 이곳으로 넘어온 때부터 활동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그 얘기를 들으니 제라드가 다시 보였다. 확실히 이 녀석 비중 있는 캐릭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밖에 시간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다른 일을 하나 맡아서.”
제라드가 질렸다는 듯 에드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쉬어가면서 일해야지. 무슨 일을 쉬지도 않고 해?”
에드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시르케가 붉어진 볼을 양손으로 잡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에드를 보며 물었다.
“보수가 좋은 일이에요?”
“보수는 만족스러운 수준입니다.”
“에드님이 만족스러울 정도의 보수라면 저희도 구미가 당기네요.”
에드는 잠시 시르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시르케와 하멜의 실력은 믿을만했지만, 자신도 의뢰를 받는 처지였으니까.
이번에는 소나도 같이 움직이니 다른 이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확실히 아칼란에 눈도장을 찍어놓을 생각이었으니까.
“이번 일은 무리고 다음에 또 함께할 일이 있겠죠.”
제라드는 몰라도 하멜과 시르케 모두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낭중지추라고 그들은 계속 이쪽 바닥에서 일한다면 이름이 높아질 테고,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저만한 수준의 인물들이면 엑스트라처럼 스쳐 지나갈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하멜이 고개를 끄덕이고 술병을 내밀었다. 이 인간들이 이 독주를 술잔에 따라주는 것도 아니고 병을 내밀고 있었다.
에드는 술병을 받아서 병나발을 불어줬다. 꿀떡꿀떡 단번에 비우자 주위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제라드가 일어나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에드! 술이 고팠나 보군. 마음껏 마셔. 내가 계산할 테니까.”
그 말 후회할 거다.
에드는 호기롭게 또 다른 술병을 들고 단숨에 비웠다. 주위의 환호성이 커지고 제라드도 경쟁하듯 술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 날 물푸레나무 여관은 창업 이래 최대 매출을 올렸다.
소나는 새벽같이 찾아왔다. 물푸레나무 여관에서 제라드를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뛰어난 체력 수치 덕분에 멀쩡한 정신으로 걸어오는 에드의 앞에 선 소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괜찮아?”
“봤어?”
“봤지. 야만전사를 술 내기에서 쓰러트리다니. 대단하네.”
에드는 픽 웃고는 물었다.
“급했나 보네. 어디 물건부터 볼까?”
보수를 선불로 받겠다고 했으니 우선 물건부터 볼 생각이었다. 에드의 물음에 소나가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서 검집째 건네줬다.
에드는 단검을 쥐고 단숨에 뽑았다. 붉게 타오르는 검면을 본 에드가 소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샐러맨더의 검이라고 부르는 정령검이야. 마력을 잡아먹지 않지만, 일정 이상의 불길을 일으키고 나면 정령력이 회복되고 나서야 쓸 수 있어.”
빙결의 활은 마력을 잡아먹었는데 이건 같은 유물임에도 마력을 쓰지 않으니 둘이 쓰기 좋았다. 게다가 이건 야숙할 때 불을 피우기에도 좋아 보였다.
에드는 단검을 검집에 다시 집어넣고는 허리에 찼다. 명품 단검까지 두 자루 단검을 착용한 에드가 소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의뢰 내용을 들어볼까?”
소나가 미소를 지은 채 의뢰 내용을 말해줬다.
“우리가 잡아야 할 인간형 악마는 왕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