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제 아론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준비해준 편한 옷을 입은 에드는 초대받은 저녁 식사에 참여했다.
여느 귀족답게 식탁은 길고도 길어서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을 먹으면 되는 구조였다. 맞은편에는 베릴 남작이 앉아있었고, 그의 옆에는 엘리스를 닮은 여인과 엘리스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에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뒤에는 아까 자신을 꼬나보던 기사가 서 있었는데 지금도 그의 눈빛은 뭐가 불만인지 쏘아보고 있었다.
식탁 앞에 놓인 것은 은촛대와 그 위에 놓인 양초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 창가로 들어오는 붉은 빛과 함께 양초가 은은하게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시녀와 하인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에 베릴 남작이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소. 그대가 그 유명한 악마 사냥꾼 에드일 줄은 몰랐소.”
악마를 수소문하고 그가 지나간 곳에는 악마가 사라지다 보니 에드는 원치 않아도 조금씩 이름을 얻고 있었다.
악마라는 존재는 쉬이 상대할 수 없는 자들. 그런 자를 사냥한다는 것만으로 스스로 무력을 증명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16년 전에 세 영웅이 남긴 발자취를 좇고 있는 거요?”
에드는 그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시대 1은 15년 전에 나왔던 게임. 이 세계에 끌려온 지 1년까지 더해서 16년. 게임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자유 기사 펜드래건.
신비술사 헬레나.
드루이드 드레드.
그 세 명은 대악마마저 하나씩 죽인 진정한 악마 도살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위명을 쫓아 악마를 사냥하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허명이었다.
간혹 진짜 악마를 사냥한 이들도 있지만, 그걸 업으로 삼는 이들은 감히 없었다.
악마와 대적해 본 자만이 악마의 진정한 강함을 알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악마 살해자는 가끔 보여도 악마 사냥꾼이라는 위명을 얻는 이들은 그 세 영웅 이후로 없었다.
“그저 해악만 끼치는 놈들을 죽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 세 영웅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1년 동안 제법 레벨을 올렸지만,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그들을 만나서 도움을 얻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유 기사 펜드리건만이 왕도에 머문다는 말을 들었을 뿐, 신비술사 헬레나와 드루이드 드레드의 행적은 묘연했다.
대화를 잠깐 나눈 사이에 에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갓 구운 따뜻한 빵과 스프를 볼 수 있었다. 보통은 여관이나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다 보니 돈이 있어도 이런 음식은 구하기 힘들었다.
“일단 드시면서 얘기 나누도록 합시다.”
에드는 기다렸다는 듯 빵을 찢어서 스프에 찍어 먹었다. 스프의 고소함이 더해져 촉촉해진 빵을 먹으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맛있군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오.”
빵을 먹고 나니 샐러드가 나왔고, 그걸 다 먹고 나니 양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냄새가 나지 않게 잘 구운 양고기 스테이크도 마음에 들었다.
곁들여 마시는 와인의 향까지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모든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케이크와 차가 나왔을 때 베릴 남작이 입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원한은 배로, 은혜는 열 배로 갚았기 때문이오.”
그가 손짓하자 시종장이 다가와 테이블에 작은 목함을 올려놓았다. 에드가 목함을 바라보다가 베릴 남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 당장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입니다. 며칠 머무시면 충분히 만족할 만큼 챙겨드릴 수 있을 겁니다.”
에드는 그 말에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금화가 쉰 개 정도 있었다. 에드도 이렇게 많은 금화는 이 세계에 넘어와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에드는 목함을 닫고는 정중히 말했다.
“이것도 과합니다. 다만 이곳에서 사냥을 위한 무기들을 정비하고 싶으니 며칠 머무는 것만 허락해 주십시오.”
베릴 남작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악마를 사냥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리겠소.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내도 괜찮으니 그건 개의치 마시오. 시종장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준다면 돕도록 할 테니 사양치 마시오.”
“감사합니다.”
여기서 더 거절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준다는 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창가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던 에드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도 돼요?”
“잠깐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엘리스가 시녀와 함께 서 있었다. 가죽 코트를 걸친 에드가 밖으로 나오자 엘리스가 챙이 달린 모자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정원에서 같이 아침 드실래요?”
“그래.”
엘리스가 앞장서고 그녀의 한걸음 뒤에서 걷던 에드는 그녀를 따라 대저택 뒤편에 있는 정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튤립으로 가득한 정원이었다. 노란 꽃들의 물결에 절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정원 중앙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녀가 앞서가서 의자를 털고, 테이블보를 깔았다.
엘리스가 자리 잡고 앉기에 에드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녀가 가지고 온 바구니를 열어서 샌드위치를 꺼냈고, 오렌지 주스도 내려놓았다.
엘리스가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고 씹는 것을 보고 에드도 샌드위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삭한 양상추와 짭짤한 햄이 어우러졌다.
고작 하루 묵었는데 앞으로 이 집에서의 식사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만큼 맛이 좋았다.
1년 만에 얻는 휴식이라 여기고 식사에 집중하는데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들었어요. 당신을 기리는 노래까지 있다고 하더라고요. 영웅이라 칭송되기에 충분하다고 들었죠.”
“영웅은 무슨.”
악마를 죽이는 것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였다. 악마의 시대 2의 엔딩을 봐야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악마들을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리는 중이다.
에드는 손에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쏙 넣고는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존대하는 거야?”
엘리스가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답했다.
“은인이기도 하지만 영웅이기도 하니까요.”
에드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바델 경은?”
엘리스는 그 질문에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급 우울해진 그녀는 샌드위치를 내려놓고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답했다.
“오늘 낮에 묘지에 안장하기로 했어요.”
엘리스의 두 눈이 에드에게 고정되었다.
“같이 가주실래요?”
뭔가 기대에 찬 눈빛에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델과는 잠깐 만난 게 전부였지만, 엘리스는 그의 장례식에 자신이 참여해주는 것이 큰 위안이 되는 것으로 보여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침 식사도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어쩐지 영웅이 어쩌고 하면서 띄워주더라니.
묘지는 성의 북쪽에 있었다.
묘지기가 이미 땅을 파 놓았고, 그곳에 관을 운구하는 이들을 바라보던 에드는 미리 나와서 베릴 남작과 얘기를 나누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여자로 오해 받을 정도로 고운 선의 미남이었다.
회색의 옷에 새하얀 목깃을 채운 이가 눈에 띄었다. 가슴에 그려진 원 안으로 그려진 T자 문양.
천공의 신 아스트론 교단의 사제다. 그런데 사제치고는 굉장히 젊었다. 몇몇 사제들을 보아왔지만, 최소 사십 줄에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사제는 고작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니 믿기 힘들었다.
미리 파놓은 곳에 관을 묻자 사제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목에 걸고 있던 아스트론 교단의 징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징표가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보고 에드는 감탄했다.
아스트론 교단의 사제들은 많지만, 실제로 신성력을 보이는 자는 거의 없다.
저렇게 젊은 데도 사제직을 얻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는 아스트론님의 은총이 내려와 바델 크로이트 경을 인도하시니 그의 삶은 명예로웠고, 충성스러웠도다.”
푸르게 빛나던 빛줄기가 관을 내리쬐자 사제가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묘지기가 파놓은 곳으로 관이 내려가자 그 위로 베릴 남작을 시작으로 하나둘 국화를 내려놓았다. 에드도 국화를 한 송이 받아서 그의 관 위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곧 묘지기가 파놓았던 흙을 덮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봉분을 바라보던 이들은 무덤 앞에 모여서 술잔을 비웠다. 죽은 자의 무덤 앞에서 술잔을 비우며 그를 추억하는 것은 에드가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스도 그 자리에 모여서 웃고 떠드는 것을 보다가 뒤돌아 걷는데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천공신 아스트론의 사제가 서 있었다.
“전 아스트론님을 모시는 사제 아론이라고 합니다.”
“에드입니다.”
“남작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단에서도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를요?”
“그럼요. 대륙에 수많은 악마를 처단하는 것은 숭고한 일이니까요.”
눈웃음을 짓는 것을 보니 사제복만 아니라면 여자라고 오해를 살 법도 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라면 알아둬서 나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아칼란만이 아니라 아스트론 교단에서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메인 퀘스트와 연관이 있는 곳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아론은 활짝 웃고는 앞장섰다.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스트론 교단의 징표가 지붕에 달린 교회에 도착했다. 아론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그가 직접 차를 내주었다.
에드는 차를 마시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만한 나이에 신성력을 다루는 진짜배기 사제라면 교단 내에서 고위 신관이 될 수도 있는 재능.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이렇게 검소하게 사는 걸까?
“이번에 켈피까지 잡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은 그런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미소를 지었다.
“바델 경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나, 또 하나의 악마가 죽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더 안전해진 셈이죠. 감사드립니다.”
에드는 그런 아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금칠해주고 있지만, 그는 뭔가 주저하는 듯 보였다. 아마도 이런 류의 대화를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에드는 픽 웃고는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군요.”
“예?”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론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실 햄튼 시는 철광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며칠 전 광산에서 광부 둘이 죽었습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은 그곳에서 악마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금칠을 해주신 거였군.
“광산에 악마가 나타났다면 영주가 나설 일이 아닙니까?”
“보고는 드렸고, 베릴 남작님께서도 토미오 기사님과 병사들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바델 경의 장례식이 아니었다면 출발했을 겁니다.”
아론이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악마를 상대해 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영주님의 기사와 병사들이라고 해도 피해 없이 그들을 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에드는 그 말에 잠깐 고민했다. 좁은 공간에서의 싸움은 궁수인 그에게는 상당히 불리했다. 그래도 악마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물러날 수는 없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아론이 에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와 함께 악마를 잡으러 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냥 부탁만 할 줄 알았는데 함께 가자는 건가?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가 함께한다?
에드는 환한 미소로 아론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론 사제님의 숭고한 뜻이 그렇다면 미력하나마 제가 돕겠습니다.”
사제 버스 한번 타보자!