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상 전투
쾌속선의 갑판은 10미터 정도 된다. 뒤편에 서 있는 이들까지 생각하면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은 훨씬 좁아지는 상황.
중급 악마 중에서 어떤 놈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칼을 휘두르는 솜씨를 보니 간단히 볼 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화살을 시위에 걸고 뒤로 물러나는데 둘의 사이로 금패 용병 포드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포드의 손에 들린 브로드 소드가 중급 악마의 칼을 막았다.
끄그극.
중급 악마의 근력에 포드의 무릎이 휘청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브로드 소드를 기울여 중급 악마의 칼을 흘려내고는 옆으로 구르듯이 빠져나가며 중급 악마의 발등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격식을 따지는 기사들과 달랐다. 배 위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주저함이 없었고, 중급 악마도 포드의 검술에 몸이 멈칫 굳었다.
포드는 홀로 중급 악마를 잡을 생각은 없었나 보다. 굴러서 중급 악마의 뒤편으로 가더니 쾌속선을 넘어오는 붉은 눈의 악마 추종자들을 향했다.
하멜이 일곱 발의 화살을 다시 중급 악마에게 쏟아부었다. 연달아 날아드는 화살에 포드를 쫓지 못하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칼을 휘두른 중급 악마는 발에 박힌 단검을 뽑으려고 손을 내리려 했지만, 그럴 틈은 주지 않았다.
어느새 주문을 마쳤는지 시르케가 내민 지팡이에서 불어온 바람의 칼날이 중급 악마를 덮쳤다.
“감히!”
중급 악마는 힘껏 칼을 내리치며 바람의 칼날을 잘라냈다. 놀라울 정도의 반사신경에 괴력. 인간형인데도 저만한 능력을 지닌 자들은 중급 악마라고 해도 그리 많지 않았다.
중급 악마는 그 종이 서른 종 정도밖에 되지 않아 대번에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중급 악마 크레아틴.
본체일 때는 반쯤 영체인 녀석이라 인간형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추종자를 만드는데 특화된 악마다.
오히려 인간형일 때 더 까다로운 악마.
그러면 우선 인간형을 포기하게 해야 했다. 이미 거리를 벌렸던 에드는 세 발의 화살을 연달아 날렸다.
카카캉!
세 번째 화살에 냉기를 실어서 쐈기에 바닥에 꽂힌 주위가 쩌저적 소리를 내면서 얼어붙었다. 발을 완전히 묶어 놓기 위해서 과하게 마력을 불어넣기도 했지만, 그의 배 쪽을 노리고 쏜 화살을 쳐내면 아무래도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에 두 발이 붙은 크레아틴의 안색이 굳어질 때 다리를 베여 쓰러졌던 제라드가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크레아틴은 인상을 찌푸리며 칼을 뒤로 돌려 배틀 액스를 막았지만, 발이 붙은 상황에서 몸을 돌리지도 못한 상황이라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칼이 부러지고 그대로 크레아틴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그사이 악마 추종자들이 모두 포드의 손에 죽었다.
제라드는 그제야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꼴 좋다!”
에드는 그사이 화살을 시위에 걸고 마력을 주입하는 중이었다. 다리가 잘린 상황이라 크레아틴이 인간형을 버리고 본체로 돌아가고 있었다.
허물을 벗듯 인간가죽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하멜이 연달아 화살을 쏘았지만, 인간형을 포기한 이상 일반 물리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크레아틴은 그렇게 가죽을 벗고 영체 형태로 돌아갔다. 반 영체라고 한 것은 저 상태로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인데 물리력을 행사하는 순간에는 공격이 통한다.
그래서 에드는 한 발 더 뒤로 물러났다. 쾌속선의 끝까지 물러난 에드보다 시르케가 먼저 크레아틴에게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영체 상태인 크레아틴에게 공격이 통하는 건 시르케의 마법과 자신이 쓸 수 있는 냉기 화살 정도였다.
크레아틴은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피하고는 그대로 시르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시르케가 황급히 보호막을 펼쳤지만, 크레아틴이 주먹을 키우더니 내리치자 그 힘에 짓눌려 갑판을 부수고 물로 빠졌다.
그렇게 크레아틴이 시르케를 물에 빠트리는 순간 냉기 화살을 날렸다. 지금까지 마력을 모아서 처음 바닥을 얼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위력이었다.
크레아틴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왼손으로 화살을 잡았다.
쩌저적.
극한의 냉기에 크레아틴의 왼팔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영체라지만 이렇게 마법으로 공격을 가했을 때는 형체를 이룬다.
뒤에서 달려온 포드가 그 팔을 잘라냈다.
-끄악! 내 팔! 내 팔을!
에드는 하멜이 시르케를 구하겠다고 바다로 뛰어든 것을 보고는 크레아틴과 싸울 수 있는 것이 자신과 포드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역시나 중급 악마.
싸우는 법을 알고 있다.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인 신비술사를 처리하고 남은 이들을 상대하는 것만 보아도 그 경험치를 알 수 있었다.
에드가 재차 마력을 끌어올리자 크레아틴이 곧장 날아왔다. 영체 상태일 때는 땅에 발을 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물이 차오르며 가라앉고 있는 쾌속선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비술사 시르케를 제외하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에드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펼치는 공격이었다. 지금까지 모은 마력을 이용해 급격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크레아틴을 향해 냉기 화살을 날렸다.
아까처럼 길게 모으지는 못해 위력은 반감되었지만,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문제는 팔을 하나 잃은 크레아틴이 눈이 돌아갔다는 점이었다.
잘려나간 팔을 앞으로 내밀고 그대로 돌진해 왔다.
왼팔의 어깨너머까지 얼어붙었지만, 그렇게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다가온 크레아틴이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쾌속선 선미에 서 있던 에드는 그대로 충격에 튕겨 날아가면서 크레아틴을 바라보았다.
크레아틴은 들이받는 순간 영체가 잠깐이지만 육체를 갖는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혀 비도 하나를 목에 꽂아주었다.
왈칵 피가 쏟아지는 크레아틴을 향해 포드가 뒤를 노리며 브로드 소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크레아틴은 이미 영체화가 되어 목에 꽂아 넣었던 비도도 떨어진 상황이다.
포드의 브로드 소드가 크레아틴을 그냥 스쳐 지나가자 크레아틴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지금 크레아틴은 왼쪽 어깨까지 얼어붙은 상황에 목에 비도가 꽂히며 심각한 중상을 입은 상황이다.
영체가 흐릿해진 것만 보아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영체의 장기를 살려 허공에 떠오른 것.
쾌속선이 부서져서 모두 아인 강에 빠질 상황이었다. 수적들의 쾌속선까지 이동하면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놈을 놓친다.
떨어지기 전에 활에 마력을 주입해 허리를 틀어 강물에다가 냉기 화살을 쐈다.
쩌저적.
강물이 얼어서 얼음 덩어리가 수면 위에 뜰 때 그걸 밟고 화살을 잡아서 강물에 빠지는 것을 간신히 면했다. 하지만 에드의 무게 때문에 얼음 덩어리가 출렁이며 반쯤 가라앉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강물에 빠지는 것은 면했다.
재차 화살을 시위에 걸자 크레아틴이 그런 자신을 보고는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에드가 시위에 화살을 걸 때 크레아틴이 그대로 날아왔다.
그때 가라앉은 쾌속선에서 바람의 칼날이 크레아틴을 향해 날아들었다. 에드를 향해 날아오던 중이라 황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영체에 큰 상처를 입었다.
“흡.”
숨을 깊게 들이마신 에드는 다섯 발의 화살 모두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연발로 화살을 날렸다. 쉬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놓았는데 다섯 발째에는 냉기가 실리지 않았다.
마력이 바닥난 상황.
하지만 날아오던 크레아틴의 몸에는 네 개의 화살이 박혀서 전신이 얼어붙은 채로 강물에 떨어졌다.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강물을 출렁일 때 에드는 밟고 있던 얼음 덩어리를 밟고 뛰어올라 크레아틴의 얼어버린 몸 위로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고 허리에서 뽑은 헌팅 나이프를 그 미간에 꽂아넣었다.
쩌저적.
얼어붙었던 영체가 깨져나가며 크레아틴의 숨이 넘어갔다. 들어오는 경험치에 레벨이 오른 것을 느낀 에드는 그제야 긴 숨을 토해냈다.
육지에서 만났다면 지금보다 훨씬 간단히 잡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냉기의 활 성능이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배 위에서 싸우다 보니 상대하기 어려웠다.
에드는 크레아틴의 조각난 육체가 아인 강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다가 훌쩍 뛰어서 쾌속선의 잔해를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월등한 민첩 수치 덕분에 물 위에 뜬 쾌속선의 잔해를 밟고 수적들의 쾌속선에 오를 수 있었다. 쾌속선의 노를 젓는 이들은 악마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그냥 노예들일 뿐.
그들은 에드가 배에 올라 화살을 겨누자 모두 손을 들어 올렸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러 이동해.”
수적들의 쾌속선이 선수를 돌려 가라앉은 쾌속선 근처로 이동하자 하멜이 시르케를 데리고 쾌속선 위로 올랐다. 포드도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제라드를 데리고 쾌속선에 올랐다.
안내해준 사내부터 시작해서 쾌속선의 노잡이들까지 구출했는데 노잡이 중 두 명이 죽었다. 크레아틴이 시르케를 보호막 채로 강물 속으로 때려 넣을 때 밑에서 휩쓸린 이들 둘이 죽었다.
그렇게 모두 물밖으로 나오자 시르케가 물을 토해내고는 제라드에게 다가가 다리에 회복 주문을 걸었다. 마법사들의 회복 주문은 신성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응급 처치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게 상처가 봉합되자 제라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 미안.”
에드는 제라드가 너무 기죽은 것처럼 보여서 한 마디 위로를 해주었다.
“악마의 다리를 잘라준 덕분에 쉽게 잡을 수 있었어.”
제라드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그렇지? 나도 한몫한 것 맞지?”
암상 쪽에서 파견 나온 사내의 눈치를 보면서 하는 말에 에드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지금 당장은 실력이 미천해 보이는 제라드지만 벌써 암상의 눈에 띌 정도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면 이번 전투를 계기로 크게 성장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돈도 안 드는 칭찬을 해주었다.
“충분히 한몫했어.”
베른 시의 부두로 돌아왔을 때는 제라드도 두 발로 걸을 정도로 회복했다. 고작 마법사의 회복 주문 정도로 저만큼이나 회복이 되는 몸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역시 야만 전사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모두 쾌속선에서 내리자 암상에서 따라 나온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 분은 저와 함께 보수를 받으러 가시죠.”
그 말에 제라드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난 물푸레나무 여관에 며칠 머물 생각이니 한 번 들러. 내가 술 사지.”
에드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정도로 답하고 돌아섰다. 자신은 보수를 미리 받았기에 굳이 아리엔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으니 이대로 여관을 찾아가 쉴 생각이었다.
제법 걸릴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하루 만에 끝난 의뢰에 보수가 짭짤했다. 빙결의 활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다양한 전술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멜과 시르케도 에드에게 다가왔다. 시르케의 젖은 옷 위로 하멜의 로브가 걸쳐져 있었다.
“둘이 연인이었나?”
하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르케가 미소를 지은 채 설명했다.
“하멜은 목소리를 잃었어요. 그러니 오해하지는 말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예요.”
그러고 보니 하멜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시르케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악마 손에 모두 죽었을 거예요.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마지막에 물속에서 날린 바람의 칼날이 아니었다면 내가 죽을 수도 있었어. 고마워.”
시르케는 묘한 눈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겸손하신 분이네요.”
겸손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 대신 거짓말은 못 하고 살아왔었기에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진심이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기를.”
그 둘도 사내를 따라 움직이자 포드가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것은 크레아틴이 날 공격했을 때 목에 꽂아 넣었던 비도였다.
영체화 되면서 자연스레 강물에 빠진 줄 알았는데 그걸 또 제라드를 건져오는 중에 집어왔나 보다.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신세를 갚을 날이 있겠지.”
남의 얘기처럼 중얼거린 채 떠나는 포드를 보니 저 인간 금패 용병이면서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내를 따라 네 명의 용병들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도 빙결의 활을 어깨에 걸치고는 부두를 떠났다.
에드는 여관을 잡고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서 쓰는 바람에 오랜만에 느끼는 피곤함이었다.
그냥 푹 잘 생각이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에드가 헌팅 나이프를 손에 든 채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서 소나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을 쾅! 닫았다.
“저기요? 에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